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종희 (문단 편집) == 일생 == [[충청남도]] 천안군 천안면 부대리에서 김재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천안 [[북일고등학교|북일학교]],[* 1908년 성공회 부대동성당 교우들이 성당을 건축하고 당시 [[조선교구장|교구장]]이었던 [[아서 터너]] 주교가 성당을 축성한 직후 곧바로 세운 곳으로, 1946년부터 공립학교인 천안부대초등학교로 바뀌었다. 김종희 회장은 천안북일학교의 이름을 이어 천안북일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직산공립보통학교[* 現 직산초등학교.]를 거쳐 1937년에 [[경기상업고등학교|경기공립상업학교]]에 진학하였다. 경기공립상업학교 재학 중 일본인 학생이 한국인 학생을 구타하자 김종희가 나서서 그 일본인 학생을 구타했고, 김종희는 이 일로 인해 경기공립상업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뒤 원산상업학교로 전학하여 1941년 12월에 졸업하였다. 원래는 일본에 유학하려고 했으나 [[태평양 전쟁]]이 터진데다, 당숙이 유학을 말렸고, 오히려 알려준 사람을 만나라는 제안을 받고 그 사람을 찾아갔다. 그리하여 1942년에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에 입사하게 된다. 그 당시 조선인 근로자 수가 얼마 되지 않았고, 상대적으로 많은 일본인 근로자들이 텃세를 부렸지만 그 중 유일하게 그를 챙겨준 사람이 조선유지 인천화약 공장장을 역임한 마쓰무로 취체역[* 이사의 일본식 명칭]이었다. 그 덕에 그는 조선화약공판에 정을 붙이게 되었고, 화약에 대해 관심이 깊어져 갔다. [[8.15 광복]]으로 일본인 근로자들이 조선화약공판에서 모두 철수하자, 그는 조선화약공판 지배인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조선화약공판에는 직원들이 많이 줄어든데다, 급여까지 밀려서 어려움에 처했는데, 그는 아버지에게 햅쌀 열 가마니를 받아서 밀린 급여를 해결했다고 한다.[* 훗날 [[이리역 폭발 사고]]가 발생했을 때에도 그는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사재를 털어서 복구 비용으로 썼다.] 그리고 창고에 쌓인 화약을 미8군을 드나들며 거래하여 미군으로부터 업무 능력과 진정성을 인정받게 된다. [[6.25 전쟁]]이 터지자, 그는 화약을 지키기 위해 피난을 가지 않았다. 그래서 북한군이 그의 집에 들어왔는데, 그 화약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자세하게는 북한군이 화약이 쓸모있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화약을 보관하라고 명령했고, 이후 [[9.28 수복]] 때 북한군이 물러가는 바람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리고 [[1.4 후퇴]]로 다시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할 때에는 모든 화약을 영등포로 보낸 뒤 파난길에 오를 수 있었다. 1952년 10월 28일에는 부산에서 한국화약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1952년 적산기업 이었던 조선화약공판을 인수하여 운영권을 획득했으며 1956년 4월에는 인천 화약공장을 복구하여[* 인천 [[남동구]] [[고잔동(남동구)|고잔동]]에 있는 한화기념관이 옛 화약공장의 흔적이다. 옛 공장 터는 [[한화건설]]이 [[꿈에그린]] [[에코메트로]]를 지었다. 남동구의 대형 택지개발지구 중 하나인 이곳이 '[[에코메트로|한화지구]]'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시아에선 일본에 이은 두번째이자 우리나라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자체 생산하였다. 이때 그에게 붙은 별명이 바로 '한국의 [[알프레드 노벨|노벨]]'이다. 196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에 선출되었다. 또한 주한 그리스 명예 총영사로 위촉되었다. 이 때의 인연으로 현재도 서울 청계천 한화그룹 사옥에 주한 그리스 대사관이 있고, [[김동선]]이 한때 주한 그리스 대사의 양자로 입적되기도 했다. 비슷한 예로 주한 말라가시 명예총영사로 위촉된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와 주한 케냐 명예총영사로 위촉된 전락원 [[파라다이스그룹]] 창업주가 있다. 1968년 제일화재를 삼호그룹으로부터 인수하고 [[경인에너지]]를 설립한 후, 1973년 [[한화호텔앤드리조트|태평개발]]도 세워 관광업에 손도 댔다. 1975년 학교법인 천안북일학원을 설립하고, 이듬해인 1976년 3월 6일 천안북일고등학교를 개교하였다. 그 해에 서울프라자호텔을 개업하였다. 그 외에 1972년.1978년 제1,2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197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을 각각 지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한화 김종희 후보.jpg|width=100%]]}}} || || '''제2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br](서울 종로구 2선거구) 선거벽보''' || 1977년에 [[이리역 폭발사고]]가 일어나자 빠른 대국민 사과 이후 당시 약 90억 원(현재 물가가치상 약 5,000억원) 가량을 내놓고, 모든 직원들을 총동원하여 재해복구에 동원하였다. 당시 그룹계열사 전 직원을 모두 현지에 출장보내서 헌혈하게 하였고, 동시에 보너스 전액과 11월 월급의 2%씩을 각출해서 재해 기금으로 썼다. 말년에 당뇨와 악성 신부전증, 신경통 등으로 고생하다가 1981년 7월 23일 오후 9시, 서울 종로구 가회동 자택에서 59세로 사망하였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급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유언장이 없었고, 후계 체제에 대한 준비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장남 [[김승연]]과 차남 [[김호연(기업인)|김호연]]간에 다툼이 벌어진다. 당시 차남 김호연이 공군장교로 군복무 중이었던지라 일단 장남 김승연이 고작 29세의 나이로 그룹을 독차지한다. 김호연이 제대후에 자신의 지분을 주장하자, 김승연은 이 요구를 묵살했고 결국 [[형제의 난]]이 터져서 10여년에 걸친 지리한 법적 소송이 오고가게 된다. 양자 사이에 분쟁은 1996년에야 끝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