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일수 (문단 편집) === 고시생 시절 === 4년 간의 장학금 지급을 약속받은 후, [[고려대학교/학부/법과대학|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다니면서 공부벌레로 불릴 정도로 학업에 매달렸다. 그 시절 일부 대학생들은 ‘하이칼라’ 머리에 포마드를 바르고 다녔지만 머리를 삭발에 가깝게 짧게 깎았으며, 그 흔한 구두도 신지 않고 고무신을 신었다. 대학 4년 내내 아침부터 저녁까지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고, 입학 후 반년 정도 지났을 때부터 즐겨앉던 도서관 한켠의 자리는 누구도 앉지 않는 지정석이 돼버렸을 정도였다. 대학 3학년 때 [[사법시험]] 1차 시험에 합격했고, 대학 졸업식 날이던 1969년 2월 25일에는 사법시험 2차 시험을 보았으나 불합격하였다. 1970년 2월 마지막 주에 있었던 제11회 사법시험에 다시 응시했으나, 결과는 또 낙방이었다. 그 당시 고대법대 학장이던 박재섭 교수가 “전혀 떨어지리라 생각하지 못했다”며 다시 시작하라고 다독였다. 형법 담당 남흥우 교수를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남흥우 교수 연구실에서 수험준비를 다시 하였다. 마침 1970년 5월 사법시험령이 전면 개정되어, 법조인력 부족 등을 이유로 합격자 정원제를 도입하겠다 하였다.[* 시험령 개정 전까지는 총점 평균 60점 이상,과목당 40점이 넘어야 합격할 수 있었다.] 거기에 용기를 얻어 그 해 7월에 응시한 제1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수석 합격을 기대했지만 수석은 아니었고, 7위 합격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김승규]] 전 법무부장관,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동기다.] 합격증을 받은 1970년 8월 26일은 마침 24번째 생일이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