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창숙 (문단 편집) === 독립운동 === [[1905년]](광무 9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서울로 올라가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성토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 운동]] 후 망명을 결심, 전국 유림 대표들이 한국 독립의 호소에 서명한 유림단 진정서를 휴대하고 [[상하이]]로 건너가, [[파리(프랑스)|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하였다. 그해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고, 이듬해 귀국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참여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의원을 지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 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이때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의 파벌 다툼을 조정하는 데 노력하였으나 실패했다. [[쑨원]]을 비롯, 이문치(李文治)·임복성(林福成) 등 [[중국국민당]]의 여러 인사들과도 접촉하면서 '한국 독립 후원회', '중한 호조회'(中韓互助會)의 조직, 결성에도 기여하였다. 망명한 한국인 청소년들의 교육에도 관심을 갖고, 능월(凌越)·오산(吳山) 등의 도움을 받아 50여 명의 학생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외국어 교육을 받도록 후원하였다. 언론인으로도 활동하여, [[1920년]] [[박은식]]과 《사민일보(四民日報)》를 창간, 신채호와 협력해 독립운동 기관지 《천고(天鼓)》를 발간하기도 했다. [[1921년]]에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이 [[국제연맹]]에 위임 통치를 청원하는 성명서를 제출하자, [[신채호]]와 함께 [[이승만]]을 성토하는 활동을 했다. [[신채호]]·[[신성모]] 등은 [[이승만]]을 성토했고, 김창숙은 그들의 이승만 성토에 지지를 보냈다. [[1921년]] [[4월 19일]], [[이승만]]을 비판하는 성토문을 발표하였다. 그가 지은 성토문에는 [[신채호]], [[김원봉]], [[이극로]], 오성륜, [[장건상]] 등 54명이 서명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1925년]]), 서로군정서의 군사 선전 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1925년]] [[8월]] 독립운동 기지의 개간 자금 마련을 위해 김화식과 함께 국내로 잠입해 모금 활동을 펼쳤으나 계획한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 때의 모금 운동으로 600여 명의 유림이 투옥되는 제2차 유림단 사건이 발생했다. [[1926년]], [[이동녕]], [[김구]] 등과 협의해 결사대를 국내에 파견, 일제의 통치 기관을 파괴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의열단]]의 [[나석주]]가 [[1926년]] [[12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한 사건이다. [[1927년]], 상하이 주재 일본 영사관원에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됐다. [[경찰서]]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김창숙은 입을 열기를 거절하며 시 한 수를 지었는데, [[한시]]를 이해하지 못한 일본인 [[형사]]는 [[조선인]]에게 [[한시]]를 해석해줄 것을 부탁했고, [[한시]]의 뜻을 해석한 [[형사]]는 머리를 조아리며 고문형을 완화시켜 주었다.[[https://mediahub.seoul.go.kr/archives/181309|#]] 법정 예심이 끝나자 일본인 [[판사]]는 그가 수감된 감옥에 직접 찾아와 개인적으로 면담 및 시국의 논의를 부탁했으나 거절하였다. 끌려온 지 1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가족과 면회가 허락되었고, 이때 [[변호사]]들이 무료 변론을 자청하고 나섰는데 김창숙은 자신은 포로이며, 일본법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변호사를 쓸 수 없다고 거절했다. [[무기징역]]이 구형되었고, 징역 14년형을 선고받았다.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두 다리가 마비되어 앉은뱅이가 되었고, 이로 인해 형 집행 정지로 출옥하였다. 이후,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1940년]]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https://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17/01/17287/|#]] [[1943년]]에는 아들 김찬기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비밀리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김찬기는 곧 병으로 사망한다. [[1945년]]에는 비밀 결사인 [[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 발각되어 [[1945년]] [[8월]] 왜관경찰서에 구속되어 있던 중 [[광복]]을 맞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