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종규(농구) (문단 편집) == 프로 이전 경력 == 낙생고 재학 시절에 고교 최고의 센터 자원으로 불리면서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가드 성재경, 박래훈, 김종범, 센터 권기범 등과 한솥밥을 먹었다. 1년 선배 박래훈은 [[경희대학교]]로 먼저 진학했다. 권기범은 기대를 안고 상명대에 입학했으나 1년만에 농구를 접었다.] 김종규를 잡는 대학이 스카우트 싸움의 승자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결국 승자는 [[경희대학교]]가 되었다. 경희대는 김종규가 입학한 1학년부터 졸업하는 4학년까지 모두 [[한국대학농구리그]]의 결승전에 오르면서 두 차례 우승을 거두는 등, 농구부 창설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김종규가 센터로 팀의 골밑을 지키고, 동기생들인 [[김민구]]와 [[두경민]]이 백코트를 이루면서 경희대는 전승우승의 신화까지 쌓으면서 그야말로 잘 나갔다. 다만 [[최부영]] 감독의 지도 스타일이 센터와는 상극일 정도로 [[가드(농구)|가드]] 중심의 농구를 하는데다가 김종규를 성장시킬 센터 전담 코치도 없는 상황[* 당시 코치는 [[김현국]]이며 현재 경희대 감독이다.]이라 김종규의 기량은 급격하게 늘지는 못했다.[* 팀에서 주로 맡은 역할은 리바운드 및 속공 트레일러. 김종규의 선배들이었던 권민욱(207cm,휘문고)은 대학 시절 농구를 관뒀고, 김종규의 체력보충병 역할을 소화했던 김용오(205cm,대경정산고 졸업)는 프로 지명에 실패했다. 김종규가 졸업반 일때 신입생으로 입학한 [[김철욱]](우띠롱)은 4년 뒤 프로 입단에 성공했다.] 국가대표에서는 대학 선수라는 한계도 있겠지만, 분명 그와 종종 비견되는 [[김주성(농구)|김주성]]과 비교해보면 김주성의 대학시절의 위력만은 못하다는 것이 중론. 물론 여기에는 국가대표와 대학리그의 일정을 병행하면서 쌓은 피로가 컸다. 어쨌든 김종규와 비견되는 센터는 적어도 대학무대에서는 김종규의 데뷔 시즌에 있었던 [[오세근]], 졸업반이던 2013년에 등장한 고려대학교의 [[이승현(농구선수)|이승현]]&[[이종현(농구선수)|이종현]] 정도를 제하면 거의 전무한 실정이었다. 가뜩이나 코치진이 특급 센터 유망주의 재능을 만개시킬만한 비전도 의욕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상황에, 원래도 잘 하던 리바운드/블록/스크린/트레일링 등만 열심히 해줘도 마땅한 적수가 거의 없는 선수풀이 겹치니 기량 발전이 정체될만도 했다는 평이 지배적. 팬들 사이에서 '탈대학급 장신 유망주라면 대학 4년 다니면서 왕놀이 할 바에는 얼리드래프트로 프로 진출하는 게 낫다.'라는 인식이 생긴 데에는 김종규의 영향도 매우 컸다. 물론 그 정체된 기량조차도 국대급이었던 만큼, 김종규-김민구-두경민의 경희 10년대 트리오 빅3를 잡기 위해 일부 KBL의 팀들이 성적 떨어뜨리기를 시도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실로 컸다. 이런 고의 성적 떨어뜨리기가 KBL의 인기를 떨어뜨린다는 비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묵묵히 탱킹에 열을 올린 결과, [[창원 LG 세이커스]]는 행운의 1번을 잡았고 일찍부터 김종규의 유니폼을 준비해 둘 정도로 열성이었던만큼 주저없이 김종규를 선택해 팀의 숙원인 정통 센터를 얻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