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진(농구인) (문단 편집) == 선수 시절 == [[신일고등학교]][* '신일고에도 농구부가 있었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 있었다'''. 그러나 [[1975년]] 창단한 [[신일고등학교 야구부|야구부]]에 투자가 집중되면서(창단 1년 만에 전국대회 우승을 했으니. 2009년 자율형 사립고 전환 후에는 투자가 줄어들었지만...) 농구부는 관심에서 멀어졌고, 결국 해체되었다. [[2000년대]] 초반에 재창단해 [[주태수]], [[최윤호]] 등을 배출하기도 했으나 이내 다시 해체되었고, 그 반대급부로 [[대진고등학교(서울)|대진고등학교]]가 농구부를 창단했다. 그러나 이 팀도 몇 년 지나지 않아 해체되었다.] 시절 주목받는 가드로 [[고려대학교]](80학번)에 진학해서도 꾸준한 활약을 보이며 삼성전자에 스카우트되어 실업무대에 데뷔했다. [[농구대잔치]] 시절 [[서울 삼성 썬더스|삼성전자 농구단]]에서 10년 넘게 활약했다. 1984년에 입단하여 1년 선배인 [[김현준(농구)|김현준]]과 더불어 삼성전자의 [[가드(농구)|가드]]진을 이끌었다. 쟁쟁한 선배들인 [[진효준]], [[신동찬]], [[안준호]], [[박인규(농구)|박인규]], [[임정명]]과 함께 1984/85 및 1987/88 농구대잔치에서 각각 두 번 트로피를 들었다. 특히 1987 코리안리그 우승 시절 [[김현준(농구)|김현준]]과의 우승기념 사진은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 라이벌이었던 현대전자의 모교 대선배 [[이충희]]의 전성기 시절에 함께했던 후배 중 하나다. 모교 재학 시절 및 대표팀 시절 백업 가드를 맡았다. 선수 시절엔 득점력이 좋은 [[슈팅 가드]]로서 팀의 에이스 [[김현준(농구)|김현준]], 입단 동기 오세웅[* 오세웅은 1992-93 농구대잔치를 끝으로 다소 일찍 은퇴했다. 은퇴 후 일선 지도자로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2010년대 농구 팬들에게는 인지도가 상당히 떨어지는 편.]과 함께 삼성전자 특유의 활화산 같은 외곽포를 지원사격하는 역할이었다. 1986-87 농구대잔치를 끝으로 장신 포인트 가드 [[신동찬]], 슈터 [[박인규(농구)|박인규]], 포워드 [[진효준]], 센터 [[임정명]] 등 기존 주전들이 한꺼번에 은퇴하면서 3년차때부터 주전으로 올라선 김진은 신동찬이 맡던 리딩 가드 역할까지 맡아야 했고, 한창 전성기를 달리던 에이스 [[김현준(농구)|김현준]]을 지원하면서 1987-88 농구대잔치에서 삼성전자의 두번째 우승[* 삼성전자의 농구대잔치 마지막 우승이었다. 결승에서 [[유재학]], [[김유택]], [[한기범]]이 이끌던 기아산업을 2승 1패로 꺾고 우승했다.]을 이끈다. 특히 1987-1988 농구대잔치 결승에서의 더샷은 올드 농구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우승을 딱 한 번 했으니까 [[콩라인]]은 아니지만 결정적인 순간 우승 문턱에서 밀려 많이 좌절했다. 충격과 공포의 중앙대학교 출신이 있는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기아자동차 농구단]]의 창단과 함께 전성기에서 내려오게 된다. 당초 기아자동차는 [[방열(농구)|방열]] 감독을 시작으로 [[유재학]]과 [[정덕화]]의 연세대 색이 있었지만 중앙대 출신으로 기존의 [[강정수]]를 시작으로 [[한기범]]과 [[김유택]]에 이어 [[허재]]의 입단으로 예전 현대전자와 삼성전자를 뛰어넘는 역대급 팀으로 바뀌게 된다. 김진-김현준-오세웅 트리오의 삼성전자는 분전했지만 88~90년 농구대잔치까지 3회 연속 3위(3성전자;;), 91~92년 2연속 준우승에 머물며 기아 독주시대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33세의 노장이 되어 참가한 [[1993-94 농구대잔치]]에서는 비록 예선에선 연세대와 고려대라는 사학 최고 두 라이벌 대학세에 밀려 5위로 플레이오프에 오르긴 했지만, 예선 4위로 모교인 고려대[* 정규리그 맞대결에서 삼성전자는 고려대에 패했었다. 당시 고려대는 김병철-양희승-이지승-전희철-박재헌 등이 주축이었다.]와 만난 8강전에서 김대의, 김진, 김현준 등 30대 노장들이 투혼을 보여주며 2승 1패로 역전, 4강에 진출하는 저력을 보여주는데, 8강전 마지막 경기 동점 상황에서 결승 3점슛을 꽂은 선수가 바로 김진이었다. 당시 인터뷰에서 다른 부분보다 선배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뛰었음을 고백했다. 그러나, 삼성은 4강전에서 서장훈의 연세대에 패하여 탈락한다. [[1994-95 농구대잔치]]를 앞두고 삼성전자는 기존의 [[서동철]]과 [[강양택]]이 있지만 전대회에서 연세대를 우승으로 이끈 주역인 New 에이스 [[문경은]]과 중앙대 4강 신화의 주역 터보가드 [[김승기(농구)|김승기]]를 보강했고, 거기다 상무에서 제대한 센터 [[이창수]]까지 가세하면서 전대회 우승팀 연세대, 절치부심한 기아자동차와 함께 우승 후보로 꼽혔고, 김진과 [[김현준(농구)|김현준]]은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농구대잔치 우승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거란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농구대잔치를 한달 앞두고 열린 실업농구 코리안리그 2차대회 결승전 삼성전자:기아자동차 경기에서 [[한기범]]에게 폭력을 휘두른 김진[* 아래 "비판" 항목 참조.]은 3개월 출장정지를 받게되고 이후 징계가 경감되어 [[1994-95 농구대잔치]] 중반부터 뒤늦게 참여하게 된다. 삼성전자가 악전고투끝에 8강전에서 연세대를, 4강에서 SBS를 꺾고 결승에 오르면서 김진 또한 커리어 마지막을 우승으로 장식하게 되나 싶었지만, 결승전에서 기아 [[허재]]의 [[마이클 조던]]급 활약을 막지못하면서 1승 3패로 또다시 패배했고, 이후 김진은 김현준과 함께 은퇴식을 가지며 정들었던 코트를 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