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준엽 (문단 편집) === 말년 === 1987년 [[대한민국 헌법]]의 9차 개헌 때 처음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 는 문구를 헌법 전문에 포함시키는 공훈을 세웠다. [[제헌 헌법]] 이후로는 [[3.1 운동]]이나 [[4.19 혁명]] 정도가 언급되었을 뿐 임정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었던 것인데, 뒤늦게나마 대한민국이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을 다시 공인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중수교가 이루어진 이후에는 아직 [[상하이]]에 묻혀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요인들의 유해를 국내로 모셔오는데도 힘썼으며,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활약했던 중국 유적지도 복원하는 데 기여를 했다. 그 밖에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본인에게 정부 요직 제의를 하던 [[김영삼|YS]]에게 '''빨리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해서 민족 정기부터 바로 세우라고 요청을 하기도 했다.''' 학자로서의 자존심 또한 꿋꿋히 지킨 분으로서,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40여 년 동안 2번의 총리직을 포함한 총 12번의 입각 제의를 거절했다. [[정치교수|폴리페서]]가 넘쳐나는 요즘 시대에 참 드문 케이스다. 그 거절 이유로 "모든 사람들이 다 입각을 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하나 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려대학교 총장이 총리보다 높은 자리인데, 총장 하다가 어떻게 총리가 되나."'''라고 말하여 고대생들의 애교심, 자부심을 높였다. 특히 [[노태우 정부]]의 총리직 제의에는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을 맡게 되는 [[전두환]]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다. 국민들, 특히 젊은층이 실망할 것이다. 게다가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제자들이 많은데 스승이라는 자가 그 정부의 총리가 될 수 없다." 며 고사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는 본인의 회고록인 <장정>에 나오는 내용으로, 이 외에도 몇 가지 입각 거절 이유가 더 나와 있다.[* 노태우 당선 후 그와 2시간 동안 회동에 대한 기사.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10600209201012&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01-06&officeId=00020&pageNo=1&printNo=20387&publishType=00020|#]]][* 이후 YS, [[김대중|DJ]]에게도 정부 요직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거절했다. 특히 YS에게 제의를 받을 당시에는 본인이 몸담았던 [[고려대]]의 제자들인 [[김영춘(정치인)|김영춘]](YS의 비서)과 [[김현철(1959)|김현철]](YS의 아들)까지 찾아와서 옛 스승인 본인에게 읍소하는 바람에 많이 난감했었다고 한다.][* [[김영춘(정치인)|김영춘]]은 김준엽 총장 시절에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이기도 했다. 정부에서 김영춘을 제적하라고 압박을 가했으나 김준엽은 이에 응하지 않고 김영춘을 보호하는데 애써줬고, 이것 때문에 총장 사퇴 압박을 받았다. 이러한 인연 덕분에 김영춘과 김준엽은 서로 각별했던 사이라 매년 새해마다 김영춘은 [[명륜동(서울)|명륜동]]에 있는 김준엽의 저택에 방문해서 문안인사를 드렸다고 한다. 김준엽 또한 본인의 회고록 장정에서 김영춘은 본인이 굉장히 아꼈던 [[고려대]] 제자 중 한 명이었다고 서술했다. 훗날 김영춘은 2023년 8월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주관하는 김준엽 탄생100주년 기념사업의 자문위원장이 되어 김준엽 관련 기념사업을 이끌어나가게 되었다.] [[파일:external/image.bookoa.com:9998/19326315.jpg]] 총장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회고록 <장정>을 집필하고, 연구에 몰두하였다. <장정>은 일본 징집병 탈출 및 광복군 시절을 다룬 1/2권, 고려대 총장 시절을 다룬 3권, 총장 퇴임 이후(1980년대 후반까지)를 다룬 4권, 중간에 빠졌던 평교수 시절 및 1990년대 이후를 다룬 5권으로 나뉘어 있다. 위 사진에는 5권이 빠져 있다. 한국근현대사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읽어보자. 저자 스스로가 직접 겪은 경험기뿐만 아니라, 당시의 신문기사나 여러 자료들을 함께 수록했는데, 후배 사학도를 위해 연구와 교육용으로 쓰일 수 있도록 편집하셨다고 한다. 주례를 부탁받았을 때 자신도 늙었다는 것을 체감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2011년]] [[6월 7일]] 별세했다. [[http://jokjep.blog.me/110110698999|사망 몇주 전에 하도 몸이 안 좋아서 그냥 링거 맞으러 병원 갔더니 1~2주의 최말기 시한부 폐암]]이었다고... 그의 대부분의 사진들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 모습들이 많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살아생전에 [[골초]]이자 [[주당]]이었는데,[* 독립군 시절에는 술만 할 줄 알고 [[담배]]는 입에 대지 않았으나, [[고려대]] 총장 시절 정부의 외압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겪게 되면서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 근데 워낙 담배가 입에 잘 맞은 탓에(…) 정권의 외압에서 자유로워진 이후에도 하루에 일곱, 여덟 개비씩 피었으며 심지어 언론사와의 인터뷰할 때도 담배를 피면서 인터뷰를 했을 정도. 고려대 총장 시절에는 '''하루에 무려 세 갑씩이나 피었다고 한다.'''] 그것이 결국 화근이 되었던 것.[* 그래도 90살 가까이 살았으니 확실히 장수했다. 본인의 장수 비결로 규칙적인 수면 패턴과 매일 하루에 무조건 물을 마시는 습관을 꼽았다. 물은 독립군 시절 거의 마시지 못한 탓에 신장에 결석이 생겨 아예 신장 한 쪽을 제거하는 수술까지 받아 그 뒤로 빠지지 않고 계속 마셨다고.] 부음을 알리는 고대신문에 수록된 사진도 연초 한 개비를 들고 미소짓는 모습이었다. 생전에 이미 광복군 시절의 공로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은 데 이어, 타계 직후에는 [[대한민국 훈장|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장례 후 6월 1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안장되었다. || [[파일:2011070857082105.jpg|width=100%]] || [[파일:2011070829572517.jpg|width=100%]] || || 고대 안암병원 장례식장 빈소 || 국립대전현충원 하관식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