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일성/생애 (문단 편집) === 제88국제여단 === [[파일:FB_IMG_1474741801443.jpg]] 제88국제여단 시절 사진. 좌로부터 김일성, 계청, 최현, 안길 1937년부터 일본군이 ‘만주국치안숙청계획’을 통해 [[만주]] 지역의 병력을 늘리고 토벌작전을 실시하자 동북항일연군은 사실상 궤멸 상태에 빠진다. 김일성, [[최용건]] 등 동북항일연군 대원 중 일부는 일본군을 피해 [[프리모리예 지방|연해주]], [[하바롭스크]] 소련 영내로 이동한다. 아때 김일성이 작성해서 소련 당국에 제출한 자신의 이력서가 2019년에 국내 언론에 공개되었다.([[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1&nNewsNumb=002551100001|단독, 김일성 소련 ‘붉은군대’ 이력서 단독입수]]) 1940년 훙치허 전투 이후 김일성의 유격대는 대략 340명의 규모로 늘어났고, 최현, 최춘국, 김동규, 안길 등과 함께 긴밀히 활동했다. 일본군의 노조에 소장이 이끄는 토벌대를 피해 그해 8월부터는 소부대 작전으로 이행하게 됐다.[* 서대숙,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청계연구소, 1988, p.35] 그해 10월부터는 소그룹으로 나누어 국경을 건넜다. 김일성과 그의 일행들은 만주의 훈춘을 떠나 10월 23일 소련으로 들어갔으며, 동행한 조선인 대원으로는 전문섭, 강위룡, 최인덕, 이두익, 김정숙 등이 있다. 김정일이 어머니인 김정숙이 김일성과 결혼한 시점도 바로 이때였다.[* 와다 하루끼, 남기정(역),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창비, 2014, p.37] 그리고 이 시점에 김일성은 첫 아내 김정숙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김정일이다. 1940년 12월하순부터 1941년 1월상순까지 항일연군 각 부대 지도자들은 하바롭스크에서 연석회의를 가졌다. 이것이 제2차 하바롭스크회의며, 회의에는 주보중, 최용건, 계청, 왕효명, 시세영, 김책, 김일성, 서철, 리조린, 풍중운, 안길 등 11명이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전 만주를 통일집중적으로 영도하는 기관은 각 성의 대표에 의하여 선거된 전 만주 임시위원회이며 전 만주 임시위원회는 잠시 3명으로 한정하고 대회는 서기 1명을 직접 선가한다."는 것과 전 만주 당위 임시영도기관을 잠시 하바롭스크에 설치한다는데 대한 그리고 "통일적최고군사령도기관인 총사령부를 구성할데 대한"의안을 내놓고 토의결정했다. [* 최성춘, 연변인민항일투쟁사, 민족출판사, 1999, p.379] 소련으로 간 항일부대들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고 관히하는데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 소련 원동경내에 남북 2개의 임시주둔지를 마련하고 소련 경내로 들어간 부대들을 각기 그 2개 주둔지에 집중시켰다. 이 2개 주둔지를 습관적으로 북야영, 남야영이라고 불렀으며, 하바롭스크회의정신에 근거하여 각 항일부대는 1940년 10월 말 11월초부터 선후로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간 것으로 확인된다.[* 최성춘, 연변인민항일투쟁사, 민족출판사, 1999, p.380] 1941년 소련은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었고, 이에 따라 소련으로 피신한 동북항일연군 잔존세력들은 항일무장투쟁을 다시 만주로 들어가 전개하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소만 국경지대에서 사실상 야영하면서 세월을 보낸 것. 그러나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고, 소련은 본격적으로 반파시즘 전쟁을 치르게 됐다. 그리고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소련 또한 대일전에 대해 고려하게 됐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 이후 소련은 항일무장투쟁 세력들을 자신들의 군대로 편입했는데, 그것이 바로 88 국제여단이다. 1942년 소련 극동군은 이들을 ‘동북항일연군교도려’로 편성하였으며 얼마 후 ‘88독립보병여단’로 정식 편성한다. 여기서 김일성은 소련군의 단기 군사 교육을 받고 주로 한국인으로 구성된 [[여단]] 1대대의 [[대대장]]에 보임된다. 이때 소련군 지도부는 김일성의 부대원들과의 오랜 동지애, 성실성, [[러시아어]] 실력 등을 눈여겨 보기 시작한다. 당시 붉은군대의 평가에 따르면 김일성은 지나치게 과음하는 버릇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규율을 잘 세웠으며 엄격한 군율을 적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김일성은 한편으로는 항일운동 간판만 걸어놓고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1&aid=0003767466|약탈, 납치, 살인, 방화를 자행]]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 "우리가 죽인 것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변명을 했다고 한다. 이는 소련군에 김일성이 복무하던 시절 중국인 정치위원이 고발했다는 내용이다. 이 고발은 조선인 대대는 중국 길림성에서 현지 도둑과 짜고 민중에 대한 약탈행위를 반복했으며 중국 공산당원도 살해했다는 주장이다. 이 보도는 러시아 언론이 자체적으로 자국에 보도한 것이지 서방 언론과 인터뷰한 것이 아니다.[* 주 모스크바 북한 대사관은 이런 보도에 격분하여 이를 보도한 '노보예 브례먀'라는 러시아 언론사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2022300329102006&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2-02-23&officeId=00032&pageNo=2&printNo=14325&publishType=00010|자꾸 이런 보도가 이어진다면 테러를 하겠다는 협박까지 하였다.]]] 제88특별여단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42년 8월 1일 창설됐다. 제88특별여단의 병력은 초기에 1,500명 정도로 이 중 항일연군 인사는 1,000명 정도였고, 김일성도 이중 한 사람이었다. 제88특별여단의 군사훈련은 소련 극동군의 ‘보병훈련대강’을 기초로 소련장교의 지도에 의해 행해졌으며, 총검술·실탄사격·전술진공·방수훈련·행군연습·동계 야외 노영훈련·낙하산강하훈련 등이 이루어졌다. 겨울에는 스키, 여름에는 수영 연습도 이루어졌다. 전세가 막바지로 달하던 1944년에는 소련군 장교의 숫자가 점차 줄어들었으며, 항일연군 내부의 지휘관이 훈련을 지휘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최소 1,500명 이상이나 되는 제88특별여단에는 항일연군 병사가 다수를 차지했으나, 이 중 조선인은 최소 120명에서 많게는 400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