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준엽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 === 1923년 [[평안북도]] [[강계군]] 시중면 외시천동 254번지(현 자강도 시중군 시중읍)에서 직조공장을 경영한 대[[지주]] 김종걸(金宗傑)과 모친 홍종식 사이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형제 많은 집의 막내아들이다 보니 부모님과 윗형제들로부터 많은 사랑과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선대는 조선 [[성종(조선)|성종]] 때 이래로 [[평안북도]] [[벽동군]]에 세거하였는데, 조부 김봉구(金鳳九) 대에 이르러 강계군으로 이주하여 살아왔다. 독립운동가였던 둘째 형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항일의식을 길렀다. 강계에서 소학교를 마친 뒤 1935년 [[신의주시|신의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압록강]] 건너 [[단둥 시|안동]]을 자주 왔다갔다 했다. 김준엽이 중국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됐다. || [[파일:4185C87B-F0DF-4E45-9FF6-24CFDCE6379D.jpg]] || ||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 유학시절[* [[파일:DBA4413F-2170-45BB-9747-0A671122354C.png]][br] 착용하고 있는 [[학생모]]에 [[게이오기주쿠대학]]의 상징인 펜마크가 붙어있다.] || 1944년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 본인의 회고록 <장정>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지만, 친구 최기일의 회고록에 따르면 사실 현역 입시 때 입학 성적이 좋지 못해서 최기일과 같이 [[도쿄]] [[타카다노바바역]] 근처에 있던 예비교(한국의 [[재수학원]]과 유사)에 들어가 재수해서 합격한 거라고 한다. 그리고 이 때 [[게이오기주쿠대학]]말고 [[제국대학]]의 입학코스 중 하나였던 [[구제고등학교]]인 [[구마모토현]]의 제5고등학교에도 응시를 했으나 제5고등학교는 떨어지고 [[게이오기주쿠대학]]만 붙었다고 한다. ][* 주변의 증언에 의하면 선생은 차분하게 공부 잘하는 소위 모범생이었으나 그가 10대 시절 다녔던 신의주고등보통학교의 상황이 워낙 좋지 않았다. 1930년대 후반이었던 당시 일제가 내선일체를 표방하며 학생들한테 국어(일어)사용과 천황 숭배를 강요했고, 이를 반대하는 신의주고보 학생들의 동맹휴학이 빈번했다. 일어 사용에 반발하고 천황숭배에 항의하는 학생들을 보다 못한 신의주고보 교사들이 행한 처벌성 조치는 수업을 휴강하는 것이었다. 대입을 앞둔 고등학생에게는 당장 한 교시라도 수업을 거르는 것이 적지않은 영향이 가는 것을 볼 때 빈번했던 동맹휴학과 수업 휴강이 입시에 악영향을 주었을 것은 당연하다. 친구 최기일도 신의주고보에서의 교육환경은 여러모로 대입을 준비하기에 좋지 않았던 환경이었기 때문에 [[도쿄]]에 있는 예비교에서 교육을 받고 나서야 성적이 쑥쑥 올라갈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유명 대학들은 입학정원 중 조선인에게 할당되는 인원수가 4~5명에 불과해서 조선인들은 대입을 준비하기에 더욱 불리한 환경이었다.] [[인문대학|문학부]] [[대학예과|예과]][* 자서전 <장정>과 소개약력에는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동양사학과를 전공했다고 나와있지만, 김준엽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서 [[고려대학교]] 측이 공개한 [[게이오기주쿠대학]] 학생증에 따르면 1943년 4월 1일 [[인문대학|문학부]] [[대학예과|예과]] ~~3학년~~1학년[* [[고려대학교]]박물관에 기증된 학생증에는 3학년이라고 기재되어있지만 [[게이오기주쿠대학]] 학적부에는 1943년 당시 갓 입학한 예과 1학년생이라고 기재되어있다.] A반에 재학중이었다고 기재되어있다.[[https://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551487|#]] 이 당시 [[일본]]의 대학에서는 세부적인 전공학과는 예과 수료이후 학부로 진학하고나서야 정하고 [[대학예과]]나 [[구제고등학교|구제고]] 시절에는 [[문과]]/[[이과]] 전공 여부만 결정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인문대학|문학부]] 동양사학과 소속이 아닌 [[인문대학|문학부]] [[대학예과|예과]] 소속이라고 보는게 맞다. 참고로 [[게이오기주쿠대학]]의 경우 [[구제고등학교|구제고]]나 다른 사립대 예과와 달리 예과시절부터 전공학부([[인문대학|문학부]], [[경제학부]], [[법학부]], [[의학부]])는 결정하지만 전공학과는 학부로 진학하고나서 결정되는 시스템으로 굴러갔다.][* 김준엽 본인의 주장대로 만약 학병 징병 당시에 동양사학과에 재학중이었다면 이전 연도이자 김준엽이 신의주고보를 졸업한 이후인 [[1940년]], [[1941년]]과 [[1942년]]에 작성된 [[게이오기주쿠대학]]총람의 재학생명단에 "國原常廣"[* [[학병]]으로 징집될 당시 [[일본군]]에 의해 작성된 육군전시명부에 기재된 [[창씨개명]]이다. 학생증에도 똑같은 이름이 기재되어있다.]라는 이름이 기재되어 있어야하는데 학부, 예과, 고등부명단 그 어디에도 기재되어있지 않은데다가 무엇보다 실제 [[게이오기주쿠대학]] 학적부에도 [[1943년]] 4월에 문학부 예과에 입학해서 1학년이었다고 기록되어있는 상태다.[* [[1943년]]쯤되면 김준엽과 나이가 비슷한 동년배들은 진작에 [[대학예과|예과과정]]을 수료하고 학부에 재학 중인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전시체제였기때문에 3년간의 예과과정도 2년 6개월로 단축되어서 남들보다 더 빨리 수료하고 곧장 정식 [[대학]] [[학부]]로 진학했는데 1학년 과정 역시 6개월만에 다 끝내고 그 다음해 4월에 곧장 2학년으로 진급했다.[* 사실 이렇게 학제가 단축된 이유는 [[1942년]]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일본이 전쟁에서 연전연패를 당하자 징병제였던 일본에서 유일하게 '''징병 유예'''의 특혜를 받던 대학생들을 빨리 졸업시킨 후 군대에 입대시켜 갈려나간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다만, 김준엽같은 식민지 조선출신의 대학생은 여기서는 아직 논외대상이었다.] 실제로 김준엽과 [[1935년]] 신의주고보에 같이 입학한 [[신상초]]가 딱 이 케이스였는데, [[신상초]]는 [[1940년]]에 김준엽과 같이 신의주고보를 졸업하자마자 [[구제고등학교|후쿠오카고등학교]]에 진학하고 2년 6개월 뒤인 [[1942년]] 9월에 후쿠오카고를 졸업하고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진학했다. 김준엽 본인도 자서전 <장정>에 [[1940년]] 신의주고보를 졸업하자마자 [[1943년]] 학병으로 징집되기 전까지 [[도쿄]]에 거주했다고 서술했다.][* 사실 이당시 식민지 조선은 당연하고 일본에서도 대학 진학률은 3%밖에 안되었던데다가 식민지 출신 학생의 입학 티오는 해마다 약 4~5명밖에 못되었기때문에 지금보다 대학에 들어가기 훨씬 힘들었었다. '''특히 김준엽의 모교이자 최고명문사립대인 [[게이오기주쿠대학]]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김준엽처럼 중학교를 졸업한지 한참 되서야 늦깎이 대학생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었다.] '''다만 한가지 특이한 점은 입학년도인 [[1943년]] 4월을 기점으로 이미 예과 3학년이라고 학생증에 기재되어있다는 것.'''[* 다만 실제로 그 당시 3학년이었다면 소지한 학생증의 유효기간이 [[1943년]] [[4월]]부터 [[1943년]] [[9월]]까지로만 찍혀있어야하는데([[카미카제]]로 희생당한 우에하라 료지(上原良司)의 학생증에는 실제로 이렇게 찍혀져있다) 김준엽의 학생증의 경우 [[1943년]] [[4월]]부터 [[1944년]] [[3월]]까지라고 찍혀있다. [[1943년]] [[9월]]까지만 찍혀있어야하는 이유는 이 당시 [[태평양전쟁]]으로 인한 전시체제때문에 대학 학제가 기존의 3년제에서 2년 6개월제로 단축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즉, 사실은 학적부의 기록대로 원래는 1학년이 맞는데 인위적으로 학생증에 손을 대어 한 일(一) 자에다가 짝대기 2개를 더 그어 석 삼(三) 자로 만들어 마치 3학년인 것처럼 꾸며적은 것. ~~이왕 더 꾸며적을거면 유효기간에도 손을 댔어야했는데~~] 참고로 에서는 김준엽이 일본 유학시절 촬영한 사진앨범이 잠깐 공개되었는데 앨범에 부착되어있는 게이오대학 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에 ‘1943.4’라고 적혀있는게 보인다. 그 밖에도 사진앨범에는 김준엽 본인이 재학중이었던 [[게이오기주쿠대학]] 히요시(日吉)캠퍼스 건물 사진도 [[https://www.youtube.com/watch?v=lD3NgWhDKt0|부착되어있는게 보이는데]] 이 당시 [[게이오기주쿠대학]]은 [[도쿄]] [[미나토구(도쿄)|미나토구]](당시에는 시바구(芝區)였다)의 미타(三田)캠퍼스를 본과와 고등부[* [[전문부]]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이다. 원래 명칭도 [[전문부]]였으나 도중에 고등부(高等部)로 바뀐 것이다.]캠퍼스, [[요코하마]]의 히요시(日吉)캠퍼스(現 게이오기주쿠고등학교 건물)를 [[대학예과|예과]]캠퍼스로 활용하고 있었다.] 재학도중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었다.[* 이후 게이오기주쿠대학으로 복학하지 않았기 때문에 졸업을 하지못했다.] [[일본군]]으로 중국 [[장쑤성]] [[서주(중국)|쉬저우시]]에 배치된 뒤[* [[일본군]] 육군전시명부에 따르면 김준엽은 [[쉬저우]]에 배치된 중지나파견군 제13군 제65사단 독립보병 제58대대에 소속되어있던 [[보병]] 초년병이라고 기록되어있다.] 단독으로 탈영, 같은 조선인 출신 학병 [[장준하]]와 합류하여 '''수천 리를 걸어(장정, 長征)''' [[충칭]]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이때가 일제가 패망하기 몇 달 전. 이후 [[이범석]] 장군의 부관이 되는 등 광복군에서 활약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또한 장준하 등과 더불어 미국 첩보국([[OSS]]: CIA의 전신)의 특수훈련을 받으며 [[임정근]] 등과 함께 강원도반에 편성되어 강원도반 반장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광복군 장준하.jpg|width=100%]]}}} || || 광복군 시절의 모습[* 왼쪽부터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 || 일부에선 실질적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한 게 거의 없다고 폄하 하지만,[* 당시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독자적인 기반 없이 [[장개석]]의 [[중국 국민당]] 정부에 얹혀 살면서 1930년대 중반 이후 실질적 활동이 없었다는 점은 애석한 사실이다. 이 점은 일본군과 싸우겠다면서 화북으로 떠난 [[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대]])의 활동과도 비교되는 대목이다. 당시 중국 공산당과 손잡고 활동하던 조선의용대조차 해방 이후에는 남북 모두에서 외면당했지만...][* [[충칭]]의 광복군에 최종적으로 합류하기 전에 잠시 [[쉬저우]]에서 중국 국민당군 유격대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국민당군들한테 중국어를 배워가면서 이들의 [[일본어]] 통역도 전담해줬고 나중에 [[충칭]]으로 향하면서 수천 리를 걸어갈 때도 국민당군들에게 길안내를 받으면서 도움을 받았다.]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등 항일독립운동단체에 합류하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거는 일이다. 일본군에 걸리면 무조건 처형이고, 국민당이든 공산당이든 중국군에 잡혀도 일본 간첩으로 오인되면 죽은 목숨이다. 뭐 다행히 한복을 입으신 어머니와 찍은 사진 덕에 오해 없이 잘 끝났지만.[* 1900년대부터 먹고 살기 위해, 독립운동을 위해 많은 한민족이 중국과 만주지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국민당/공산당/일본군/군벌 등 여러 세력이 다투는 혼란 속에서 한민족이 억울하게 희생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탈영 도중 국민당군에게 포획될 당시 이들은 [[왕징웨이 정권]]의 군대으로 위장한 채로 나타난 바람에 김준엽 본인은 왕정위군에게 사로잡힌 줄 알고 '''모든게 다 망했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이들은 [[국민혁명군|국민당군]]이었고 심문을 마친 뒤 김준엽에게 직접 붓으로 '''환영한국혁명지사'''라고 써 주고 본인들의 정체를 밝힌 후에야 김준엽은 그제서야 탈출에 성공했다고 확신하고 안심하게 된다. 그야말로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왔다갔다한 셈. ~~거의 만우절급 깜놀쇼~~][* 그리고 김준엽의 경우 운이 굉장히 좋게도 포로취급을 당하다시피 한 다른 탈출병들과 다르게 국민당 유격대 대원들로부터 엄청난 우대를 받아서 사실상 탈출에 성공하고나서 팔자가 피기도 했다. 김준엽의 회고에 의하면 본인을 포획한 유격대의 경우 [[베이징대학]]출신 대학생이 있는가 하면 [[황포군관학교|중앙군관학교]]에서 정규군사교육을 받고 [[국민혁명군]] 정예부대의 일원으로서 쉬저우전투와 타이얼좡전투에도 참전했던 경험을 가진 군인들도 여럿 되었던 이 당시 [[중화민국|중국]] 기준으로 엄청난 고급 교육을 받은 인텔리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똑같이 대학물 먹은 인텔리였던 김준엽에게 동질감을 느끼면서 굉장히 호의적으로 대해줬으며, 심지어 [[일본군]]으로부터 중국군 포로와 김준엽을 교환하자고 제의가 왔을때도 이를 거절해 김준엽을 계속 보호해주기까지도 했다. 당연히 일본이 포로 교환을 제안한 이유는 '''김준엽을 잡아가기 위함이었으니,''' 만약 이때 중국군이 거래에 응했다면 '''지금의 민족 스승, 고대 최고의 총장 김준엽은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었다.'''] 이 사람은 탈출하기 위해 징집 전 나침반을 마련하여 갈 정도로 광복군에 합류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던 인물이다. 그가 탈출한 츠카다 부대는 조선인 탈영병이 나오지 않은 아주 혹독한 부대였는데, 김준엽은 그 부대에서 최초로 탈출에 성공한 조선인 병사였다.[* 당시 김준엽이 탈영할 때만 하더라도 소속 부대가 [[대륙타통작전]] 준비에 한참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다소 경계가 소홀했던 편이었다. 사실 이 소홀한 경계덕분에 김준엽이 성공적으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고. 여기에 김준엽이 한참 탈출하고나서 [[장준하]]가 속해있던 제65사단 치중병부대에서 조선인 학병들이 연달아서 탈출을 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 때부터 부대 분위기가 매우 가혹해진 것이다. 심지어 [[일본군]]측에서는 조선인 학병들에게 '''"탈출한 조선인 김준엽은 [[팔로군]]에게 붙잡혀 죽창에 찔려 죽었다."'''라는 거짓선전까지 하며 탈출 시도를 저지하려 애썼다.] 김준엽은 훗날 그의 회고록 "장정"에서 일본군 시절 작은 실수로 인해 상관으로부터 뺨을 맞은 후 상당한 모욕감을 느꼈다고 기술했다. 김준엽은 이 때가 태어나서 뺨을 처음으로 맞은 것이었다고 언급했다. 아마 일본군의 강제징용된 한국인 병사에 대한 차별적 대우와 가혹행위의 경험이 김준엽으로 하여금 츠카다 부대를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하는 또 다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회고록 <장정>에 따르면 츠카다 부대는 [[사격 훈련]]을 한 답시고 '''근처를 지나가는 [[중국인]] [[민간인]]들에게 총을 난사하기 일쑤였고''', 검술 훈련을 할 땐 '''중국군 포로들을 데려다가 직접 찔러서 죽이는 훈련을 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김준엽은 이러한 일본군의 행태에 치를 떨었다.] 광복군 시절 [[이범석]]의 부관으로 있으면서 이범석의 비서였던 [[민영주]] 여사와 만나 결혼한다. 두 사람의 결혼식 주례는 이범석이 맡았다. 민영주의 집안은 독립운동가 명문인데, 아버지 [[민필호]]는 임시정부에서 [[김구]]의 판공실장(비서실장)을 지냈고, 외할아버지는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신규식]]이다. 또한 민영주의 오빠 [[민영수(1921)|민영수]]도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김준엽과 민영수도 독립군으로써 한솥밥을 먹은 적이 있으며, 또한 민영수의 여동생 민영주가 김준엽과 결혼하면서 김준엽과 민영수는 손위처남과 [[매부#s-1|매부]] 지간이 되었다.]. 김준엽은 이런 처가의 이력을 긍지로 여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