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정길(1945) (문단 편집) === 정계 활동 ===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부산직할시 [[중구(부산)|중구]]-[[영도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예춘호]] 후보와 [[신민당(1967년)|신민당]] [[김상진(1933)|김상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직할시 중구-[[동구(부산)|동구]]-영도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왕상은]] 후보와 [[민주한국당]] 안건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찬종에게 [[신한민주당]] 공천에서 밀리자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민주한국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중선거구제]] 하에서 신한민주당 [[박찬종]] 후보와의 동반 당선을 위해 '''아빠는 신한민주당, 엄마는 민주한국당'''이라는 선거 구호를 사용하여 자신은 1등 당선되고 박찬종은 2등 당선되었다. [[민주정의당]] [[윤석순]] 후보는 당연히 낙선.[* 당연한 낙선이 아니었다. 실제 야권1명 여권1명 대부분이 당선되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였지만 이 윤석순 후보란 사람의 부친이 일제강점기 때의 악질친일파로 독립운동가들을 무수히 고문하고 죽인 사람으로 조선인 최초 종로경찰서서장으로 부임하고, 이후 황해도 경찰부장(지금 지방경찰청장임)을 역임한 [[윤종화]]로 알려지는 바람에 떨어진 것. 더 웃긴 건 그의 5촌 조카가 [[윤상현(정치인)|윤상현]]으로 전두환의 사위였다. 그러다 보니 어마어마한 금권선거를 하였으나 사람들이 전부 안찍어서 떨어진 것.] 당선 직후 다시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복당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부산직할시 영도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이 통일민주당에 몸담으면서 그와 행동을 같이 하였다. 따라서 [[3당 합당]]에 따라가지 않은 1990년 이후에는 [[부산광역시]]에서 출마한 선거마다 계속 낙선하였다. 3당 합당 이후로 출마한 선거만 재보궐 포함 국회의원 선거 6번, 시장 선거 1번이다. 그만큼 진정성과 인지도는 있었지만 오직 지역정당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매번 눈물을 삼켰다. 특히 14~17대 총선에서 3번을 한나라당 후보인 김형오에게 깨졌고, 중간에 지역구를 바꾼 93년 재보궐선거와 15대 총선에서는 정치신인인 박종웅과 정의화에게 석패했다. 이후 정권이 교체되며 [[김대중]] 정부 때는 [[행정자치부]] [[장관]]과 정무수석을 지냈고, [[노무현]] 정부 때는 [[대한체육회]]장과 [[대한태권도협회]]장[* 후임자로 온 사람은 [[홍준표]].]을 역임하였다. 여담으로 행정자치부 장관 시절 공직사회의 개혁을 주도했으며,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장관과의 대화방을 개설하여 국민과의 직접소통을 최초로 시도한 장관이기도 하다. 그래도 17대 총선에서는 현직 의원인 김형오를 맹추격해서 45%의 고무적인 성과를 올렸으며, 2010년 시장 선거에선 역대 부산시장 야권 후보 최다득표율을 기록했다. 2012년에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영도를 양보하고[* 이후 들어온 사람은 [[김비오]]. 그 역시 영도에서 정치적 기반을 쌓은 인물이다.] 부산진으로 선거구를 옮긴 게 패착이 되었다. 영도에서 당선된 [[이재균(정치인)|이재균]]이 의원직을 상실하자 재보궐선거에 출마할 것으로 보였지만 불출마했다. 2013년 6월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