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재걸 (문단 편집) === [[삼성 라이온즈]]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mage/003/2007/08/21/NISI20070821_0005015576_web.jpg|width=100%]]}}}|| 삼성 라이온즈 입단 당시에는 계약금 2억 1천만원이라는, LG 1차지명 [[심재학]]과 함께 신인 역대 최다 계약금을 받아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김재걸의 실력은 팬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사실 김재걸의 계약금은 현대 피닉스에게 물어줘야 할 위약금 1억원이 포함되어서 세후 실수령액은 9천만원을 약간 넘기는 수준이었지만, 김재걸 본인의 자존심을 살려주고, 재계 라이벌인 현대, LG와의 기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일부러 2억 1천만원으로 보도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피닉스에서 뛰었던 선수들 상황이 비슷했는데, 1997년이 되어서야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한 문동환도 공식 계약금은 5억원이었지만, 실제로 현대 피닉스 측에 위약금을 배상해야 했음으로 실 수령액은 더 낮았다.] 활동적인 풋워크를 바탕으로 한 괜찮은 수비를 가지고 있었고 발도 빨랐으나, 결정적으로 타격이 사망. 1995~1996년의 주전 시절(95년 유격수, 96년 2루수)[* 본래 주전 유격수는 [[류중일]]이었고, 주전 2루수는 [[강기웅]]이었지만 둘 다 부상으로 제 몫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빈 자리를 특급 유망주였던 김재걸이 채우게 된 것.]에도 꾸준히 2할대 초반의 타격을 보이며 스스로 주어진 기회를 걷어차고 말았다. 심지어 1996년 5월엔 비록 어깨가 강한 선수인걸 감안하더라도 '''땜빵''' [[포수]]로 나온 [[이종범]]에게 도루저지를 당하는 굴욕도 겪는다. 1997년 팀에 새롭게 부임한 [[백인천]] 감독은 스프링캠프에서 1루수 [[이승엽]], 2루수 [[정경배]], 3루수 [[김한수]], 유격수 [[김태균(1971)|김태균]]을 주전으로 낙점하면서 파격적인 내야 리빌딩에 나섰다.[* 앞의 선수들 나이가 22, 24, 27, 27살. 사실 KBO에서 단기간에 이런 식의 리빌딩을 성공시킨 거의 유일한 사례이다.] 김재걸이 이들에게 밀린 결정적인 이유도 바로 타격이였다. 이승엽은 이제 막 시즌을 시작하는 처지였지만 백인천 감독이 열심히 밀어주었고(그리고 데뷔 3년차인 1997 시즌에 이승엽은 국내 '''첫''' 홈런왕을 차지했다.), 김태균은 정확도만 놓고 보면 김재걸과 큰 차이는 없지만, 홈런을 16개나 친 시즌이 정도로 한 방이 있는 유격수였다. 그렇다고 외야로 전향하자니, [[양준혁]], [[최익성]]에 [[신동주(야구)|신동주]]까지 있어서 자리가 없었다.[* 참고로 신동주의 타격재능이 만개한 것은 1997년의 일이다. 타율이 무려 1할 가까이 올랐다. 양준혁 - 최익성 - 신동주로 이어지는 외야 라인업은 타격 성적까지 우수했던지라 1할대 내야수인 김재걸이 들어가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자신보다 나은 방망이를 가지고 있는 선수들에 밀려 벤치워머로 강등되었으며, 군 복무를 마친 2001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대수비]] 요원으로 뛰게 된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이 때 프로 주전선수라는 자만심에 휩싸여 연습을 게을리 했다고. 이후 백업요원으로 떨어지자 자신의 자만을 깨닫고 죽어라 수비연습을 하면서 스스로를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나이 막 서른이 지났을 무렵부터 '''삼성 라이온즈가 우승한 모든 [[한국시리즈]]'''에서 당당한 주연으로 떠오르는 것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팀이 처음 우승한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그는 6차전 9대 6으로 뒤지던 상황에서 9번 타자로 나와, 당시 혼신의 힘을 다해 [[마무리 투수]]로 뛰던 [[이상훈(좌완투수)|이상훈]]에게서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큼지막한 중월 펜스 직격 2루타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1번 [[강동우]] 삼진, 2번 [[틸슨 브리또]] 볼넷, 3번 [[이승엽]]의 동점홈런,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4번 [[마해영]]의 끝내기 홈런. 삼성 라이온즈의 한국시리즈 첫 우승은 김재걸의 방망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2003년과 2004년은 언제나 그렇듯이 별 특징 없는 중고참 후보 선수로 시즌을 보냈다.[* 2003년에는 [[틸슨 브리또]]와 [[고지행]]이 주전이었고 박정환과 김재걸이 내야 센터라인 백업이었다. 2004년에는 [[박종호]]가 현대에서 이적하고 [[조동찬]]이 성장하면서 주전이 되었다. 김재걸은 두 해 연속으로 1할대 타율을 찍은 백업 내야수였다.] 특히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 석패한 삼성이 거액을 들여 [[심정수]]와 [[박진만]]을 [[KBO FA 제도|FA]]로 영입하면서, 18인 보호선수명단[* 다른 팀의 FA를 영입하는 팀은 기본적으로 FA의 전 소속팀에 전해 연봉 300%에 해당하는 보상금에다가, 150%의 추가 보상금 혹은 보상선수 한 명으로 프리미엄을 얹어 줘야 했다. 여기에서 FA 영입팀은 상대팀이 절대 데려갈 수 없는 핵심선수 18명을 보호선수로 지정할 수 있다.]에 변변찮은 공격력을 가진 김재걸과 김종훈은 집어넣고 150킬로대의 빠른 공을 던지던 지역 유망주 투수 [[이정호(1982)|이정호]]를 제외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삼성 팬들은 '''왜 김재걸은 보호하면서 이정호는 가게 내버려 두었냐'''며 불만을 토했다.[* 사실 이정호의 성적을 보면 150km을 던지는 유망주라는 점을 뺐을 때 김재걸보다도 더 거둔 결실이 없었다. 계속된 부상과 재활, 투구폼 교정으로 인해 낭비한 시간이 4년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선동열]]식 훈련을 하다가 부상이 재발한 상태였다. 3년간 19경기에 올라와 던진 성적도 영 좋지 않았다. 그나마 김재걸은 타격이 1할대여서 그렇지 큰 부상이 없이 계속 1군에서 대주자, 대수비 같은 역할이라도도 수행할 수 있었던 선수였다. 하지만 터지지 않은 유망주에 대한 기대감이 상당히 컸고 김재걸의 통산 성적에서 볼 수 있듯이 앞으로 보여줄 것이 더 많아보였던 이정호 VS 그저 그런 대수비 요원 김재걸 중에서 후자가 선택되었으니 팬들의 반발이 있었다.][* 이후 현대는 이정호를 바로 공익요원으로 보냈다. 하지만 이정호는 정작 이후에도 부상과 부진에서 헤어나오지 못 하고 삼성 시절보다 더 시원찮은 성적만 올리고 해외진출을 선언하면서 스스로 옷을 벗었다. 반면 김재걸은 후술하듯이 제 몫 이상은 해 주고 은퇴했다.] 또 [[박진만]]은 삼성으로 넘어오면서 김재걸이 달고 있었던 자신의 기존 등번호 7번을 요구했고, 김재걸은 박진만이 후배였음에도 불구하고[* 김재걸은 1995년 단국대 졸업, 박진만은 1996년 인천고 졸업(1년 유급). 참고로 김재걸과 함께 단국대 타선을 이끌던 후배 선수가 바로 [[이병규(1974)|이병규]]와 [[강동우]]였다. 무려 5기수나 차이가 났다.] 등번호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김재걸의 팀 내 입지가 어느 수준이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런 우여곡절 끝에 맞이한 2005년은 김재걸의 선수생활에서 '''가장 화려한 한 해가 되었다.''' 시즌 초 [[박진만]]의 부상으로 유격수에 공백이 생기자 [[선동열]] 감독은 아쉬운 대로 김재걸을 선발 출장시켰다. 초반에는 김재걸 선발출장을 지지하는 팬들이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 2004년에 쏠쏠한 유격수 수비실력을 보이면서 타격에서도 잠재력을 과시한 [[조동찬]]이 3루수에서 유격수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김재걸은 이런 반대여론을 수비도 아니고 '''미칠 듯한 공격력'''으로 메꿔 버린다. 이 놀라운 활약에 사람들은 김재걸을 욘사마 [[배용준]]과 양신 [[양준혁]]에 빗대어 '''걸사마, 걸신'''이라 부르며 열광하기 시작했고, 그는 박진만이 복귀한 중반 이후에도 백업 선수로 종종 출장하며 팀의 승리에 여러 차례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한 예로 1위 삼성과 2위 SK의 미리 보는 한국시리즈라 불렸던 그 해 8월말 [[인천 SSG 랜더스필드|문학 야구장]] 3연전에서, 김재걸은 팀이 1무 1패로 몰려 있던 마지막 경기에 선발 출장해 솔로홈런을 날렸다. 그리고 그 경기는 삼성이 '''1대 0'''으로 승리했다. 그리고 맞이한 [[2005년 한국시리즈]]는 말 그대로 김재걸을 '''[[KBO 한국시리즈]]의 사나이'''로 만드는 경기가 되었다. 이번에도 출발은 백업요원이었으나, 1차전에서 [[박종호(1973)|박종호]]가 번트를 대다가 공에 손가락을 맞아 시리즈 아웃되면서 바로 그 자리에 들어간 김재걸은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12타수 6안타 5볼넷 4득점 2타점'''이라는, 말 그대로 MVP급 활약을 선보였다. 그리고 삼성은 이런 김재걸의 활약에 힘입어 [[두산 베어스]]를 스윕하고 세번째 우승컵을 가져갔다. 시리즈 MVP는 철벽투구를 선보인 신인 [[오승환]]이 가져갔지만, 팬들이 뽑은 한국시리즈 최고 선수의 영예(구단 별도시상)는 김재걸에게 돌아갔다. 더군다나 한국시리즈 종료 후 열린 이벤트 게임인 [[아시아 시리즈|코나미컵 대회]]에서도 중국전 2타점 적시타를 치는 등 맹활약하였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시즌 후 연봉 협상에서는 무려 69.2%가 인상된 1억 1000만원에 연봉 계약을 마치며 데뷔 첫 억대 연봉을 받아보게 되었다. 여기에 2006년 3월에는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표팀에 발탁되는 겹경사를 누렸다. 대표팀에서도 역할은 [[김민재(내야수)|김민재]]와 함께 내야 백업. 당시 대표팀의 주전 키스톤 콤비였던 [[박진만]], [[김종국(야구)|김종국]]의 백업 역할을 수행하며 대표팀의 4강행에 기여했다. 다만 2006년 정규시즌 개막 후에는 전체적으로 예전의 그 물방망이로 돌아갔으나, 이 해에도 역시 '''한국시리즈'''에서 천금같은 동점타를 날리는 등 팀의 4번째 우승에 기여한 선수 중 한 명이 되었다. 시즌 후에는 FA 자격을 얻어 삼성과 2년 총 5억 6000만원에 재계약하는 등 억대 연봉, 국가대표팀 발탁, 한국시리즈 우승, FA 계약까지 이뤄내는 데 성공하면서 평범한 내야 스페셜리스트 선수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보여줬다. 2007년에는 3루의 구멍을 막기 위해 또 다른 노장 [[김한수]]와 함께 고군분투했으며[* 통상적으로 김한수는 3루수 이미지가 강하지만 이승엽과 [[마해영]]이 동시에 떠난 이후에는 1루수로 출장했다. 2006 시즌을 보면 주전 3루수는 [[조동찬]]이었고 김한수와 김재걸이 조금씩 보조해준 양상이다. 2007년에 조동찬이 부상으로 빠지면서 사실상 김재걸이 주전 3루수였다.], [[신명철]]이 들어오고 '''[[박석민]]'''이라는 걸출한 신예가 복귀한 이후에는[* 2007년에 롯데에서 넘어온 신명철은 주전 2루수가 되어 [[박종호(1973)|박종호]]를 대체했다. 그리고 2008년에 급부상한 [[박석민]]이 주전 3루수를 맡게 되자 김재걸은 2루수, 유격수, 3루수로 출전했고 대수비로 출전하는 빈도가 제법 높아졌다.] 조용히 은퇴를 준비하게 된다. 참고로 당 시즌 5월 8일엔 1이닝에 실책 4개를 범하여 한 이닝 최다 실책 공동 1위 자리에 올라가는 불명예스런 기록을 남기게 된다. 2009년에는 선수로 등록했지만 사실상 플레잉코치 역임을 했으며,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을 때는 2군에서 뛰면서도 후배들의 훈련을 도우며 코치 수업을 쌓기도 했다.[* 64경기에 올라왔지만 대주자, 대수비요원으로 올라온 것이 전부였다.] 2009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2010년 4월 10일 경기에서 은퇴식을 치렀다. 삼성 구단의 5번째 은퇴식이었다. 그런데,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sslinos.jpg|width=100%]]}}}|| 아니, 은퇴식을 한 건 좋은데, '''Linos'''가 뭐냐? 삼성 프런트는 이 건 때문에 영어도 못 하는 프런트라고 빈축을 샀다. 실력으로 경기를 압도하는 스타 플레이어는 아니지만 그의 발견은 백업 요원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국 야구의 체계적인 면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다. KBO에서 내야백업 유틸리티로 가장 유명한 게 꾸준함은 [[LG 트윈스]]의 [[이종열]], 임팩트는 한국시리즈의 사나이 김재걸일 것이다. 연도별 성적을 보면 은퇴식을 치러줄 만한 성적을 기록하진 않았지만[* 그 이전에 은퇴식을 가진 선수들인 [[류중일]], [[김현욱(야구)|김현욱]], [[김한수]], [[전병호]]에 비하면 김재걸의 성적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편이다.] 나름 그래도 한 팀에서만 15년을 뛴 원 클럽 플레이어고, 삼성의 한국시리즈 [[콩라인]] 탈출의 밑바탕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이해가 안 가면 위로 올라가서 2002년 코시 부분을 읽어보라.] 삼성의 [[2005년 한국시리즈|V3]], [[2006년 한국시리즈|V4]]를 견인하는 등 큰 경기에 강한 주역이기도 해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