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종인 (문단 편집) == 생애 == 1940년 7월 11일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림리(현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에서 태어났다. 김종인의 조부는 가인 [[김병로]]로서, 가인은 면암 [[최익현]]의 부대원으로 을사의병에 참여했으며,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법조계 거물이다.[* 위의 각주에 이미 설명되어 있듯이, 일제강점기 때 긍인 [[허헌]], 애산 [[이인]]과 함께 독립 운동가들의 변호를 도맡아 하던 민족 [[변호사]]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또한 김종인의 아버지는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김재열(1913)|김재열]]인데, 그는 김종인의 소년기에 요절하였다. 큰어머니 고귀현을 통해 [[동아일보 가문]]과 연결된다. [[광주제일고등학교|광주서중학교]] 재학 중 이사로 상경하여 [[중앙중학교(서울)|중앙중학교]]와 [[중앙고등학교]](49회, 1959년 졸업)을 거쳐 [[한국외국어대학]] [[한국외국어대학교/학부/서양어대학|외국어학부]] [[독어독문학과|독어과]]에 입학해 1963년 졸업했다.[* 중간에 군 복무를 마쳤다.] 그해 [[제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 통합[* 그 결과 [[민정당]], [[민우당]], [[신정당]]이 통합하여 [[국민의당(1963년)]]이 탄생한다.]을 주도하던 조부 김병로의 [[비서]] 역할로 정계와 연을 맺는다. 1964년에 조부 김병로가 사망하고 나서 독일로 건너가 뮌스터대학교에서 유학했다. 1969년 뮌스터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1972년에는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부전공분야는 [[재정학]](공공경제학)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국과 달리 사회민주주의가 발달한 독일에서 공부한 덕에 독일식 [[경제민주화]]에 대해 긍정적인 편이다.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김종인 젊은시절.jpg|width=100%]]}}} || ||<#003764> {{{#fff '''젊은 시절의 김종인'''}}} || 1973년 3월에 귀국, 불과 32세로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조교수가 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서강대 학부생 시절에 김종인의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서강학파]]로 분류되나 선성장 후분배, 재벌 육성을 중심으로 한 압축 성장을 주장해온 [[남덕우]] 등의 서강학파 선배들과는 입장을 달리하는 2세대로 구분된다.([[https://archive.ph/n9igi|관련기사]]) [[10월 유신|유신]] 때부터 박정희 정부에서 정책자문역할로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참여해, [[김재익]]과 함께 [[독일|서독]]의 [[부가가치세]]를 배우러 출장을 다녀와 연구보고서를 올렸다. 이미 35세 노총각이던 김종인은 십수번 선을 봤으나 인연을 만나지 못하고, 이듬해에 [[김재익]]의 중매로 김미경(金美經) 교수와 결혼했다. 서로 말이 잘 통했다고 한다. 김미경은 김정호 전 [[한일은행]]장의 딸로 2018년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식품영양학과]] 명예교수이고, 처삼촌이 [[박정희 정부]]에서 재무부장관과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이다. 본인의 4촌 처남으로 [[노태우 정부]] 시절 건설부 장관과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이진설]]이 있고, 대법관과 헌법재판소장을 지낸 [[윤영철]]이 있으며, 신민당 국회의원을 지낸 [[이택돈]]이 있다.[[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57948.html|관련기사]] 1977년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이었던 [[신현확]]의 반대를 무릅쓰고 처음으로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는 데 기여했다. 김종인은 자신이 했다고 자신하고 있고, 직접 당사자인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 역시 [[https://www.huffingtonpost.kr/2016/03/26/story_n_9549154.html|김종인이 제안한 게 맞다고 확인]]해 주었다. 김종인은 훗날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 등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역대 대통령 가운데 스스로 경제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유일한 대통령"이라고 평가했으며, 2016년 1월 더불어민주당 대표로 전직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는 자리에서 “이러고저러고 말이 많지만 그분이 오늘날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이끈 공로만큼은 누구도 부인을 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http://www.segye.com/content/html/2016/01/28/20160128004266.html?OutUrl=naver|관련기사]] 김종인은 물론 그가 주장한 [[경제민주화]]는 시장경제를 주장하는 보수주의 경제이론이다. 1980년 [[국보위]]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전두환]],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창당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후일, 이 점 때문에 전두환 정권의 부역자 취급을 받고 진보진영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재미있는 점은 보수인사들 역시 국보위 인사를 용인한다면서 김종인과 더불어민주당을 싸잡아 비난하고 내로남불을 운운했다는 것] 그 후 1981년부터 1988년까지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1대, 제12대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낸다. 1987년 제6공화국 개헌 당시 [[경제민주화]] 조항을 직접 작성해 관철시켰다. [[노태우 정부]] 때 [[청와대]] 경제수석으로서 기업구조조정과 체질개선을 진두 지휘하는 한편, [[재벌]]의 폭주를 견제하는 등 균형 잡힌 경제적 성과를 이뤄내려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 후보로 서울 [[관악구 을]]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낙선[* 여담으로 김종인을 꺾고 해당 지역구에서 당선된 상대 후보는 [[평화민주당]]의 [[이해찬]] 후보였다. 이후 2016년 김종인이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을 맡던 당시 이해찬이 공천 과정에서 탈락하며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하게 되었는데, 항간에서는 본인이 공천 권한을 쥐는 위치에서, 이때의 앙금을 잊지 않고 떨어뜨렸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앙금이 아니었어도 선거구도상 불가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한 후, 1989년 1월부터 7월까지 [[국민은행(1963년)|국민은행]]의 이사장을 지냈다. 그러다가 1989년 7월부터 1990년 3월까지 제24대 보건사회부 장관을, 1990년 3월부터 1992년 3월까지 2년간 청와대 경제수석을 역임했다. 청와대 경제수석을 그만둔 후 1992년 제14대 국회에서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재판)] 그러다가 1993년에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결국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으로 형이 확정되었다. 당시 김종인을 구속기소한 주임검사가 후일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대검 중수부]] [[함승희]] 검사였다.[[https://imnews.imbc.com/replay/1993/nwdesk/article/1759680_30684.html|#]][[https://www.joongang.co.kr/article/2815068|#]] 이 사건은 김종인의 정치인생에 있어 유일한 아킬레스건이다. 이 사건으로 김종인은 오랜시간 동안 정치적 암흑기를 걷게 된다. 김종인은 이미 1992년에 3선 국회의원, 청와대 경제수석,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중량감 있는 정치인이자 관료였지만, 이 뇌물수수 전력은 이후 오랫동안 정치권이 그와 거리를 두도록 만들었다.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이 없었다면 90년대 후반에 국회 지도부([[대한민국 국회의장|국회의장]], [[대한민국 국회부의장|국회부의장]])나 거대 정당지도부([[총재]], 의장, [[당수|대표]] 등)에 선출될만한 커리어였다. 2004년, [[새천년민주당]] 소속 비례의원으로 4선 의원에 당선되지만, 이전과 같이 정치의 중심에 서거나 별다른 영향력은 없었다. 그가 소위 킹메이커로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려면 2012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김종인에게는 잃어버린 20년을 가져다 준 악몽과도 같은 사건이다. 현재도 김종인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가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으로 실형받은 전력을 가지고 공격한다. --[[홍준표]]는 심심하면 이야기한다.-- 홍준표는 "당시 함승희 주임검사의 요청으로 김종인을 취조해 자백을 이끌어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e72dZ7VXOY&t=90s]]][* [[https://www.youtube.com/live/EbDT_PdOYqU?feature=share]]]고 했는데, 함승희는 이를 부인했다.[*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0056398]]] 어쨌든 김종인은 2011년 한나라당(새누리당) 비대위 관련 문제로도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 직전 당대표였던 홍준표와 사이가 좋지 않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19대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비대위원이었던 김종인이 당시 홍준표의 지역구인 서울 [[동대문구 을]]을 거론하면서 당 대표를 사퇴한 사람에게 공천을 주면 안 된다고 발언한 바 있다. 당시 홍준표는 자신이 조사했다고 주장하는 뇌물 사건 피의자에게 공천받지 않으려고 했으나, 출마할 사람이 없어서 당에서 홍준표를 공천했다. 이후 [[2020년]] 김종인이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으로 거론되자, 홍준표는 뇌물 사건을 언급하면서 "이제 그만 공적 생활을 정리 하시고 정계에 기웃거리지 말라. 그만 하면 오래했다"고 김종인을 비판했다.[[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25/2020042500551.html|#]] 그 후, 대한발전전략연구원을 창립해 스스로 이사장에 취임[* 명칭은 거창하게 연구원이고 본인도 이사장 직함을 쓰고 있지만 사실 [[세종연구소]]처럼 예산을 두고 연구를 하는 [[싱크탱크]]라기 보다는 개인 사무실이라고 보면 된다.]해 정치와는 거리를 두며 오랜 기간 동안 야인으로 있다가[* 사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경제부총리 자리를 제시받았으나 본인이 전권을 가지지 못한다고 고사했고(당시 경제 몫은 [[자민련]]의 것이었기에 전권을 받지 못했다.), 2002년 [[16대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가 김종인을 국무총리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 적이 있지만, 막상 당선 후 없던 일이 됐다. 그래도 청와대로 불러 미안하다고 말은 했다고 한다. 본인도 쿨하게 받아들였다.] 2004년 3월에 [[새천년민주당]]에 영입되며 정계에 복귀했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면서 원내로 돌아오게 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행적으로 2007년 제17대 대선에서는 당적은 유지했지만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를 지지했다. 그냥 단순한 지지가 아니라 정동영의 대선 후보 등록 회견 때부터 손잡고 옆에 서 있었다.[[http://m.kmib.co.kr/view.asp?arcid=0010377100|#]] 이후 [[2008년]] 정권이 교체된 뒤 김종인은 경제 정책에서 우클릭만 거듭한 채 끝난 [[참여정부]]에 대해 쓴소리를 쏟아냈는데, '좌파신자유주의? 말장난하냐. [[신자유주의]]는 실패한다. 노무현 정부가 무슨 좌파 정부냐? 기업한테 정부 기능을 기대하지 말라'고 인터뷰한 후 딱 두 달 만에 [[대침체|세계금융위기]]가 터졌다. 2008년에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고 다시 야인으로 있다가, 2011년 12월에 중도 확장을 노린 [[한나라당]]-[[새누리당]]과 [[박근혜]] 비대위원회에 영입돼 [[경제민주화]] 공약 설계를 맡기도 했다. [[이준석]]은 한때 [[박근혜 정부]]의 [[정도전]]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당시 [[이회창]], [[이한구]] 등으로부터 김종인의 경제민주화는 좌클릭, 포퓰리즘이라는 공격을 받으며 당내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지만[* [[이회창]] "보수정당이라는 새누리당이 좌클릭하고 있다.", "새누리당은 복지포퓰리즘을 두고 민주통합당과 경쟁하느라 혼이 빠지고 있다.”[[https://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2&aid=0002207281|#]]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 "정체불명의 경제민주화니 포퓰리즘 경쟁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https://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5796861|#]]], 새누리당은 과반 152석을 차지하면서 총선에서 압승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4BwqA4AfruU|#]] 그리고 2012년 9월부터는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의 경제민주화 의제와 공약은 2012년 12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에 크게 도움을 주었지만[[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1542929&plink=THUMB&cooper=SBSNEWSPROGRAM|#]] [[박근혜]]가 집권하자마자 팽당하고 [[경제민주화]] 공약은 바로 폐기됐다. 이용만 당했지만 그는 인터뷰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난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쿨하게 받아들였다. 2014년 12월에는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야인으로 지냈다. 대권 주자 [[안철수]]의 경제 멘토로 활동했다는 보도도 있었는데 2016년 1월 [[http://raythep.mk.co.kr/newsView.php?cc=&no=7772|자신은 그런 적이 없으며 언론에서 지어낸 얘기]]라고 확인했다. 2016년 1월 [[20대 총선]]을 목전에 두고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영입 제안을 받았다. 곧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처음엔 비상대책위원장이었지만 이후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로 직함을 바꿨다. 선거 기간에는 위원장이 너무 여럿이라 헷갈린다는 이유였다.] 겸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추대돼 2월부터 [[더불어민주당]]의 수장이 된다. 더불어민주당은 9년간 패배만 거듭해 빈사상태에 빠져 있었고,[*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예외적으로 승리했긴 하지만 원래 지방선거란 여당의 무덤이라...] 안철수 전 공동대표가 2015년 11월 말 문안박 연대를 거부하고 혁신 전당대회를 역제안해 내홍에 빠졌다. 결국은 [[국민의당(2016년)|국민의당]]으로 안철수 이하 소속의원 21명이 나갔다. 문재인 대표는 '친노패권주의' 때문에 사방에서 공격받고 있었다. 그러나 김종인이 들어오자마자 사실상 탈당의 흐름은 끝이 났다. 당내 중도적 인사로 영향력이 컸던 박영선의 탈당을 막은게 결정적이었다. 비대위 초기에는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 [[박경미]] 홍익대 교수, [[주진형]] 전 한화증권 대표 등의 인재들을 영입하면서 어수선했던 당을 잘 정비하는 듯 했으며, '친노패권주의'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데에 도움을 줬다. 하지만 비대위, 선대위를 모두 거머쥐고 절대적인 공천권을 휘둘러 문제를 일으켰다. 이후 선거 공천 과정에서 특정계파의 의원들만을 대상으로 한 공천 컷오프나 민주당이 우세한 지역에 측근을 공천했다가 경선에서 패배하는 등 문제점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이해찬]]과 [[정청래]]를 직권으로 공천 탈락시켰다. 친노의 손발을 자르고 자신은 비례 대표 2번에 공천하는 모습으로 큰 반발을 불렀다. 셀프 공천, 칸막이 공천으로 큰 욕을 먹었다. 선거 일주일을 남기고 각 당이나 언론은 새누리당의 과반 내지 180석, 그리고 더불어민주당의 역대급 참패를 예상하고 있었다. 더불어민주당이 100석만 가져와도 선전한 것이라 생각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나...[[https://www.youtube.com/watch?v=zj9aPUg9Cls|#]] 2016년 4월, [[20대 총선]]에서 123석을 차지하며 원내 1당이 되는 깜짝 승리를 거두었다.[[https://www.youtube.com/watch?v=2so4eX905xU|#]][[https://www.youtube.com/watch?v=-FX8-9G7Bpk|#]] 특히 수도권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호남은 국민의당에게 의석 대부분을 내준다. 대신 [[더불어민주당]]은 호남당이란 이미지를 벗고 전국 정당으로서 이미지를 얻었으며 부산, 경남에 발판을 마련한다. 2016년 5월 24일에는 [[대우조선해양]] 노조위원장을 만나 “대형 국영기업이나 대우조선해양처럼 1만 명 이상 고용하는 업체는 노동자가 경영을 감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종국에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 사실 이는 김종인이 과거부터 이야기해온 '경제 민주화'와 관련이 깊은 제도다. 더 정확히 말해, 원래 궁극적 경제 민주화는 노동자가 경영에 온전히 참여하는 것이지만 단기간에 체계를 만드는 데 사회적 저항이 있는 관계로, 경제 민주화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 이전 과도기 단계로 노동자의 경영 직접 감시권 보장을 이룩하는 제도를 주장해 왔다.]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6052349471|#]] 총선 후 그는 [[의원내각제]] 또는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제기하면서, 추호선생[* "~을/를 할 생각은 추호에도 없다"고 했다가 말을 여러 차례 뒤집은 데서 유래.], 전권노인네(...)[* 항상 전권을 달라는 주장에서 비롯.] 등의 별칭을 얻는 등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과 [[친문]] 성향 지지층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당대표에 출마하려고 했으나 실패한 데다가 [[반기문]] 추대설, [[안희정]] 전 [[충남지사]] 탈당 권유설 등이 퍼지면서 급속히 당내에서 힘을 잃는다.([[김종인/2016년]] 참조) 2016년 8월 27일 새로 선출된 [[추미애]] 전 대표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직에서 퇴임하였다. 이후, [[페이스북]] 계정을 신설했다고 한다. 요즘 정치권의 SNS 대세에 본인도 동참하기로 한 듯하다. [[http://news.donga.com/home/3/all/20170328/83554638/1|2017년 3월 27일 대선 출마를 기정사실화했고,]] 2017년 4월 5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http://v.media.daum.net/v/20170405111724716|#]]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그의 대선 목적은 내각제 개헌과 자신의 정치 활동의 최종 목표인 경제민주화임을 밝혔다.[[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A&nNewsNumb=201704100014|#]] 그러나 일주일 뒤인 12일. 국민들이 자신의 뜻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불출마를 선언하게 [[http://v.media.daum.net/v/20170412122450435?s=pelection2017|되었다.]] 2017년 4월 30일, 대선 레이스의 종반부에서 갑작스럽게 김종인은 내각구성권을 약속받고, 안철수 대선후보에 대한 지지 입장을 밝혔다. 이후 국민의당 개혁공동정부준비위원장을 맡았다. 대선 후보중 안철수, 홍준표, 유승민 후보를 모아 ‘반문재인 연대’를 구성하려는 모습으로 보였지만 3명 다 서로와의 연대를 거부했고 대선 결과는 문재인의 승리로 끝났다. 대선이 2주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대세에 변화를 주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대선이 끝난 뒤에는 국민의당 비대위원장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이것도 [[박주선]]이 선출되면서 소문으로 끝났다. 경제민주화라는 만화 출판 행사 때 안철수가 방문하여 김종인을 만난 것을 볼 때, 국민의당과의 끈은 이어가고 있는 듯하다. 2020년 3월, [[미래통합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반감과, 본인이 문재인 정부 탄생의 기틀을 마련 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이 크다고 한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2&aid=0002128254|#]] 그러나 총선을 고작 2주를 남겨놓고 영입이 된지라 너무 늦게 영입되었다는 평이 많았다. 제아무리 김종인이라 할지라도 2주 안에 민주당으로 기운 대세를 바꾸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선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공천을 황교안 지도부와 김형오 공관위가 사실상 망쳐놓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아직 [[미래통합당]]에 완전히 적응하지는 않은듯 자신을 [[더불어민주당]]이라고 자주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https://www.yna.co.kr/view/AKR20200410123000704|#]] 결국 이에 대한 우려가 현실이 되어 2020년 [[4.15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은 역대급 참패를 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건 김종인의 능력을 아득히 뛰어넘은 선거였다. 시기상을 보면 코로나19가 초기대응 실패에서 후속대응으로 어느 정도 안정화 되면서 여당지지도가 높아진 것이 가장 컸고 미래통합당의 여러 막말사건도 일조했다.] 개표 결과 103석으로 개헌저지선을 겨우 넘기며 김종인이 이끈 선거로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참패하였다. 다만 선거 2주 전에서야 겨우 합류해서 선거전략가로서의 면모보다는 선거운동원으로서의 역할이 더 많았다.[* [[20대 총선]] 국면 때 총선 3개월 전 일찌감치 문재인 당시 대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공천을 휘둘렀을 때와는 위상이 천양지차다.] 총선 후에는 황교안을 비롯한 당내 지도부가 낙선으로 인해 공석이 되자 당내에서는 김종인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일각의 반발도 있었지만 원내지도부가 의원들의 여론을 수렴한 결과 찬성이 더 많았다며 강행했고, 김종인이 이를 수락했다. 4월 28일, 미래통합당 전국위원회에서 177명의 찬성으로 김종인 비대위 구성을 가까스로 추인했지만[[https://www.yonhapnewstv.co.kr/news/MYH20200428012100038?did=1825m|#]][* 이 과정도 매끄럽지 않았는데, 오전 당선자 총회에서 격론 끝 무산, 오후 상임위에서 당헌 개정 무산에 이어 간신히 전국위에서 낮은 찬성률로 추인되었기 때문. 이마저도 한때 성원 부족으로 무산될 뻔 했다.] 당내에서 자꾸 나오는 반발에, 임기가 고작 4개월로 제한당한터라 자존심이 상한 탓인지 김종인 전 위원장이 사실상 취임을 거부했다.[[https://newsis.com/view/?id=NISX20200428_0001009316&cID=10301&pID=10300|#]] 하지만 결국 5월 22일, [[2021년 재보궐선거|내년 재보선]]까지 비대위원장을 맡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당선인 84명이 찬반 투표에서 내년 재보선까지 비대위 체제를 운영하는 데 '압도적 찬성'을 보였으며, 김종인 본인도 "최선을 다해 당을 정상 궤도로 올리는 데 남은 기간 열심히 노력해보려고 한다"며 "당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데 온 힘을 쏟겠다"고 비대위원장직을 수락했다.[[https://www.yna.co.kr/view/AKR20200522082253001|#]] 4.15 총선 패배 이후 미래통합당에 대해 대대적 혁신이 필요하다고 일갈하며 1970년대생 가운데 경제 전문가가 보수의 대권주자로 나서야 한다고 하며 40대 기수론을 공식 선언하였다. 이에 처음엔 김종인 비대위에 대해 찬성하던 홍준표가 김종인 반대파로 [[https://www.yna.co.kr/view/AKR20200417039100001|태세를 전환하여]][* 홍 전 대표는 40대 기수론을 부정하는 정치인 중 한 명이다.],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을 언급하여 비판하였다. [[정진석]] 21대 총선 당선인은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3086700|$]] 페이스북으로 총선 직후 __홍준표 본인이 직접 전화로 “김종인 만한 사람이 없다. 비대위원장으로 모셔야 한다. 정 대표가 김종인을 띄워달라”고 요청했었다__는 것을 밝히며 “그때는 김종인 씨가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에 연루됐던 사실을 몰랐나”고 비판했다. 정치에 잔뼈가 굵은 인물답게 현재 대중들이 원하는 젊고 개혁적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기성 정치인보다 젊은 정치인을 중용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 다만 [[장제원]], [[김태흠]], [[박대출]]을 비롯한 당내 일부는 행보에 상당히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래통합당의 구심점이 될 인물이 없다는게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래서 소방수로 김종인을 세운 것인데 일부 의원들이 비난을 하는 이유는 김종인의 행보가 아예 맘에 안 들거나 무소속인 홍준표처럼 복당하여 자신의 발언권이나 영향력을 높이려 했던 자리를 김종인이 차지한 것에 불만을 가졌기 때문이다.] 한편 비대위원장 취임 후 계속 파격적인 이슈를 꺼내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진보 의제로 꼽히는 [[기본소득|기본소득제]]를 꺼내들었고 [[박근혜]] 탄핵. 구속 및 [[이명박]] 구속에 대한 대국민 사과 검토와 호남 구애, 장외투쟁 자제 등 이전의 [[자유한국당]]이나 김종인 체제 이전의 미래통합당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기대를 높이고 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리얼미터의 지지율 집계에서 [[박근혜 탄핵]] 이후 처음으로 민주당을 뛰어넘는 성과를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11819066|거두었다.]] 민주당의 지속적인 문재인 정부/평가/경제/부동산 정책로 인한 반사이익이란 지적도 있지만 황교안 체제에서도 [[조국 사태]]를 필두로 하는 각종 권력형 비리 의혹 들의 호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의 지지율을 기어이 넘지 못했던 것을 고려하면 김종인 체제의 중도 구애 및 좌클릭, 강경투쟁 노선 배격이 성과를 보고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보들에 대해 보수정당의 정체성이 희석된다고 반대하는 당 내부 의견도 상당하다. 하지만 얼마 못 가 8.15 집회에 미래통합당 현역의원, 지역당협위원장들이 참가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다시 지지율이 추락했다. 2020년 9월 2일, 김종인 비대위는 [[미래통합당]]의 당명을 [[국민의 힘]]으로 변경했다. 그 이후 별다른 이슈는 없었지만, 결국 9~11월간 두 달 정도의 침체기를 겪으며 당 분위기가 많이 다운됐다. 오히려 그의 과도한 좌클릭이 기존 보수층 이탈을 불러온 것은 물론이요, 그렇다고 더이상의 유입도 없는 등[* 국민의힘이 아무리 좌클릭을 해도 민주당 찍을 사람들은 찍는단 것이다.] 당이 침체 되었다. 이로 인해 지지율은 오히려 [[황교안]] 체제 이전 수준으로 역주행했다.[* 다만 민주당 지지율도 2019년엔 40% 내외가 기본이었지만, 최근엔 30% 중반 박스권에서 머물고 있기에 무당층의 증가라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이긴 하다.] 그런데 12월이 되자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더불어민주당]]의 실책이 부각되며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심판론이 탄력을 받으며 [[2021년 재보궐선거]]와 대선 승리 기대감이 한층 높아졌다. 다만, [[이낙연]]과 [[이재명]] 등 선명한 색깔을 가진 쟁쟁한 후보들이 많은 더불어민주당과 달리, 재보선과 대선 모두에서 [[국민의힘]]의 후보들이 빈약한 상황이다. 심지어 이들은 [[안철수]]나 [[윤석열]]에게도 여론에서 밀리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김종인은 자신이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며, 단일화를 하더라도 [[국민의힘]] 소속이 후보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수 및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이 취할 수 있는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부정적 시선과는 별개로, [[국민의힘]] 자체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팽배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장을 여전히 하고 있는 것은 현재 여론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들어맞으며 그의 안목이 맞음을 증명했다. 3월 23일 야권 단일후보 선출 결과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가 선출되면서 자신의 뜻을 이루는데 성공했고, 4월 7일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 [[국민의힘]]이 압승을 거두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https://www.youtube.com/watch?v=hwF1bbW4Tis|#]] 4.7 재보선의 압승으로 1년도 채 남지 않은 22년 대선의 주도권은 더불어민주당에서 국민의 힘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제20대 대통령 선거|22년 대선]]에서 국민의 힘 [[윤석열]]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국민의 힘은 2020년 총선의 충격적인 역대급 패배를 극복하고 집권당이 되었다. 김종인은 그가 재건한 정당은 결국 집권에 성공한다는 공식을 또 한번 증명해냈다.[* 2012년 총선에서 김종인은 [[새누리당]] 비대위의 좌장으로서 승리를 거두었고, 2012년 대선은 김종인이 재건한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었다. 2016년 총선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의 비대위원장으로서 승리를 거두었고, 2017년 대선은 김종인이 재건한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었다.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는 [[국민의힘]]의 비대위원장으로서 승리를 거두었고, 2022년 대선은 김종인이 재건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당선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