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종오 (문단 편집) ==== 연이은 시련 ==== 문제는 사단장이 부상당한 때에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이 대규모 공격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결국 6사단은 초산에서 후퇴하다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특히 7연대는 엄청난 타격을 입고 병력만 분산철수해서 전투력을 거의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이것이 김종오 장군의 첫 번째 대패배였는데, 일단 책임은 중공군의 개입을 가볍게 본 맥아더를 위시한 UN군 총사령부에게 있었지만, 본인 입장에서도 정말 기분 좋지 않은 일이었다. 부상에서 회복된 후에는 [[제3보병사단|3사단]]장을 맡았지만, 곧바로 참가한 [[현리 전투]]에서 패배를 맛보았다. 패배의 책임은 그의 상관인 [[제3군단|3군단]][[군단장|장]] [[유재흥]]에게 돌아갔지만, 역시 여기서도 사단이 통째로 붕괴되고 모든 장비를 버린 채 혼란에 빠진 병력들이 무질서하게 산으로 흩어져서 후퇴하는 등의 추한 모습을 연출했고, 이는 명장으로 이름을 날린 그에게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후 중공군의 남하로 전선이 교착됨과 동시에 휴전협상이 진행되자 휴전 후 유리한 고지를 획득하기 위해 고지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52년 5월 김종오 장군은 중부전선의 전략적 요충지인 철원지역을 담당하는 [[제9보병사단|9사단]]장에 임명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