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일성/생애 (문단 편집) == 절대 권력을 손에 쥐다 (1956~1970년대) == [youtube(xt8PZNSoKGc)] 위 영상과 같이 한반도 역사상 최강의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예를 들자면 [[이순신]]을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자기 부하보다 못한 인물로 격하시킬 수 있었을 정도다. 60년대 이후의 북한 사람들은 오로지 충성을 통해서만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던 시기였다. 비록 소련의 필요와 스탈린에 대한 충성과 아부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잡은 김일성이었지만 수십년동안 한반도와 만주에서 독립활동을 한 연안파와 국내파에 비해 정통성이 부족하였기에 김일성의 절대적 독재체제는 절대로 공짜로 이룬 것이 아니었다. 김일성의 통치 반세기사를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숙청의 연속. 수십년간이나 나라 하나를 황제처럼 통치한 것은 김일성이 결코 만만한 정치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반대파 제거를 통한 권력장악에는 정말로 능수능란했다. 북한 초기 김일성의 권력은 그다지 확고하지 못했다. 김일성이 최고 지도자이긴 했지만 그의 [[만주]][[빨치산]] [[파벌]]([[갑산파]])[* 그나마 [[갑산파 숙청 사건|갑산파들도 김정일의 승계 과정에서 숙청된다.]] 지금 남은건 이른바 '백두파'라 하는데 한마디로 그냥 김씨 가문의 아첨꾼들이다.]은 [[허가이]]의 소련파, [[김무정]]과 박일우의 [[연안파]], [[박헌영]]과 [[리승엽]]의 [[남로당]]파 등 수많은 파벌의 견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김일성이 오늘내일 하는 수준이였다고 보면 곤란하다. 정당성이 어찌되었든 제일 힘 쎈 놈이 짱이라고, 김일성은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어 마냥 무시할수는 없는 존재였다. 박헌영만 해도 본인의 실질적 기반은 죄다 남쪽에 남겨진 채로 자기 몸만 북쪽에 온 케이스라 불안하긴 마찬가지였고, 실제로 김일성을 찬양하는 시를 쓴 적도 있을 정도였다.][* 정치학자 서동만은 다양한 정파가 공존하고 있던 1950년대의 북한을 지금의 북한과 다른 모습이 될 수 있었을 가능성이 존재한 시기로 보았다. (서동만, 1950년대 북한의 정치갈등과 이데올로기 상황) ] 한국전쟁 당시 인천 상륙작전 이후의 군사적 대참사로 평양의 통치체제 자체가 붕괴되었는데, 김일성은 패배의 책임을 '''반대파에게 모조리 뒤집어씌워''' 버리면서 정치적 위기를 탈출했다. 연안파의 리더 [[김무정]]은 평양 함락 당시 김일성이 '''반 강제로'''(…) 평양 수비를 명령했는데, 정작 평양이 함락되자 '''평양 함락의 책임을 지고'''(…) 지위를 박탈당했다. 북한 초기 김일성과의 명목상의 공동정권을 구성할 정도로 위세를 자랑했던 [[박헌영]]은 남한 내부 호응의 부진에 책임을 지고 제거되었다. 사실 이건 박헌영도 할 말이 없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 박헌영은 전쟁 전에 "전쟁이 일어나면 남조선 인민 20만 명이 호응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뭐 광복 초기에는 한국전쟁 이후에 비해 남한이 좌파적 성향이 깊었고 북한이 우파적 성향이 강했었는데 이건 당시 [[평양시|평양]]의 별명이 '동양의 예루살렘'일 정도로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우파의 입김이 셌던 까닭도 있다. 반면 남한의 [[대구광역시|대구]]는 '동양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좌파적 성향이 깊었는데 현재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참으로 얄궂은 역사. 물론 이것도 얼마 못 가 여순 사건으로 남쪽이 다 숙청됐다. 전쟁 이후에는 1956년의 [[8월 종파사건]]과 1958년의 "최창익 그룹 국가전복음모" 사건을 통해 연안파와 소련파를 궤멸시켰다. 당시 300명의 장성 중 숙청당하지 않은 사람은 김일성의 최측근 15명, 그리고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한 연안파와 소련파 장교들 몇 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전해진다. 거기다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승계하는 과정에서 갑산파들도 다 숙청시켰다. 한국전쟁 직후의 군사적 열세에서 불구하고 두 동맹국이 후원하는 두 파벌을 기어코 제거했다는 것만으로도 김일성의 정치적 수완(혹은 독재에의 집착)을 볼 수 있다. 이렇게 1950년대 중후반 사이 주변의 정치 파벌을 제거하고, 한국전쟁 이후 가난으로 좋지 않았던 민심도 주민 사이에 스파이를 심고, 밀고할수록 후한 대가를 줌으로써 억누를 수 있었다. 1958년 소련으로 탈북한 김책군관학교 교장 출신 소련파였던 장학봉이 2005년 언급한 바에 따르면, "전쟁이후 주민생활 형편이 점점 악화되었는데 극빈하게 되면서 한민족을 갈라서 종파를 가르고, 연안파니 소련파니 하면서 딴 민족, 적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생활은 점차 구차하게 되고 일반백성들은 정책이 옳지 않다고 불만을 표출하였다. 불만을 토로하다가 당시에 붙잡혀 들어간 사람이 많다."고 할 정도로 김일성이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고 한다. 그러나 '공개총살'이 있었다고 하며, "대학교도 못나오고 말도 못하는 어중이 떠중이를 시켜서" 사상검증과 밀고를 시켰는데 이들은 "식사당번이 저녁에 자기밥은 크게 만들고 다른 사람밥은 작게 만들었다고 하고, 식사당번 끝나고 누룽지 훔쳐왔다고 고발하기도 하였다. 고발를 많이 할수록 당과 체제에 충실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고 한다. 1958년경부터 역사를 '재해석'하고자 하는 시도가 빈번해졌으며 1960년대에 들어서는 평양을 대상으로 한 '[[려행증]]' 제도까지 생기게 된다. 김일성의 무자비함은 어찌보면 독재체제 성립 이후에 절정에 달했는데, 1960년대에는 당내의 "군사만능주의"를 비판하며(…) 평생 동지였던 [[김광협]]과 [[최광]] 등을 가차없이 숙청한다.[* 다만 최광은 김일성 통치 말기에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으로 복직해 죽을 때까지 유임했다. 물론 군 상층부에서는 그냥 늙다리 바지사장이라고 [[뒷담화]]를 깠다지만.] 이 숙청은 군부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방지하고 김일성 자신이 군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서였다고 전해진다. 여담이지만, 김광협의 몰락 이후 군을 장악한 것이 그 유명한 [[오진우]]다. 김일성이 권력이 절대적으로 강화되던 1960년대 들어 북한은 칠레의 아옌데가 감명할 정도의 제법 완비된 사회체계를 만들기도 했다.[* [[살바도르 아옌데]]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대통령이 되기 전 아옌데는 북한과 북베트남을 방문했었다. 당시 북한에서 실행되던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에 아옌데는 많이 감명받았늗데, 이는 당시 자본주의 칠레가 북한보다 높은 소득에도 불구하고 사회복지가 형편 없었다는 얘기다.] 보건부문에서는 1960년 2월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7차 회의에서 완전하고 전반적인 무상치료제를 실시하는 결정이 채택됐다. 의사담당구역제가 실시되어 모든 인민에게 담당의사가 배정되었다. 결핵예방원과 구강병예방원, 정형외과병원 등 전문병원들이 각지에 세워지고 요양소들이 확대되었다. 의료사업에서는 치료보다 예방을 중시하는 예방의학의 관점이 중시된 것으로 확인된다.[* 김성보,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창비, 2004, p.194~195] 특히 교육 부문에서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고 한다. 1967년부터 9년제 기술 의무교육이 전반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이 의무교육을 받은 학생 수는 1970년에 320만에 이르렀으며, 졸업생 수는 10만여 명에 달했다. 고등교육 체계도 강화되어 1970년에 129개의 대학과 약 500개의 고등기술하교에서 20만여 명의 학생들이 공부하게 되었다. 모든 군에 한 개 이상의 고등기술학교 또는 고등학교가 세워지고, 주요 공장지구에는 공장고등기술학교와 공장대학이 운영되었다. 그리고 각 도마다 농업대학과 의학대학, 사범대학, 교양원대학, 공산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들이 운영됐다. 보육시설도 늘어났으며, 1970년에는 탁아소 8,600개, 유치원 6,800개에 이르렀다. 1966년에서 1970년사이에 탁아소에서 보육을 받은 어린이는 87만 7,000명에서 120만여 명으로, 유치원생 수는 79만여 명에서 95만여 명으로 증가했다. 국가와 사회가 부모를 대신하여 어린이 보육의 책임을 지게 된 것이다. [* 김성보,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웅진씽크빅), 2004, p.194~195] 또한 1960년대 북한 산업 능력은 남한에 비해 선철 생산능력은 90배, 강철 생산능력은 13배, 비료 생산능력은 9배, 시멘트 생산능력은 5배에 이르렀고, 자동차 공업도 남한보다 먼저 시작했다.[* 이재승, 북한을 움직이는 테크노크라트, 도서출판 일빛, 1998, p.21~22] 일단 무상의료는 탈북민도 증언할 정도로 체제선전 수단이 되었고, 한국에서 의료보험을 도입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자신의 기반이 온전하지 못하여 1945년부터 신경썼고, 사실 1980년에도 인민보건법을 통해 의료 체계의 완성을 선언하기도 했다. [[마약]]이 민간요법으로 쓰여 대북지원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은 21세기에도 국가예산의 6~9%가 이에 쓰이고 있다고 한다. [[https://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79921197|#]] 그러나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영국]] 같은 나라에도 1946년부터 있는 이 제도를 자신만 하는 것으로 허위 선전하고, 호 담당구역제를 하며 또다시 감시도 겸사겸사 했다는 것이다. [[http://world.kbs.co.kr/special/northkorea/contents/news/closeup_view.htm?lang=k&No=362395|#]] 더군다나 남한보다 기대수명, 생존률이 60~70년대에도 이미 낮기도 했다. 이 시기가 오히려 북한에서 사람 수로 나눈 국부는 남한보다 많을 시기였다. [[https://zigzagworld.tistory.com/89|#]] 80년대에는 그나마 남한을 따라왔으나 90년대 이후로는 큰 격차를 보이게 된다. 교육 부문도 사상 교육 수단으로 악용되고는 하였다. 북한의 소학교에서는 수업 시간의 절반 이상이 이념 교육이었을 정도였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gounikorea&logNo=221176835247|#]] 1964년에 판소리가 자취를 감추고[[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ipa1983&logNo=163584094|#]], 음력설이 1967년 폐지되는 등 민족문화와 전통 파괴도 있었다. [[도서정리사업]]은 아예 선진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도 제대로 못 가지게 할 정도였다. 음력설은 80년대 후반 부활하지만 [[판소리]]는 지금도 부활하지 못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