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종오 (문단 편집) === 전쟁 전 === 1921년 5월 22일 [[충청북도]] 청주군 부용면 외천리에서 태어나 유년시절 부용면 부강리에서 거주하였고 그는 일본 [[주오대학|주오(中央) 대학]]에 법학부로 재학 중 일제에 의해 [[학병]]으로 징집되었다가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복무 중 8.15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독립한 조국으로 귀국한 그는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1946년 1월 28일 졸업함과 동시에 육군 참위(당시의 계급으로, 현재의 [[소위]]에 해당)로 임관하였다. 임관 후 그는 전북 이리에서 [[중대장]] [[김백일]] 부위(당시의 계급으로, 현재의 [[중위]]에 해당)[* 인력풀이 매우 적던 건군 초기였기 때문에, 중위 중대장 - 대위 대대장은 물론 대령 사단장도 흔했다.]를 비롯하여 [[이한림]], [[정래혁]]과 함께 3연대[* 현재 해당 연대는 [[제7보병사단|7사단]] 예속이다.] 창설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49년 1월에 1연대장, 두 달 뒤인 1949년 3월에는 대령으로 진급했다.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약 3년 만에 소위로부터 대령까지 그야말로 '''초고속 진급'''한 것. 지금 관점에서는 특이하다 못해 비정상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이는 당시 시대상을 살펴야 한다. 이러한 진급을 한 군인들은 보통 [[일본군]]이나 [[국부군]], 또는 [[만주군]]에서 장교로서 복무한 경력이 있었다. 따라서 신생 군대의 편제 유지를 위해, 고급장교가 필요하다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예컨대 [[광복군]]과 [[국부군]]에서 활약했던 [[최용덕]] 장군의 경우, 육군 소위로 임관한 지 6개월 만에 대위로 특진하고, 두 달 뒤에는 '''초대 국방부 차관'''으로 영전했다.[* 사실 최용덕 장군은 국부군 공군 소장 출신으로 소위로 임관하는 것은 다분히 불합리한 인사였긴 했다. 군경력이 비슷한 [[김홍일(군인)|김홍일]] 장군도 특별임관 형식으로 곧장 준장에 임명되었으니.] 1949년 5월 강태무, 표무원이 이끄는 춘천 부근 6여단 8연대의 2개 대대 병력이 [[김창룡(군인)|김창룡]]이 주도한 숙군 작업에 걸리게 되자 월북했고, 그 책임으로 연대장이 바뀌어 김종오가 그 자리에 부임했는데 5월 8일 포천군 사직리에서 1개 대대가 월북한다는 거짓 투항책으로 북한군 2개 중대 병력을 유인해 섬멸하는 승리를 거두며 일약 군에서 주목을 받게 된다. 이후 6.25 전쟁 발발 불과 2주 전인 1950년 6월 10일 [[춘천시]] - [[인제군]] 지역의 [[38선]] 경비임무를 담당하는 [[제6보병사단]]장에 임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