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찬삼 (문단 편집) == 생애 == 1926년 6월 5일 황해도 신천군에서 출생하였다. 한국전쟁이 나던 1950년 5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리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숙명여고와 인천고 지리교사로 재직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원 지리학과를 수료했다. 그 후 [[경희대학교]] 지리학과 강사-교수와 [[세종대학교|수도여자사범대학]] 지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2331899?sid=103|#]] 은퇴 즈음에는 어린이용 TV 세계여행프로그램 해설도 했다. 그 외에 학교법인 동산학원 이사 및 이사장도 지냈다. [[화객선]][* 화물과 여객을 동시에 싣는 배. 카 페리도 일종의 화객선이다. 다만 당시의 국제 화객선은 화물선에 객실을 몇 개 마련해 둔 정도라, 여객 서비스가 형편 없었다.]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고, [[오토바이]]를 타고 북미와 아프리카를 종횡하였다. 안 가본 데가 거의 없고 사진을 많이 남겼다.[* 일부 직접 찍지 않은 사진도 실려 있었는데 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절임에도 그런 사진에는 꼭 "이 사진은 외국 잡지에서 옮겨 실었다"라는 캡션을 달기도 했다. 자신의 사진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서인 듯] 당시에는 냉전 시대고 국력도 형편없던 세계 최빈국 시절이라 비자가 안 나오는 곳도 많고 1,2차 여행 때엔 일부 공산국가에는 가지 못했는데, 나중에 80, 90년대에 갔다. 1992~93년까지 현대자동차써비스의 후원을 받아 [[갤로퍼]]로 유라시아 대륙 횡단을 포함해 288일간 세계 여행을 했다. 당시 인도 등지에서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그 후유증을 겪다가 2003년 7월 2일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2008년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지금도 불안하다 하는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의 후진국의 당시 치안상태를 생각하면 목숨 걸고 다닌 지역도 많고, 실제로 속아서 따라갔다가 실랑이 끝에, 또는 격투하고 빠져나온 무용담도 나온다. 잘 데가 없어서 현지 경찰서를 찾아가 유치장에서 잔 적도 여러 번 있었고, 아프리카에서 [[맹수]]와 만나기도 했다. 노상강도를 만나 싹 털리고 구두 속에 숨겨 둔 필름만 건진 일도 있다. 내국인의 해외 여행이 금지이던 시절에 나갈수 있던 이유는 처음엔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알바해서 돈을 벌어 갔기 때문이다. 첫 여행을 시작한 50년대 말 당시, 한국의 국력은 [[전쟁]] 탓에 모든 게 사라지고 세계에서 가난하기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최 빈국이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일부 미 수교국과 공산권[* 왜 일부냐 하면, 내세우지는 않지만 실제로 공산주의국가로 분류되었거나 국교가 없는데도 우격다짐으로 국경에서 임시 여행 비자나 통과 비자를 받아서 들어간 나라가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엔 공산국가를 허가 없이 방문했다가 국내 돌아오면 여지없이 간첩 취급, 안기부-감방행이었다. 한국 정보기관도 해외 정보가 어두워서 그냥 넘어가던 거였지, 정말 무모한 여행.]을 제외한 거의 전 세계를 몸으로 때워가며, 재외 공관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거의 무전여행을 하였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여행 중 굶기를 밥먹듯 하다 보니 먹을 게 있으면 사자나 호랑이처럼 한 번에 많이 먹고 또 한참을 버티기도 했다고 하며, 아프리카를 종횡단 두 번 했으면서도 큰 풍토병 걸리지 않고 무사하였으니, 생각하면 강철같은 체력을 가진 분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