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준엽 (문단 편집) === 광복 이후 === || [[파일:CE26DAD1-0460-466E-8A69-F570A96DC922.jpg|width=100%]] || || [[중국]] 국립동방어문전문학교 한국어 강사 시절. 앞줄 왼쪽에서 3번째가 아내 민영주, 4번째가 김준엽이다. || 해방 후에는 임정 요인들과 바로 귀국하지 않고 중국 [[난징]]의 국립동방어문전문학교[* [[국공내전]] 이후 [[베이징대학]]으로 통합된다.]에서 한국어 강사로 근무하면서 중앙대학[* [[국공내전]] 이후 [[난징대학]]과 동남대학의 일부로 쪼개지며 [[대만]]의 국립중앙대학또한 이 학교의 후신을 자처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前 주석 [[장쩌민]]이 이 학교에 재학했다가 도중에 상하이교통대학으로 편입했다.] 대학원에서도 중국사 공부를 하다가, [[국공내전]]이 발발하면서 1949년 귀국하여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귀국하는 과정에서 본인이 동방어전에서 가르친 중국인 제자 3명을 데리고 와 [[서울대학교]]에 유학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중국인 제자들은 안타깝게도 훗날 [[문혁]]으로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래도 이 중국인 제자중 한명인 양통방(楊通方)은 [[문화대혁명]] 이후 학계로 다시 복귀하는데 성공하고, [[베이징대학]] 외국어학원 조선어과 교수를 역임하면서 중국 내에서 한국학 연구의 선구자가 되기도 했다.] 1951년 잠시 [[국립타이완대학]]에 유학했다가[* 당시 [[국립대만대학]]에서 [[신문화운동]]의 주역이었던 [[후스]]의 강의를 수강했다고 한다.] 1955년 완전히 귀국한다. 이후 후학 양성에 힘써 1957년 교내에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세웠다. 이듬해 아세아문제연구소 내에 공산권 연구실을 설치했는데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 전문적 연구기관으로 그는 공산주의 연구의 선구자가 되었다. 공산주의를 연구한 이유는 '통일을 위하여'. 북한과 중국의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알아야 통일을 이룰 수 있지 않겠냐는 이유였다. 그의 노력으로 아세아문제연구소는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공산권 연구기관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다만 정작 김준엽 본인은 [[중국]] [[쉬저우]]에서 일본군으로부터 탈영한 이후 중국 국민당군 유격대의 일원으로 잠시 활동하던 시절 공산당 [[신사군]]의 팀킬로 목숨을 잃을뻔 한적이 있어 공산주의에 대해 호의적이진 않았다. 같이 팀킬을 겪었던 친구 [[장준하]]는 아예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버린 것은 덤. 사실 김준엽도 냉전 시기에는 [[한국반공연맹]] 기관지에 반공을 호소하는 글을 개재하는가하면 [[타이페이]]에서 개최된 아주반공대회의 한국대표단 자격으로 참석하는등 그냥 전형적인 남한의 반공주의 지식인이었다. 애초부터 출신이 고향인 이북에서 모든걸 잃고 간신히 월남해서 정착한 실향민이라 반공주의 성향을 띄는건 당연할지도. 그래도 다른 반공주의자들과 달리 [[공산주의]]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이는가 하면,[* 이것 때문에 중정에도 몇 번 불려가 곤욕을 치렀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독립운동에 기여를 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해방 이후 [[북한]] 정권에 협조한 이들이 아니라면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이들의 공에 대해 높게 치하해줘다고 주장하였고, [[김일성]]에 대해서는 그냥 독재자에 불과할 뿐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92년 한중수교에도 굉장히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에 대해 굉장히 높게 평가하는 등 탈냉전과 민주화를 맞이한 후에는 공산권 국가들과의 교류도 매우 중시하는 성향을 띄기도 했다. 다만 [[1972년]] [[닉슨]]이 [[중국]]을 방문할 땐 오히려 중공이 강대국으로 나아갈 속셈과 음모를 숨기고 [[미국]]과 만남을 가진다는 식으로 혹평을 가하기도 했다.][* 당시 아세아문제연구소에 [[김창순]] [[북한연구소]] 이사장이 재직하는 등 반공 성향을 띄었다.] 또한 [[중국]]에 대해서도 생전에 깊이 연구하였고 중국에서도 인정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중국통[* 92년 수교 이후 최초로 중국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수훈하기도 하였다.][* 본인 스스로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등등 중국의 굵직한 현대사를 경험해 본 증인이기도 했고, 처가 역시 [[장제스]]의 [[국민 정부]]과 인연이 있었다. 더 거슬러올라가면 장인 [[민필호]]의 장인 [[신규식]]은 [[쑨원]]의 [[신해혁명]]에도 가담하기도 했다.]으로 꼽힐 정도였다. 고려대학교에 중어중문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신설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중어중문학과는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1946)이다.] 중국에서도 한중 관계에 대한 김준엽의 공로를 인정해 중국어언문화우의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가 훈장을 준 최초의 사례였다. 대외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1961년, 1962년, 1974년 세 차례 [[유엔|유엔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고, [[5.16]] 이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다만 이 당시 김준엽이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고문자격으로 참여했을 땐 아직 [[박정희]]를 비롯한 군부가 민정이양을 약속하겠다고 발표했었을 때였고, 김준엽의 회고록 <장정>에 따르면 이 당시 외교사찰단의 자격으로 여러 나라를 방문했을 때 수 많은 나라의 정부들로부터 하루 빨리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민정 이양을 했으면 좋겠다는 답변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독재|결과는...]]]의 고문 자격으로 외교사절단의 일원으로 [[인도]]를 방문하여 [[자와할랄 네루]]를 만나기도 했다. [[1955년]] [[대만]]에서 귀국한 이후에는 광복군 시절의 동지 [[장준하]]가 창간한 [[사상계]]의 주간을 맡기도 했다. 정계 진출 요청이나 장관 제의를 여러번 받았으나, 학자로서 후학 양성에 집중하겠다며 모두 고사한 바 있다. 박정희 정부 시절, [[민주공화당]] 사무총장,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장관직을 제의받았으나 모두 사양했다. >'''이제 독립되어 건국사업이 전개되는 마당에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문화]]•[[사회]]•[[군사]]에 걸친 제반 건설사업이기 때문에 국민 각자가 자기의 적성에 맞는 일에 투신하여 최선을 다해야만 될 것이다.''' >---- >『[[장정]] 2권』 1972년 11월, 대한적십자사 자문위원으로 평양을 방문하였다. 이때 북한에서 만난 [[김중린]] 당비서가 낯이 익어서 고향을 묻다가 신의주고보 1년 후배임을 알게 되어 회후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