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정구 (문단 편집) == 생애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가수 김정구 젊은시절.jpg|width=100%]]}}} || || '''젊은 시절.''' || [[1916년]]에 [[함경남도]] [[원산]]의 명사십리가 위치한 마을에서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개신교]] 집안이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찬송가]] 등의 [[노래]]를 잘 접했다고 한다. [[1936년]]에 가수가 되기 위해서 [[서울특별시]]로 간 김정구는 형인 김용환의 레코드사에서 삼번통 아가씨라는 노래로 처음 데뷔하게 되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1939년]]에 눈물젖은 두만강이라는 노래로 대성하게 된다. 계속해서 활동한 그는 바다의 교향시를 시작으로, 여러 곡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그의 가창력과 노래들은 민요를 기반으로 해서 익살스러운 분위기가 많다. 특히, 그러한 노래들을 부를 때면 가히 할아버지의 특성들을 모두리 보여줄 만큼 민요스러운 분위기가 많았다. 이러한 노래들을 만요라고 한다. 광복 후에도, 눈물젖은 두만강이 계속 전파를 타게 되어 가수로서 활동을 이어나갔고 [[1985년]]에 [[가요무대]]가 방영한 뒤로는 주로 그곳에 많이 나와 원로가수로서 미국 LA, 일본 오사카 공연 같은 해외에도 동포위문공연을 자주 다녀, 원로가수의 대표격으로 활동하였다.[* 김정구와 더불어 자주 가요무대에 나온 남자 원로가수는 고운봉, 현인, 한복남 등이 있는데 모두 김정구 보다 3~4살 어리며. 그와 동갑인 김영춘, 최병호 등은 히트곡이 단 하나인 탓으로(...) 자주 가요무대에 출연하지 않았다.] [[1985년]]에는 실향민의 한이라고 할 수 있는 [[북한]] 방문과 더불어 북한에서 공연도 하게 되어 실향민 출신 가수의 꿈을 완전히 이뤘다고도 볼 수 있다. 1980년에는 대중가수로서는 처음으로 [[문화훈장]]인 보관문화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그러다가, [[1992년]]부터 급격히 노쇠해져, 아들이 이민가 있는 [[로스엔젤레스]]로 요양을 떠나 그곳에서 [[1998년]]에 숨을 거두게 된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youtube(d4sqEBzS0iU)]}}}|| || '''김정구 가요무대 스페셜'''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