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준(고려) (문단 편집) == 평가 == [[무신정권]]의 실질적인 지배 세력이었던 60여 년 [[최씨 정권]]이 허무하게 붕괴된 후 의외로 10년씩이나 장기 집권을 해냈다. 무신들의 집권 기간만 따지자면 1위 [[최우]] 30년, 2위 [[최충헌]] 23년, 3위 [[이의민]] 13년에 이어 4위에 해당되는 긴 기간이다. 하지만 김준의 권력은 선대 무신 집권자들에 비해 약화되어 있었는데 이유는 그의 정권이 [[최의]] 살해 [[쿠데타]]('''무오정변''')에 동조한 소수의 [[공신]][* [[류경]](柳璥), 박송비(朴松庇), 송길유(宋吉儒), [[임연]](林衍) 등.] 세력에 의해 지탱되었기 때문이었고, 형식적으로나마 왕정 복고와 [[개성시|개경]] 환도를 기치로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최의를 제거한 후 바로 권력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쿠데타에 동참한 김준 일가의 [[사병|가병(家兵)]] 지휘관들, 신의군 출신 무관들, 야별초 지유(夜別抄指諭) 출신 무관들, 응양군 상장군 박성재(朴成梓)의 양해를 얻은 후에야 간신히 무신 집권자가 될 수 있었다. 이처럼 [[쿠데타/사례#s-2.1.2|무오정변]]의 실질적인 주동자가 김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신 출신인 류경(柳璥)은 군권을 포함한 모든 권한을 8개월간 틀어쥐었다.[* 하지만 그는 문신이기 때문에 무신 집권자에 포함시키지는 않고, 대체로 김준 집권기의 권력자로 포함된다.] 이후 [[여몽전쟁/무신정권 비판|류경 정권이 대몽 강화와 대몽 전쟁 지휘에 모두 실패]]한데다가 류경이 [[정방]]을 장악하여 인사권을 독점하면서 권력을 휘두르고 여러 방법으로 재산을 크게 모아 거부(巨富)로서 처신하자 그제서야 김준, 김승준(金承俊), 임연(林衍) 등 김준 세력들이 류경을 [[탄핵]]하였고, 이들의 탄핵안을 심사숙고하던 [[고종(고려)|고종]]이 최종적으로 수용한 결과 류경 정권이 1258년 11월 실각하고 비로소 김준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김준 정권은 앞선 최씨 세습정권과는 달리 무오정변을 통해 60여 년의 최씨 정권을 붕괴시킨 공신들의 [[집단지도체제]]의 성향이 짙었고, 김준은 집단지도체제의 대표에 가까운 형태였을 것이었다고 추론해볼 수 있다.[* 김준이 권력을 차지한 이후에는 선대 무신 집권자들이 그렇게 반대했던 왕의 입조 또한 함부로 막지 못했는데 김준이 대몽 항전 노선을 걸으면서도 [[원종(고려)|원종]]의 입조를 막지 못했다는 것은 그의 권력이 얼마나 축소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권력 강화를 목표로 동생 김충(金冲)을 비롯해 자신의 친인척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는데 당연히 그에 따른 [[부정부패]]가 줄을 이을 수 밖에 없었으며, 이는 김준 정권을 지탱하고 있었던 소수의 공신들과 격렬한 충돌을 야기하여 무신정권이 [[공중분해]]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혼란상 속에 김준의 양자를 자처하고 있던 임연이 김준의 아들과 재물을 놓고 문제가 생겼는데 김준이 아들의 입장만을 옹호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임연은 마침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원종이 왕명이라며 김준을 처단하라는 구원의 손길을 내밀자 지체없이 양아버지 김준을 배신하고 처참하게 목숨을 빼앗아버렸다. 이 때 동생 김충도 살해되었고 김준의 아들 김주(金柱)가 저항했으나 [[삼별초]]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임연]]과 [[임유무]] 부자의 집권 기간을 합쳐봐야 채 3년(1268~1270)이 안 된다는걸 감안하자면 실질적인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라는 점과 무신정권의 붕괴라는 시각에서 김준 정권의 역사적 의의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