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종모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182132> [[KBO 골든글러브|[[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height=40]]]] [br] [[틀:KBO 골든글러브/외야수/1900년대|'''{{{#b58a5d KBO 골든글러브}}} {{{#ffffff 외야수 부문 수상자 (1983 ~ 1984, 1986 ~ 1987)}}}''']] || [[해태 타이거즈]]의 프랜차이즈 스타 외야수로서, 1980년대 당시 초호화 스타군단이었던 해태에서 [[김봉연]], [[김성한]], [[이순철]], [[선동열]], [[한대화]]에게 가려져 있었지만[* 가려져 있었다고 표현되었지만 그 역시 [[KBO 리그]]의 8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로 빠짐 없이 꼽히고, 타이거즈 역대 올스타로 팀을 꾸려도 빠지지 않고 선정되는 프랜차이즈 스타 선수였다. 가려진다는 의미는 다른 팀이었다면 한 시대를 놓고 봤을때 간판 스타 중에서도 대표격이었을 선수가 그 정도까진 대우를 못 받았다는 정도이다. 지금도 타이거즈 팬들에겐 빠질 수 없는 이름이다.] 클린업과 하위타순을 넘나들며 5차례나 3할 이상을 기록하며 1980년대 해태 왕조의 건설에 기여한 선수였다. [[김봉연]], [[김성한]], [[김준환]] 등의 거포가 많았던 80년대 초중반 해태에서 컨택트에 초점을 맞춘 교타자라는 점이 주요 특징으로 꼽히곤 하는데, 사실 은퇴 시점에서도 홈런 10위권 대에 위치해 있었고 1982년부터 1988년까지 7년간 기록으로는 7위까지 기록했던 펀치력도 준수한 전형적인 중장거리형 교타자였다.[* 오히려 거포로 알려진 [[김준환]]이 원년 홈런 2위를 기록한 이후론 단 한번도 10위 안에 들지 못하고 두자릿수 홈런도 단 두차례만 기록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1984년에는 부상으로 24경기나 까먹고도 리그 5위에 해당하는 14홈런을 쳤으니 중장거리의 교과서로 봐야 할 듯. 즉 우타자판 [[장성호]]였던 셈이다. 프로에 데뷔 한 후 김종모는 '''좌효조, 우종모'''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컨택 능력에 있어서 비교될 선수가 역대 최고의 교타자였던 [[장효조]] 뿐일 정도로 빼어난 컨택능력을 자랑했다.[* 세간의 평으로는 포수 미트에 들어간 공을 꺼내서 치는 것 같다고 할 정도였으며, 현역시절 정말로 공이 너무 좋아 못 칠것 같은 투수를 꼽아 달라는 질문에 자신에게 그런 투수는 없었다. 라고 말하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반대로 삼미에게 무척강했다. 당시 삼미가 약팀이긴 했지만 타 선수들에 비해 유달리 강했다. ] 그러나 역시 타격의 신이라고 평가받는 [[장효조]]의 벽은 넘지 못해서 자주 3할을 넘나 들었음에도 타격왕은 차지하지 못하는 [[2인자]]였다.[* 83년과 86년에 타율 2위를 기록했는데, 특히 83년에는 .350의 고타율을 기록하고도 무려 .369의 타율을 기록한 장효조에 밀려 2위를 기록한다. 해당 타율은 역대 타이거즈 역사상 [[이종범]], [[김선빈]]에 이은 팀 내 3위 기록이다.][* [[전설의 타이거즈]] 방송에서 밝힌 바로는 소수정예로 운영된 해태 타이거즈의 팀 사정과 김응룡 감독의 성향 상 타율 관리를 목적으로 김종모를 빼주거나 할 수 없어서 타 팀의 수위타자들과 달리 타율관리가 힘들었다고 밝혔다.[[https://www.youtube.com/watch?v=LJYGnUGAX3Y|출처]]] 83년 3할 5푼의 타율의 성적을 시작으로,[* [[전설의 타이거즈]] 방송에서 밝힌 1983년 .350의 고타율을 기록한 비화가 있었는데, 당시 해태 타이거즈 프런트에서 82년 시즌 종료 후 김종모에게 '내년 시즌에 타율 .350 이상을 치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겠다.' 라고 했었다. 그리고 거기에 자극을 받은 김종모는 83년도 시즌에 정확히 .350의 타율을 기록했고 보너스를 받았다.[[https://www.youtube.com/watch?v=LJYGnUGAX3Y|출처]]] 4번의 [[KBO 골든글러브]]를 수상, 올스타전에 6번 출전, 특히 1987년 [[KBO 올스타전]]에서는 '''패전팀(서군) 소속'''임에도 MVP로 뽑히는 등 원년부터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84년부터 시작된 고질적인 허리부상 때문에 경기 출장수가 많지 않은 편이다. 프로 통산타율이 0.298인데, 이는 앞서 말한 부상으로 인한 말년의 부진 때문. 김종모는 앞서 말한 뛰어난 타격 실력으로도 유명하지만, 타격 뿐만 아니라 안정감 있는 외야 수비실력을 지녀 265경기 연속 무실책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 기록은 훗날 [[조원우(야구)|조원우]]에 의해 깨진다.] 그 외에도 항상 싱글벙글 웃는 모습으로 인품도 매우 훌륭하다고 알려져 있다. 1992년까지 잦은 허리부상 등으로 부진 했지만 92년 겨울, 몸이 완전히 회복되면서 스프링캠프때도 전년과 확연히 달라진 몸상태를 보여 본인과 코칭스태프가 많은 기대를 했다. 그러나 시범경기를 앞두고 [[캐치볼]]을 하다가 공이 구강쪽을 강타하는 불의의 부상으로 인해 한 달여간 제대로 된 식사와 운동을 하지 못해서 스프링캠프 때 몸을 만들어 놓은 것이 허사로 돌아가 구단의 코치 권유에 의해 은퇴를 하게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