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조순 (문단 편집) == 기타 == * 김조순 본인은 굉장히 조심스럽고 모나지 않게 살아가려 했던 것은 분명하다. 요직들도 대부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하지만 병권의 핵심 요직인 병조판서, 훈련대장, 호위대장 직은 받아들였다.] 말년에는 왕의 장인인 국구에게는 당연직이었던 영돈녕부사(정1품)와 제조직 외에 다른 관직은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다만 죽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물론 비변사 제조 자체가 정권 운영의 핵심 요직이었다. 그밖에 개인적인 품성 면에서도 부정축재 등으로 지탄을 받는 기록도 없다.[* 사실 김조순 정도 인물이면 해쳐먹어도 무서워서 기록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권력자의 부정 축재는 어떤 형태로든 기록에 남기 마련이다. 당장 김조순의 딸이자 2번이나 수렴청정을 하며 위세를 떨친 [[순원왕후]]가 부정축재 한 사례들도 잘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김조순은 진짜 부정축재를 했다는 기록을 찾기 힘들다. 제대로 된 시장과 [[화폐]] 경제의 부재로 [[선물]] 문화가 단순한 친목이 아니라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던(=대가성만 추가되면 [[뇌물]]이 되는) 조선시대에 거물급 고관이면서도 [[재물]] 관련 시비 기록이 거의 없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기껏해야 [[정도전]], [[조영무]], [[김종서(조선)|김종서]], [[황보인]], [[구치관]]과 같은 몇몇 정도. 최소한 그 시대 기준으로는 흠 잡힐 만큼 부정축재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왕이 높은 관직을 제수하거나 상을 내릴 때도 극구 사양해서 받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한다.[* 본인의 관직만이 아니라 정조의 [[건릉]]을 옮기는 것을 추진(김조순이 주도적으로 추진한 몇 안되는 사례)하여 성공시켰을 때, 왕이 이를 치하하는 의미로 [[땅]], [[노비]], 내구마를 하사하고 김조순의 일가 [[친척]]들을 등용시켰는데 이것도 사양했다.] 그뿐만 아니라 [[과거 제도|과거]]제의 문란으로 출세길이 막힌 젊은 인재를 등용하고, [[현시창]]적인 상황에 처한 민생을 왕에게 알리는 것에도 힘을 썼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나 당시의 [[역사서]]에서도 후한 평가를 받았으며, 당장 다른 전문인들의 언급을 참고해도 '그의 혈족과 측근이 권력을 독점하는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시발점이 된 인물' 정도의 언급만 나오고 [[간신]]이라는 묘사는 없다. * 1811년 [[홍경래의 난]] 당시 [[반남 박씨]] 박종경과 [[세도 정치]]를 했다는 비판받은 사실이 있어 이미 당대에도 [[권신]]이라는 점은 충분히 알려진 듯 하다. 하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그냥 [[이름]] 높은 세도가들은 닥치고 거론된 감도 있는게 민란들이라 당장에 박종경은 뭘 제대로 한게 없다. 덧붙이자면 세도 정치기의 각종 문제는 정조 시기에도 그 단초가 예고됐다(대표적으로 [[수령]]권의 강화와 그로 인한 환곡 폐해와 탐학의 발생). 세도 정치의 기반 또한 [[규장각]], 주교사 등 정조가 설치한 각종 기관들에서 나왔다. 소수 가문들에 의한 과거의 독점 또한 18세기 후반(영조 말)부터 이미 널리 확산된 경향이었으며 서울 [[양반]]과 지방 양반의 분화 또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울러 18세기 말부터 대외 교역이나 농경지의 확대 등도 정체 혹은 침체에 머물렀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다시 말해 당시 조선의 쇠퇴를 단순히 세도정치, 나아가 김조순 개인에게 돌릴 수만은 없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그러한 쇠퇴 경향에 발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당시의 집권층이 잘했다는 건 아니다. 요약하자면 단순히 '명신'과 '간신'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평가하기에는 참 난감한 인물. 개인의 입장으로는 뛰어난 능력, 인품을 갖춰 그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정국을 운영했다. 하지만 그가 죽은 후에는 [[세도정치]]가 대폭발, 결국 안동 김씨라는 혈연적 측면과 비변사를 통한 소수 인물들의 정권 독식이라는 정국 운영 방식 측면의 2가지 측면에서 세도 정치를 낳은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버린 인물이다. 여러모로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정조 사후 생기를 잃고 회색으로 빛을 잃어가던 조선 말기를 상징하는 인물. 어찌보면 [[당나라]] [[현종(당)|현종]] 대의 [[이림보]]보다도 무서운 인물. 딸인 [[순원왕후]]와 보면 더욱 흥미롭다. * 평소 소설을 매우 좋아하였으며, --소설가-- 직접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68078&cid=46644&categoryId=46644|<오대검협전>]]이라는 [[무협소설]]을 쓴 적이 있다. 오대검협전의 집필 시점은 불확실한데 김조순이 생전에 직접 공개한게 아니라 김려라는 문인이 본인 및 주위 문인들의 글을 모은 유고인 담정총서(藫庭叢書)에 수록된 김조순의 고향옥소사(古香屋小史) 중에서 발견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설광이었던 탓에 실제로 젊은 시절 예문관에서 숙직할 때 [[후배]]와 연애소설을 나눠보다 하필이면 정조에게 걸렸고 정조는 반성문을 쓰게 하는 것으로 처벌을 대신했다. 그런데 그 반성문을 기가 막히게 잘 써서 정조가 극찬을 내렸다. 남들은 반성문을 쓰라 하면 자기변명에 급급한 글만 써댄 것에 반해 김조순은 잘못한 것은 확실히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글을 썼다고. * 김조순은 평소 몸가짐이 단정했고 항상 정중하게 남을 대했는데 어느 [[야사(역사)|야사]]에는 김조순의 [[정적]]이 그를 모함하기 위해 일부러 술취한 이를 들여보내 행패를 부리라 사주했는데 그는 다 죽어가는 [[환자]]여서 매를 치면 죽는 몸이었다. 그러나 김조순은 오히려 그를 거두고 잘먹여 보냈고 따로 사람을 시켜 뒤를 쫒아보니 과연 누군가 김조순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벌인 일이였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