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찬삼 (문단 편집) == 여담 == * 30대 초반 젊을 때부터 여행을 시작했는데, 주름이 많고 상당히 우락부락하고 터프한 인상인 데다가 노상 밖으로 돌다 보니 새카맣게 얼굴이 타서 나이와 인종을 가늠하기 어려워 현지인들과 비교적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이 항목 프로필 사진이 대략 60대 말 때인데, 30대 모습에서 변화가 거의 없어 결과적으로 노안에서 동안이 된 얼굴. * 2001년부터 [[영종도]] 중산동에 세계여행문화원을 차려서 가지고 온 수많은 자료를 전시하였고, 별세 후 그의 외아들 김장섭이 관장을 맡아 운영하였으나, 2007년 공항 주변이 개발되며 헐린다는 얘기가 나왔고, 2013년 결국 철거되어 2018년부터 그 일대에 [[영종역사관]]이 들어서 있다.[* 공교롭게도 문화원 부지 근처가 조선시대 군사시설 [[http://platform.ifac.or.kr/webzine/view.php?cat=&sq=107&page=1&Q=&S=&sort=|영종진 터였는데,]] 1875년 [[운요호 사건]] 당시 일본군과 교전했던 장소이다.] 다행히 홈페이지는 살아 있어서 과거 모습을 볼수 있다. [[http://www.tourtown.net/index.php|#]] 그래도 유족들은 운영 의지를 지니며 2010년에 인천시 당국과 [[http://enews.incheon.go.kr:9080/publish/php/articleview.php?idx=6228&diaryDate=2010-05-06|새 문화원 건립에 합의했으나,]] 10년이 지나도 [[http://m.joongboo.com/?mod=news&act=articleView&idxno=1214976&page=2351&total=47287#cb|아직 진척이 없다.]] 그나마 2021년 11월 그가 탔던 1968년식 폭스바겐 비틀이 복원된 후 인천시립박물관에 기탁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https://enews.incheon.go.kr/usr/com/prm/BBSDetail.do?bbsId=BBSMSTR_000000000394&nttId=8816&menuNo=3000&upperMenuId=3|기타 자료]]) * 어린 시절 이 분의 여행기를 읽고 여행가가 된 사람도 많다. 다만 여행기가 연재되던 1970년대 시절 사람들 중에는 드물다. 왜냐하면 내국인 해외 여행 자유화는 그가 여행을 끝낸 후인 1989년에야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김찬삼이 한창 이름을 날리던때에는 여권을 발급받았다는것 자체가 특권으로 여겨졌으니 그저 대리만족 정도나 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당시 한국은 국력이 밑바닥이라 여러 나라의 비자를 쉽게 얻을 수 있는 나라도 아니었다. 유학을 가거나 이민을 가서 외국 영주권을 얻지 않으면 실천하는게 쉽지않았던 것.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에야 나타난 지금 배낭여행자, 바이크 여행자들의 선구자 세대가 되는 분이다. 그런데 현재, 세계여행의 원조인 그보다는 30년이 넘게 지난 후인 90년대에 여행을 시작한 [[한비야]]가 여행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는 사실은 씁쓸하다. 한비야의 글은 오류 투성이에 불법 탈법행위도 있으며, 대필 의혹도 있는데 비해 김찬삼의 여행기는 직접 겪은 사실인 정확한 정보와 쉽고 유려한 문장으로 그 격을 달리한다. 직접 찍은 귀중한 사진들, 90년대와 50~70년대의 대한민국 국격과 경제력, 정보력이라는 여행 환경 차이를 생각하면 그 차이는 더욱 커진다. * 자녀로는 총 1남 6녀를 두었다. [[김세완(법조인)|김세완]] 전 심계원장이 그의 아버지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