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책공업종합대학 (문단 편집) == 역사 == [include(틀:일제강점기 조선의 구제전문학교)] 1938년에 [[구제전문학교|숭실전문학교]](현재 [[숭실대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자진폐교하자, 대동광업사를 경영하던 광산왕 [[이종만]]이 폐교된 숭실학교의 시설을 활용해서 1939년 이공계 [[구제전문학교]]를 표방하며 광산과 1개과 80명으로 구성된 대동공업전문학교를 세웠다([[https://shindonga.donga.com/3/all/13/105746/6|참조]]). 그러나 대동공전 설립시부터 교사 신축을 위한 재원이 모자라 사채를 썼을 만큼 처음부터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았던 대동광업은 부채가 지속적으로 누적되며 1940년 부채 500만 원에 달해 자본 잠식되었고, 1942년에는 부채가 800만 원으로 이미 파산 상태여서 결국 1943년 총독부의 금광 강제정리사업에 의해 해체되고 말았다. 재단을 잃은 대동공전 역시 1944년에 [[국립대학|국립]]으로 이관되어[* 대동공전의 설립자 이종만 관련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05746/7|신동아 기사]]에서 전봉관 KAIST 교수는 대동공전을 평남도청에서 인수하여 공립(도립)으로 전환하였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조선총독부]] 소관의 관립 제학교에 관하여 규정하고 있는 [[https://www.law.go.kr/법령/조선총독부제학교관제/(00236,19440406)|조선총독부제학교관제]]에 따르면 1944년 4월 6일 개정으로 평양공업전문학교는 조선총독부 소관의 '''관립전문학교'''로 규정되었다.] 관립 평양공업전문학교로 개교하였다. 대동콘체른의 사립학교로서 광업에 치중되어있던 대동공전과 다르게, 대전 말기인 1944년 일제는 전시에 긴요한 공업 전문인력을 양성하고자 평양공전에 전기과와 조선항구과를 설치했다고 한다. 평양공전은 해방 후 [[소련군정]]에 접수되었고, 1946년 의학부가 된 [[평양의학전문학교]]와 함께 [[김일성종합대학]]을 창설하고 공학부가 되었다. 1948년 김일성종합대학 공학부에서 평양공업대학으로 독립했으나, 1951년에 [[한국전쟁]] 가운데 사망한 [[김책]]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김책공업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고 1988년에 김책공업종합대학으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