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일수 (문단 편집) === 검사 임용 탈락과 서독 유학 준비 === 그 후 1971년 1월 [[사법연수원]]에 입학했고, 사법연수원을 졸업할 때에는 판사가 아닌 검사 임용을 희망했다. 현장에서 숱한 피의자를 만나는 검사야말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에는 제격이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보로 검사임용 결격사유를 통고 받았다. [[연좌제]] 때문이었다.[* 사법시험 합격 점수도 높았고 연수원 성적도 좋았지만, 연좌제로 신원조회에 걸려 검사임용에 탈락하였다. 아버지가 광복 이후 민청 면 선전부장을 지냈고, [[6.25 전쟁]] 당시 좌익에 가담해 부역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께서 초등학교 4학년 때 이미 돌아가신 데다 부역 정도도 가벼워 손을 쓰면 구제는 될 것이라고 했지만, 검사 세계에서 그 정도 흠이라면 인사상 불이익은 물론 공직생활 내내 불필요한 꼬리표를 달고 다닐 것이라서 결국은 포기하였다.] 그래서 1973년 사법연수원 수료 뒤에는 [[변호사]] 개업을 택했다. 그해 5월에는 평생의 반려자인 이신자를 만나 결혼했다.[* 당시 숭의여고 음악교사였다.] 그러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퇴근 후에는 TV를 보며 소일했다. 고심 끝에 그해 9월, 고대법대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했고, 2년여의 학업 끝에 1976년 2월 석사과정[* 석사 학위 논문 : [[http://www.riss.kr/link?id=T153274|刑法秩序에 있어서 人間의 尊嚴]]]을 끝냈으며, 그해 3월 내친 김에 박사과정에 등록했다. 박사과정에 입문한지 두 달이 채 못되었을 때, [[김형배(교수)|김형배]] 교수가 [[서독]] 정부에서 장학생을 모집한다고 귀띔했다. [[아데나워]] 장학재단에서 한국 학생 2,3명을 뽑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데나워재단이 인문 과학 예술 등 모든 학문을 총망라해 유망한 한국학생을 선발, 3년간 생활비와 장학금을 지급한다고 공고했다고 한다.] 김형배 교수는 “현실에 안주해 2∼3년 더 변호사 생활을 하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이라며 유학을 적극 권유했다. 그때부터 남산 근처 독일문화원의 ‘괴테 인스티튜트’에서 초급반부터 다녔다.[* 당시 '괴테 인스티튜트'는 초급반의 경우 선착순으로 수강생을 뽑았다. 그래서 초급반에 등록하기 위해 접수 시작 전날 괴테인스티튜트 인근 여인숙에 묵었고, 다음날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남산 골목길을 뛰어올라 괴테 인스티튜트 정문 앞에서 기다려 초급반 등록접수를 하였다. 접수번호는 1번이었다.] 그리고 같은 교회 집사님 남편인 경희대 독어과 교수에게서 특별과외도 받았다. 그 덕에 장학생 선발시험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장학생 선발시험 면접일에 예상질문을 외웠으며, 살아온 과정, 장래 희망, 유학목적 등을 수백번이나 독일어로 암송했다고 한다. 면접일을 하루 앞둔 일요일, 대전에서 셋째 처제의 결혼식이 열렸으나 참석지 않았을 정도로 장학생 선발시험에 집중했다고 한다.] "1977년 9월에 출국"이라는 통보를 받자, 1976년 12월 31일, 변호사 사무실을 닫았다. 사무실을 정리한 뒤 학원과 집을 시계추처럼 오가며 독일어 학습에 매달렸다.[* 출국 직전까지 새벽 오후 저녁반 강의를 들으며 하루 내내 학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리고 드디어 1977년 9월, [[서독]]으로 출국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