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일성/생애 (문단 편집) == 해방 정국 (1945 ~ 1950) == [[김일성]]이 자신의 막대한 권력을 갖추는데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오늘날과 같은 북한의 철권적인 통치 시스템은 이 시대에 그 기반이 구축되고 반대파 숙청의 기반도 이 시대에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3>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br]-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1호 - || || 순위 || 이름 || 득표율 || || 1위 || [[여운형]] || 33% || || 2위 || [[이승만]] || 21% || || 3위 || [[김구]] || 18% || || 4위 || [[박헌영]] || 16% || || 5위 || [[이관술]] || 12% || || 6위 || '''김일성''' || 9% || || 7위 || [[최현배]] || 7% || || 8위 || [[김규식]] || 6% || || 9위 || [[서재필]] || 5% || || 10위 || [[홍남표(1889)|홍남표]] || 5% || ||<-3> {{{-2 백분율의 합이 100%를 넘는 것은 복수 응답이 있었기 때문임[[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eongpansa&logNo=222216816107&navType=by|출처]]}}} || [[파일:external/mlbpark.donga.com/1291658313.jpg]] >'''1945년 10월, 잡지사 '선구'에서 서울 시민 2000명에게 여론조사한 자료.''' 불쌍한 [[이관술]]이 누명을 쓰고 각종 역사책에서 지워져버렸는데 실제 5위는 이관술이었다. 즉 김일성보다 인기 많았던 공산당 지도자는 박헌영 뿐만 아니라 이관술도 있었다. 위 이미지와 같이 이관술을 역사에서 지우고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 김일성, 김규식만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해방 직후 좌익에 대한 지지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박헌영과 이관술이 득표가 거의 비슷한 것을 보면 박헌영 뿐만 아니라 이관술이 남한 [[조선공산당]] 중앙의 대표라고 생각하고 표가 분산된 측면이 있는데 이관술을 빼고 박헌영만 고려하면 남한 조선공산당 중앙에 대한 지지세가 반토막으로 측정된다. ||<-2>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 || 중앙인민위원 ||[[이승만]], [[여운형]], [[허헌]], [[김규식]], [[이관술]], [[김구]], [[김성수(1891)|김성수]], [[김원봉]], [[이용설]], [[홍남표(1889)|홍남표]], [[김병로]], [[신익희]], [[안재홍]], 이주상, [[조만식]], 김기갑, [[최용달]], [[리강국]], 김용암, 강진, [[이주하(1905)|이주하]], 하필원, [[김계림]], [[박낙종]], [[김태준(1905)|김태준]], 이만규, 이여성, '''김일성''', 정백, 김형선, 이정윤, 김점권, 한명찬, 유축운, [[리승엽]], [[강기덕]], 조두원, 리기석, [[김철수(독립운동가)|김철수]], 김상혁, 정태식, 정종근, 조동우, 서중석, [[박문규]], 박광희, 김세용, 강병도, 이순근, [[김무정]], 장기욱, 정진태, [[이순금]], 이상훈 || || 후보위원 ||[[최창익]], [[황태성]], 홍덕유, 이청원, [[최근우]], [[김준연]], 한빈, 양명, [[최원택]], 안기성, 정재달, 김오성, [[권오직(1906)|권오직]], 김두수, 장순명, 이광, 최성환, 이림수, [[현준혁]], 김덕영 || || 고문 ||[[오세창]], [[권동진]], [[김창숙]], 정운영, [[이시영(정치인)|이시영]], [[홍명희]], 김상은, 장도빈, 김용기, 김관식, [[리영]]{{{-2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827|출처]]}}} || 1945년 9월 11일 서울에서 발표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명단은 다음과 같다. 앞에 있는 숫자가 서열이다. 김일성은 일제강점기에도 조선공산당 활동을 한 적 없고 광복 후 저 명단 발표 때도 외국에 있었고 앞으로도 조선공산당 중앙이 있는 서울에서 활동할 일 없고 평양에서도 아직 권력을 장악하기 전인데 박헌영 계열이 소련이 김일성을 밀어준다는 등의 정보를 갖고 있어서 서열 2위에 넣은 것. ||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 || 중앙위원 || ||1.[[박헌영]], 2.'''김일성''', 3.[[이주하(1905)|이주하]], 4.박창빈, 5.[[리승엽]], 6.강진, 7.[[최용건]], 8.[[홍남표(1889)|홍남표]], 9.[[김삼룡]], 10.[[이현상]], 11.이주상, 12.[[이순금]], 13.[[김무정|무정]], 14.서중석, 15.이인동, 16.조복례, 17.[[권오직(1906)|권오직]], 18.박광희, 19.김점권, 20.허성택, 21.[[김용범(1902)|김용범]], 22.홍덕유, 23.주자복, 24.문갑송, 25.강문석, 26.[[최창익]], 27.김근, 28.[[오기섭]] || || 중앙검열위원 || ||1.[[이관술]], 2.서완석, 3.김형선, 4.[[최원택]] || 남북통합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박헌영이 김일성보다 높은 지위인 건 한눈에 보이고, 중앙검열위원 서열 1위 이관술의 지위도 중앙위원 서열 2위 김일성보다 높았다. >조공 중앙위의 구성은 시기별로 일부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김일성은 박헌영, 이관술에 이어 서열 3위로 올랐다. >---- >기광서, 「해방 후 김일성의 정치적 부상과 집권과정」, 『역사와현실』제48권, 2003, 253쪽. 광복 직후 '선구'의 설문조사에서 김일성이 군무부장 부문에 조사된 이유로 해방정국 당시 지금의 김일성이 유명세가 있었다고 [[한홍구]](성공회대교수) 등 일부 측에서 주장하고 있지만, 김일성이 처음 공개활동을 한 것은 1945년 10월 14일이다. '''이 여론 조사 자체는 사실이며, 김일성이 유명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일단 저 조사는 '군무부장'에 적합한 인물을 조사하는 것이지 '지도자'에 적합한 내용을 조사한 것이 아니다. 저 조사는 19일에 보도된 내용이며, 구체적으로 서울에는 누가 평양에 왔는지 알려지지 않을 시기였다. [[http://egloos.zum.com/botw/v/11226761|#]][* 이 글은 김일성은 가짜라고 주장하나, 가짜는 아니다. 다만 [[보천보 전투]]에서 이름이 알려진 실체가 불명확한 김일성은 실제 김일성과 다르다는 뜻이다. 인용한 글 자체는 사실이다.] 이 사람들은 '''북한의 국가수반이 된 김일성이 아니라, 전설 속 김일성 장군을 지지한 것이다.''' 그러니까 30대 젊은이가 아닌 [[을지문덕]] 같이 나이가 있는 노련한 장군, 일본군을 물리치고 축지법을 쓴다고 알려져 있던 김일성을 지지한 것이다. 만약 그의 실제 행적을 알았다면 지지가 더 줄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처음 공개활동을 했을 때는 자신이 알던 김일성이 아니었으므로 해방 정국 초창기의 북한 주민들은 이런 조사가 있고 나서 [[김일성 가짜설]]을 믿기도 하였다. 김일성 가짜설 문서에서 보다시피 남한의 [[조선공산당]]에서도 이런 소문을 믿을 정도였다. 사실은 김일성이 소문만큼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나 아예 김일성이 가짜라고 믿었다는 뜻이다. 아래와 같은 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 [[파일:김일성해방.jpg|width=100%]] || > 하오(오후) 1시 양복차림에 가슴에는 소련군 훈장을 단 김일성이 연단에 나타나자 군중들은 운동장이 떠나갈듯이 「김일성 장군만세」를 외치며 열광했다. > 김일성은 이 자리에서 10분간 대중연설을 했는데 사실 그 연설문은 25군 정치부에서 작성하고 시인 전동혁(소련파로 군정사령부의 조선어신문 발행에 관계)이 번역한 것이었다. 이날 집회에 참석했던 나는 김일성의 인기를 보고 내심 크게 놀랐으며 그를 다시한번 쳐다보게 됐다. > 그러나 김일성의 연설이 계속되면서 군중들 사이에 「가짜 김일성」이란 쑤군거림이 들렸고 심지어 「[[로스케|로스께]] 앞잡이」라고 욕설을 하며 운동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 '''군중들의 동요는 내가 지난회에서도 언급했듯이 연단의 김일성이 자신들이 생각해 왔던 김일성 장군의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워낙 오래전부터 「김일성 장군」의 전설적 투쟁을 들어왔기 때문에 백발이 성성한 노장군 정도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나 당시 김일성은 몸도 지금처럼 건장하지 않았고 짧은머리 탓인지 33세의 실제나이보다도 더욱 어려보이는 새파란 청년모습이었다. 나는 내옆에 있던 한 여인이 『저거 아이아냐. 무슨 김일성 장군이 저래』라고 말하는 것도 직접 들었다. >---- >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6, 한국일보, 1990년 11월 7일 [[https://hankookilbo.com/News/Read/199011070056900672|#]] 서울에도 언론의 보도로 이런 주장이 퍼진 것은 1946년부터다. [[보천보 전투]] 항목에서 보듯 실제보다 전공을 부풀린 주장을 일제강점기의 혼란 속에서 믿었고 나이가 지긋한 장군이 있다는 식의 소문이 있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도 [[김형석(교육자)|김형석]] 씨처럼 그 현장에 있던 실향민은 '김성주'라는 인물이 김일성을 참칭한 것으로 믿고 있다. 다만 김형석 씨는 그가 어떤 항일운동까지는 했다고 여긴다. 물론 김일성 가짜설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김일성 가짜설은 학계에서 논파당했다. 아래의 인용문은 연세대학교 김성보 교수의 주장이다. > 오늘날 수많은 관련 문헌 자료가 공개되어 더 이상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항일운동에 참여한 적이 없다는 [[김일성 가짜설|가짜설]]은 설 땅을 잃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와 함께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은 북한의 주장대로 독자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지도 아래 있었다는 것도 이미 20여 년 전에 밝혀졌다.[* 즉 김일성이 지휘한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것이 독자적인 조직이 아닌, 중국 공산당 휘하에 있던 부대라는 얘기다.] 김일성 가짜설이나 김일성의 독자적 항일무장투쟁설 모두 남북대립의 조건 속에서 정치논리에 의해 왜곡되거나 신화화된 주장임이 객관적 사실 확인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일단 드러난 객관적 사실은 북한의 역사서술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자료들이 풍부히 공개된 뒤에 작성된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보면, 김일성 스스로 자신이 동북항일연군 소속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오늘날 역사학계의 논의는 김일성의 항일운동 여부 자체가 아니라, 동북항일연군 소속 한인들이 펼친 활동을 한국의 민족운동사 전체의 흐름 속에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의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다. >---- > 김성보, 북한의 역사 1: 건국과 인민민주주의의 경험 1945~1960, 역사비평사, 2011, p.35~36 이 당시에는 남한에서도 좌파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지는 않던 시절이라[* 오히려 김일성이 자리 잡은 [[평안도]] 같은 곳이 우파 색이 강했다. 좌파 색이 강한 곳은 [[경상도]]였다. 다만 나중에 김일성은 1955년 자신의 [[토지개혁]]에 대한 북한 내 반발을 두고 사회주의가 나쁘다고 주장한 제국주의자의 악선전 때문이라고 변명했으나 사회주의적으로 토지개혁을 하지 않았으면서 너무 폭력적으로 땅을 빼앗으려고 들기에 주민들이 싫어했던 것이다.] 여론조사에서 우파에 근접할 정도로 좌파도 인식이 좋기도 하였다. 물론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과 신탁통치 찬성으로 공산당에 대한 지지도가 급락했고, 이는 6.25 전쟁 당시 북한이 남한에서 승기를 잡지 못하고 나중에 박헌영이 숙청되는 데에 이르는 계기가 되지만 아무튼 당시에는 그랬다는 얘기이다. '''지도자로써의 지지는 전설속의 [[김일성]]과 비교해도 [[박헌영]]에 대한 지지가 더 높았다'''는 것을 이 설문조사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혁명가로써도 [[박헌영]]이 같은 조사에서 더 지지 여론이 높았다. 왜 박헌영이 권력투쟁에서 밀렸는가 하면, 소련과의 친밀도가 소련 밑에서 군복무를 한 김일성에 밀렸기 때문이다. 이는 아래에서 설명한다. 1945년 9월 19일 김일성은 제88국제여단 조선공작단의 일원으로 [[원산시|원산]]을 통해 귀국한다. [[평양]]에 입성한 김일성은 평양시 경무사령부 부사령관에 임명된다.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소련은 대일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따라 8월 9일부터 소련군은 한반도로 진격하게 됐고, 치스차코프 대장이 지휘하는 소련군 제25군은 소련 극동태평양 함대와 연합작전을 펼쳐 8월 11일부터 20일까지 웅기와 나진, 청진 그리고 나남을 점령했다. 해방 이후 6일 뒤인 8월 21일 소련군 상륙 부대는 군항 원산을 점령했고, 8월 24일과 25일 소련의 공수부대들은 산업 중심지인 함흥과 평양에 낙하산으로 투하되어 일본군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다. 치스차코프 휘하 제25군의 일부는 일본군과 헌병대 그리고 경찰을 무장해제시키면서 계속 남쪽으로 진격하여 개성에 도달했고, 38도선에 해당되는 지역까지 진격하여 38도선 이북의 전 지역을 접수했다. 이에 따라 소련군이 서울까지 진입할 것이라는 소문이 한반도 이남까지 확산되기도 했었다. 어쨌든 소련군의 북한지역 접수는 이렇게 마무리 됐다. 김일성이 귀국해서 처음 한 교시는 조선인민군 작전국장이었던 유성철 씨등에게 자신의 나이, 입국 등을 숨길 것이다. 특히 소련군 사령부를 처음 찾아서 인사 뒤에 25군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장군에게 곧바로 한 말은 자신의 부대를 해방전에 참전했다고 간주해달라는 우상화를 위한 역사 왜곡이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634493#home|#]] 도착하자마자 거짓말을 해서라도 권력을 갖고자 하는 욕심을 드러낸 것이다. 레베데프 장군은 진지한 주장이 아니라 단지 애교에 불과한 말이라고 여겼으나 훗날 실제로 가상의 부대인 [[조선인민혁명군]]을 창조해내며 자신들이 일본군을 격퇴하여 해방했다는 주장이 북한에서 이어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이런 역사왜곡은 북한에서 아이들까지 교육받는 현재 진행형이다. 오죽하면 대북방송에서 미국에 의해서도 일본이 항복한 내용을 알려줄 정도다. [[https://www.rfa.org/korean/in_focus/46187-20001206.html|#]] 김일성의 귀국에 대해선 2006년 평양출판사가 펴낸 <김일성 주석과 반일민족해방투쟁사>에선, '김일성 주석께서는 9월에야 배편으로 쏘련을 떠나시게 되였고 9월 19일 원산항에 개선하시였으며 9월 22일 오전에는 평양에 도착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조국 개선으로 민족사의 새 장이 열리게 되었다.'라고 하며, 김일성이 북한으로 귀국한 날짜와 항구를 북한도 아예 밝히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교과서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북한 주민이 배우는 것은 김일성이 일본군을 격퇴했다는 것이다. 저 서적도 '개선'을 했다고 주장한다. 60년대 이전까지는 소련의 북한 해방에 대한 주도적 역할을 인정하는 듯하다가 그 후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심해졌다. 김일성 회고록을 제외하고 80년대 이후의 문헌에 김일성이 조국해방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보는 문헌 자체가 없으며, 2005년 발간된 평양 과학백과사전출판사의 《항일무장투쟁사》 같은 전문 서적에서 135페이지가 김일성이 웅기에 상륙하고 배후에서 반란이 일어나 일본군을 물리쳤다는 내용에 소련군에 대한 언급 자체가 단 한 줄이다. [[https://repo.kinu.or.kr/bitstream/2015.oak/7888/1/0000786733.pdf|pdf]] [[한국의 역사왜곡]]에서도 공교육이 잘못되고 그 밖에서 제대로 된 주장도 나온다고 한국의 역사왜곡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듯, 김일성의 행적에 대해 서술한 북한의 서적 중 비교적 사실에 가까운 내용도 있고, 허황된 내용도 섞여 있는데 북한 일반인이 배우는 내용을 무시하고 가장 정상적인 것만 주장하는 것은 심한 김일성에 대한 미화다. 김일성은 '''38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군에게 철저하게 숙이고 아부하는 쇼와, 자신의 무력을 갖추는 행위를 통해서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김일성과 어울리던 빨치산 출신들은 [[오진우]]가 평양시 보안서장, [[최용건]]은 임시인민위 보안국장 등 주로 치안책임자로 임명되고 일부는 김일성의 호위병으로 남았다. 이런 식으로 김일성은 '''심복들을 소련인의 눈과 귀 역할을 하는 통역'''으로 박아놓고 한편으로 '''치안조직을 장악'''함으로써 권력도전에서 쉽게 경쟁자들을 제칠 수 있었다. 그는 중요한 책임자 자리에 심복을 배치하지 못할 때에는 부책임자로라도 심어 놓았다. 소련은 [[조만식]], [[박헌영]] 등의 인물을 김일성보다 먼저 북한의 지도자로 고려하였다. 그러나 이런 인물들은 소련에 따르지 않거나 사회주의에 충실하지 않은 인물이었기에, 마침 소련파보다도 더 소련군의 라인을 열심히 타려고 들던 김일성이 눈에 든 것이다. 자신의 88여단 시절 심복 중 하나인 이동화를 동원해서 평양 [[기생]]과 함께하는 술자리를 치스차코프, 슈티코프, 레베데프 같은 38선 이북 진주 소련군 중 최고위 인물과 함께하며 아부를 떨면서 자신이 지도자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https://hankookilbo.com/News/Read/199011070056900672|#]] 한국 사정을 잘 모르는 소련에서는 처음에는 김일성 우상화에 도움을 주는 등 자신의 무덤을 파는 행위를 김일성에게 속아서 하고, 그의 철권통치를 위한 토지개혁 같은 정책을 그 심각성을 모른 채 방관하기에 이르렀다. 9월 말 김일성은 [[삼팔선]] 이북에 새로운 공산당 지도 조직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9월 11일 [[박헌영]]이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북한 지역의 지방 조직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이 문제에 대해 [[소련군정]]과 교감한 후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의 주류였던 국내파는 1국1당 원칙에 어긋난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10월 초 김일성은 한발 물러서 서울의 조선공산당 산하에 이북 5개 도당을 총괄하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설치하자는 수정안을 내놓았다. 그럼에도 국내파의 반발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박헌영]] 역시 자신의 입지를 흔들 수 있는 변화에 부정적이었다. 10월 8일 김일성은 [[개성시]] 인근에서 박헌영과 북조선분국 설치를 두고 담판을 맺었다. 소련군은 이 자리에 민정사령관 로마넨코를 배석하여 김일성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이때 소련군은 이미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둘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실제 소련군은 주둔후 지역에 있는 치안조직을 모조리 해산한 뒤 보안대를 편성하고 김일성이 수장인 조직 휘하에 두었으며, 김일성과 반대되는 옌안파 세력인 조선의용군이 입북하려하자 이를 막았다.][* 이상우,'북한 40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특성과 변천',을유문화사,1990,pp349-350] 박헌영도 고집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은 10월 10일부터 10월 13일까지 '북부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를 개최했다.[* [[조선로동당]] 창건일의 유래다.] 김일성이 평양의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대회 석상이었다. 훗날 '김일성 장군 조국개선 평양시 환영대회' 또는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 시민대회'로 불리는 이 대회에는 7만여 명의 군중이 참가했다. 김일성은 이 날 「모든 힘을 새 민주조선 건설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는데, 이것이 바로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라는 구호가 나온 연설이었다. 즉 전 민족이 건국 사업에 참여하여 민주주의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 이 대회는 김일성 가짜설을 만들어낸 시초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김일성이 일반인의 예상과는 달리 너무 젊어 보여서였다.[* 김성보, 북한의 역사 1: 건국과 인민민주주의의 경험 1945~1960, 역사비평사, 2011, p.35] 얼마 후 북조선분국 중앙집행위원회가 열려 책임비서로 친 김일성계였던 김용범이, 제2비서로 박헌영파였던 오기섭이 선출됐다. 이후 북조선분국에서는 김일성 세력이 점점 우세해지다 1945년 말 아예 김일성을 책임비서로 선출한다. 1945년 11월에는 [[신의주 반공학생사건|신의주에서 시위]]도 있었으나 소련군의 지원을 기반으로 탱크와 비행기로 진압당했다. 이때부터 우익에 대한 숙청이 시작된다. 평양 같은 곳은 [[조만식]] 같은 우익이 먼저 세력을 자리잡았던 곳이나 소련군의 지지를 업은 김일성의 방해에 그 세력이 위축되었다. 1946년 2월 8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자 김일성은 위원장으로 선출된다. 1945년까지만 하더라도 소련군정은 군정의 얼굴마담으로 [[조만식]]을 내세웠으나 신탁통치 문제 등에서 소련의 뜻을 따르지 않자 대신 김일성을 전면에 세우기 시작했다. 3월 23일 김일성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전후하여 '20개조 정강'을 발표해 무상몰수-무상분배를 뼈대로 한 [[토지개혁]], 산업 국유화 등 '민주적인'[* 공산주의는 당시에는 직접 내세우지는 않았다.] 국가 건설을 위한 자신의 구상을 밝힌다. 이 구상에 따라 3월부터 8월까지 이른바 '민주개혁'이 진행됐다. 이 20개조 정강에는 소유물의 보장이나 종교·언론의 자유도[[https://ko.wikisource.org/wiki/20%EA%B0%9C%EC%A1%B0_%EC%A0%95%EA%B0%95|#]] 포함이 되어 있었으나 나중에 이것은 기만으로 밝혀진다. 가령 평양에 있던 관후리 성당은 되돌려 받는다는 협의가 있고 난 후 바로 다음날 그 대화를 이끌었던 [[홍용호]] 주교의 비서 강창희는 암살 당한다. [[https://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194310|#]] 홍용호 주교도 1949년 항의 차원에서 북한 정부 인사를 찾으러 가다가 체포되었고, 행방불명 된다. 토지개혁 과정에서 반대파의 가혹성에 대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빈농과 머슴 등을 농민위원장으로 임명하여 출세욕과 토지를 받았다는 물욕을 이용하며 계급의식을 조장하여 충성파로 만들었다. 이들의 수하가 잔혹한 행위도 할 수 있었던 건 이런 눈 앞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어서 가능했던 면이 있다. 공산주의는 생산수단의 개인 소유를 반대하므로 지지를 위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심지어 토지개혁을 통해 ''''우리나라의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의 길을 열고'''' 공업 등을 발전시킨다는 공산주의자가 하기 힘든 해괴한 선전까지 공산당에서 했었다. 지난날에 노동자가 장시간 노동으로 혹사당했다는 선전[* 정작 8시간 노동제도를 도입하고 나서는, 훗날 다른 8시간은 노동이 아니고 '사상교육'으로 주장하여 더 노동권을 침해하였다. [[준마처녀]] 같이 초과근무를 옹호하는 작품도 제작되었다.]을 통해 피해의식을 부추기는 것 정도로 사회주의를 흉내냈을 뿐이다. [[https://mobile.newsis.com/view.html?ar_id=NISX20200314_0000955490|#]] 이와 유사한 수법은 [[6.25 전쟁]] 때도 38선 이남에서 이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경작권은 6.25전쟁이 끝난 후 완전히 정부로 넘어가고, 반대세력을 숙청하고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무력을 이미 구축했으므로 유의미한 저항은 없었다. 남한에서도 혹하는 경우가 생겨 [[농지개혁법]]으로 이것을 어느 정도 방지하였으나 6.25전쟁 당시 머슴까지 땅을 받지는 못해 어떻게든 이들을 이용하여 소작인을 많이 부리는 지주를 찾기 힘든 대신 '반동 분자'의 땅이라도 뺏어 이들에게 넘겨주려고도 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267986#home|#]] 북한이 지주가 적어 저항이 적었다는 주장도 존재하나 큰 차이가 아니었다. 아마 양반이 적다는 말이 와전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신분은 경제력을 뒷받침하지 못했다. 오히려 남한은 농지개혁법으로 6.25전쟁 당시 땅을 대규모로 가진 사람이 적어 애를 먹은 것이다. 남한에서는 인구 70%가 농민, 농민 80%가 소작농[[https://www.joongang.co.kr/article/3275642#home|#]]이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인구 75%가 농민, 농가 72%가 소작농과 영세빈농[[https://www.joongang.co.kr/article/2697405#home|#]]이었다고 한다. '지주'의 비중은 42년말 남북한이 3.3%였으며 북한은 해방직후 4%였다는 주장도 있다. [[https://www.dailynk.com/%ED%8F%89%EC%96%91%ED%8F%AC%EC%BB%A4%EC%8A%A4-%EA%B3%BC%EA%B1%B0-%EB%B6%81%ED%95%9C%EC%9D%B4-%EC%8B%9C%ED%96%89%ED%96%88%EB%8D%98-%ED%86%A0%EC%A7%80%EA%B0%9C%ED%98%81%EA%B3%BC-%EA%B7%B8-%EC%97%B0/|#]] 김일성은 처음에는 지주가 30%는 가져가게 한다고 주장하다 준군사조직인 '농촌자위대' 등을 조직하여 세를 불린 뒤 '무상분배 무상몰수'를 주장한 것이다. [[https://www.dailynk.com/%ED%8F%89%EC%96%91%ED%8F%AC%EC%BB%A4%EC%8A%A4-%EA%B3%BC%EA%B1%B0-%EB%B6%81%ED%95%9C%EC%9D%B4-%EC%8B%9C%ED%96%89%ED%96%88%EB%8D%98-%ED%86%A0%EC%A7%80%EA%B0%9C%ED%98%81%EA%B3%BC-%EA%B7%B8-%EC%97%B0/|#]] 1947년에는 화폐개혁까지 감행했는데, 국영직장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화폐를 교환해주었는데[* [[2009년 북한의 화폐개혁|2009년에도 이런 시도를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주민들이 완강하게 저항하여 시장 같은 것이 서서히 허용되고, 국가의 탄압이 있어도 더 커져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상공업자들은 화폐를 교환해주지 않고 그냥 절반 이상의 돈을 빼앗았다. 특히 종교인들은 가진 돈의 8%만 교환하여 92%를 빼앗았다. 김일성은 '''"모리간상배(상인은 상도덕이 없다며 비하하는 표현)들만이 손해를 입었기 때문에 이들은 여기에 대하여 불평을 가지고 있습니다. …… 그리고 반동적인 장로, 목사로서 땅을 안 가졌던 자가 거의 없고 놀고먹지 않은 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도 우리에게 불평을 품고 있습니다."'''라고 하며 상인이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누명을 씌우면서 자신들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손해가 없다면서, 주민들을 이간질시키며 혜택을 몰아준 계층들에게 신분상승을 시켜주는 척하면서 이런 상황을 지지하도록 유도했다. [[https://brunch.co.kr/@minssam119/11|#]] 한국의 민주화 운동가인 [[함석헌]]은 이북은 오히려 계급대립이 적어 타 지역에 비해 갈등 요소가 적었다고 하였다. 그는 "사실 민족주의적 자유주의적인 사상은 우리의 역사적 단계에서 전체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정상적인 이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특히 계급적 대립이 심치 않았던 이북, 이북 중에서도 [[평안도]] 지방은 그렇다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거기 공산군대가 들어왔다. 권력에 대해 야심 있는 분자가 거기 달라붙었다. 이리해서 일종의 어거지 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세력을 '''소련 세력에 등을 대고 하는 비양심적인 무리'''라고 칭했다. “그건 사람이 아니”라는 쪽지가 붙은 사람들을 골라서 흡수해 가지고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가진 악감정을 불어넣어 가지고 소위 민청이니 여청이니 하는 것[* 민청은 오늘날의 [[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 약칭 '청년동맹'이고, 여청은 '여맹', 즉 '조선사회주의녀성동맹'이다. 북한 사람들은 지금도 이런 조직에 강제로 가입당해 조직생활의 일환으로 통제를 받아야 한다.]을 조직해서 평지풍파로 없는 계급적 감정을 일부러 만들어서 간데마다 사회를 파괴시켰다고 한다. [[http://ssialsori.net/bbs/board.php?bo_table=0205&wr_id=108|#]] 아울러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른 임시정부 수립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김일성과 소련은 남북 동수로 내각을 구성하고 저변의 지지를 얻고 있는 [[조선공산당]]이 남한 몫의 반을 가져올 수 있다면 공산주의 세력이 임시정부의 3/4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를 위해 [[여운형]]을 평양으로 소환해 [[좌우 합작 운동]] 중단을 종용하기도 했다. 소련과 그 대리자 김일성은 남한 정치에 깊게 관여했는데, 다음과 같이 여운형의 [[남로당]], [[근로인민당]] 창당에도 관여했다. 해방정국 시기는 강경 우익인 김구도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원한다며 김일성과 [[남북연석회의]]를 하는 시대이다. >“우리는 남조선에서 귀하와 박헌영, 백남운 및 기타 저명한 정치인들의 지도하에 좌익 정당들의 합당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에게 유리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만일 이 사업이 우리에게 힘겨운 것이라면 일시적으로 중지해야 한다.” > >김일성의 이 발언은 여운형의 아픈 곳을 건드렸습니다. 여운형은 의자에서 일어나 방 안을 돌며 한참 만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합당이 우리에게 힘겨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을 로동당으로 합당할 것이다. 남조선으로 돌아가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을 완수해 낼 것이다. 나는 로동당의 지도자가 될 것이고 우리 당은 남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당이 될 것이다. 나는 미국인들이 나를 체포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를 체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9월 총파업의 지도자를 체포하려 한 결과를 보고 있다.” >---- >로마넨꼬가 스티코프에게 보낸 편지 중[[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fs&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fs_010r_0010_0050_0010&position=-1|#]](남로당 창당 과정) >김일성이 입법기관 참여에 대해 반대하자 여운형은 한 발짝 물러섰다. 그(여운형)는 "미국에 미소를 지으면서 다른 한편 그들을 치는 화전양면 전술을 당의 노선으로 채택해야 한다"며 북로당이 반대하면 입법기관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당신이 좌익들로 하여금 입법의원에 참가하지 않도록 충고한다면 나는 거기에 들어가지 않겠다. 서울로 돌아가서 남로당 창당을 위해 일하겠다. 만일 미국인들이 합법적으로 남로당을 창립할 가능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거의 당명 아래서 그것을 만들 것이다. 나는 그것을 근로인민당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남과 북의 통일이 이루어졌을 때 전당대회에서 당의 이름을 정하면 될 것이다." 이후 두 사람(여운형과 김일성)은 소련의 세계정책과 조선문제 해결과정에서의 역할 등에 논의했다. 두 사람은 "조선은 소련의 원조 하에서만이 독립을 얻을 수 있다"고 합의했다. >---- ><로마넨코의 보고서> (인용은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p197의 번역임.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fs&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fs_010r_0010_0050_0010&position=-1|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번역]]) >김일성은 백남운에게 사로당에서 탈당한 뒤 남로당으로부터 배척당한 사람들이 여운형을 중심으로 재집결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를 이미 했었다. 김일성은 여운형에게 백남운과 공산당 대회파 출신의 이영, 나아가 장건상같은 중도세력까지를 결집시키는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로당 지도부는 여운형에게 사회노동당을 완전히 해체한 바탕 위에서 몽양이 나서서 보다 대중적인 정당을 결성해야 한다고 설득했던 것이다. 북로당은 여운형에게 공산당 대회파 출신들 가운데 종파분자들을 새 당의 중앙간부로 뽑아서는 안 된다고 주문하기도 했다. 당 강령에 대해서는 이전의 인민당•신민당 강령의 수준이면 될 것 같다는 의견교환도 있었다. 북로당 지도부는 특히 몽양에게 사로당의 공식 해체과정을 밟는데 힘써달라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 몽양도 이 점에 대해서는 분명히 약속을 하였다. >---- >여운형은 사로당 출신들 가운데 남로당에 입당하지 않은 사람들을 결집시켜 2월 26일에 근로인민당 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인민당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공산당 대회파 출신들을 당에 끌어들이는 게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서는 북로당이 개입하게 됐던 것이다. >---- >박병엽 구술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p226~236(근로인민당 창당 과정) 1946년 4월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그 명칭을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한다. 박헌영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의미했다. 이와 함께 김일성은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북조선민전)을 조직해 각 사회단체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그 해 8월에는 [[김두봉]]이 이끄는 조선신민당을 흡수해 북조선로동당을 창당한다. 11월 3일에는 인민위원회 선거가 실시됐다. 북조선민전이 추천한 단일후보에 대한 찬반투표였다. 소련군정은 인민위원이 다시 대의원을 뽑아 북한의 최고집행기관인 북조선인민회의를 구성하도록 했다. 2월 21일 김일성은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은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라는 명목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북한 주민을 기만하면서 갑부들을 숙청하는 [[사법살인]]을 마구 남발했고 그 재산을 갈취해댔다. 집권 초기에는 아예 사회주의라는 말도 안 쓰고 숙청에 전념하였다. 이 때문에 북한의 토호들은 죄다 남쪽으로 도망쳤고 이렇게 도망친 사람들 중에서 모여서 만든 학교가 오늘날의 [[대광고등학교]]이다. 이에 북한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그가 통치했던 북한을 도저히 살지 못할 곳으로 묘사한다. 해방 다음 해부터 너무 많이 가져가 기근이 닥쳤다. 평안북도 용천에서는 김일성 장군을 죽만 먹이는 '죽장군'이라고 부르기도[[http://www.kyeongin.com/main/view.php?key=20170409010002933|#]] 하였고, 평양에서 2년간 살던 [[김형석(교육자)|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우리와 같으면 되고, 우리와 다르면 안 되는 세상이었다. 거기에는 큰 소리로 웃는 사람은 있어도, 미소를 짓는 사람은 없었다."는 사회로 묘사한다. 그는 "솔직히 일제강점기 같으면 내가 북한의 고향에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회활동을 안 하면 됩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치하에서는 살지를 못해요. ‘대학까지 나온 저놈이 산속에서 조용히 사는데 수상하다’, 그러면 다 잡아다 (사상) 교육을 시키든지 해요."라고 언급했다. 이미 이때부터 탈북을 하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도 했다.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70821/85904875/1|#]][[https://www.joongang.co.kr/article/23970088#home|#]]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은 기회를 잃은 북한은 권력욕에 찌든 사람들이 김일성이 소련에 아부하여 얻은 권력을 만끽하고 아랫 사람들을 옥죄어 잇속을 챙기는 흉흉한 사회가 된 것이다. 1946년 5월, 김일성과 소련 점령군이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배격하고 김일성 빨치산 부대를 중심으로 한반도의 공산혁명을 추진함으로써 많은 잘못이 저질러지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박헌영이 보냈다. 특히 '김일성의 무력통일 노선으로는 남한 혁명을 달성할 수 없으며 평화적 방법으로 남한 정국을 이끌어야 한다'는 의견을 스탈린에게 제시했다. 그러나 1946년 7월 [[박헌영]]을 제치고 스탈린과의 면접을 통해 북한의 지도자로 다시금 확정된다. 1948년 9월 9일에는 [[북한]]의 내각 수상으로 공식 취임하였다. 소련군 레베데프 장군의 증언에 따르면, 스탈린이 김일성을 재신임한 것은 그가 소련군에 소속한 경력이 있다는 점, 소련의 명령을 잘 이행했다는 점, 항일영웅으로서 38선 이북에서 지명도가 높다는 점[* 비록 과장된 소문에 의해 지명도가 높아 김일성이 가짜라고 믿는 사람마저 존재했지만, 어쨌든 그를 항일영웅으로 만들 수는 있었다.], 학식과 이론은 약하지만 소질과 신념이 강하다는 점 등 때문이었다. 한편, 박헌영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그가 이론적으로는 풍부했지만 스탈린이 싫어하는 국제 공산주의 조직인 코민테른에 관여한 경력이 있고, 3차례나 투옥됐기 때문에 일본과 모종의 연관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38선 이북에서는 김일성보다 덜 알려졌다는 점 등 때문이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이는 스탈린의 시각이고 스티코프 대장이 소련은 미·소 공동위원회(미소공위)와 함께 신탁통치를 협의할 남북 전역의 임시정부 "수상에 여운형, 부수상에 박헌영과 김규식, 내무상에 김일성"을 고려하는 방안도 고려하기도 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709801|오마이뉴스]] 그러나 공고한 권력을 얻자마자 스탈린의 기대와는 달리 등거리 외교로 소련과 중국을 괴롭혔고, 이들 말고도 빨치산파가 아닌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에 있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8월 종파 사건]] 무렵에도 특유의 고집으로 소련과 중국의 지지를 받던 반 김일성 파벌을 제거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