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일성 (문단 편집) == 어록 == > '''[[강반석|어머니]]는 [[칠골교회|예배당]]에 다녔지만 [[예수]]를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믿지 않았다.]]''' >----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1권, 제 1 장 비운이 드리운 나라에서 >'''사령관님, 우리 항일 [[빨찌산]]도 해방전에 참전한 것으로 해 주십시오.''' >---- >1945년 9월 하순,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 니콜라이 레베데프 장군을 처음 만나서 한 요청. [[https://www.joongang.co.kr/article/2634493#home|#]] 이 요청은 그가 거절했지만 김일성이 권력을 얻고 난 후 김일성 자신이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끌고 한반도로 진공해 일본군을 몰아내고 북한을 해방시켰다는 황당한 [[역사왜곡]]이 이어졌다. >임금이 일제 때보다 높은 데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을 강요하여 나섰습니다.''' >---- >1945년 12월 17일, '직업 동맹에 대한 지도에 관하여' 중. [[평양]] [[사동구역|사동]]에서의 '''노동자의 동맹[[파업]]을 비난'''하며.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대항하며 키운 노동자의 저항 역량은 김일성이 [[조선직업총동맹]] 같은 단체에 노동자들을 강제로 가입시키고 통제하여 없애버렸다. >'''조국통일이란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 [[소련]]에 가서 [[스탈린]] 동지를 만나 [[조선인민군]]의 공격허가를 받아오라.''' >---- > 1950년경, 6·25 직전 평양주재 소련대사가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실린 김일성의 발언. [[https://imnews.imbc.com/replay/2000/nwdesk/article/1864339_30735.html|#]] >국제정세도 우리에게 유리합니다. 제2차세계대전후 국제반동세력은 심히 약화된 반면에 국제민주력량은 급속히 장성강화되였습니다. 특히 '''[[국공내전|작년에 중국혁명이 승리함]]'''으로써 세계의 정치적력량관계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중국혁명의 승리로 국제민주력량은 더욱 강화되였으며 국제반동세력은 심히 약화되였습니다. 중국혁명의 승리는 리승만괴뢰도당에게도 심대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지금 '''[[장개석]]도당은 리승만괴뢰도당을 도와줄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쏘련과 중국을 비롯한 세계의 수많은 나라 인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을 받고있습니다.''' >---- >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 개전 당시 김일성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비상회의에서 한 연설 《결정적인 반공격[* 국군이 1~2km 이미 침공했으니 남침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군대가 질은 좋겠지만 북침을 실행하는 국군에 비해 수가 적으니 분발하라는 등 거짓말을 늘어놓기에 바빴다.]으로 무력침범자들을 소탕하자》에서 >'''야, 이 자식아! [[6.25 전쟁|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박헌영|너]]도 책임이 있어!''' >---- >1950년 11월 7일 피난 당시 만포진에 있는 소련 대사관 파티에서 만취한 김일성이 박헌영 부수상과 전쟁에 대한 이견으로 언쟁할 때 대리석으로 된 잉크병을 박헌영에게 던지며. >우리 인민군대는 전투를 계속하면서 부득이 후퇴하지 않을 수 없다. 인민군은 마지막 피 한 방울을 다 흘릴 때까지 용감히 싸우라. >---- >10월 10일 한국군과 UN군이 파죽지세로 평양으로 진격해 오자 평양을 떠나 '''피난길'''에 오르기 전에 한 라디오 방송.[* 후에 김일성은 10월 12일 밤 평양을 비밀리에 탈출하여 덕천으로 도주했다가 일주일 후 평양이 한국군과 UN군에 의해 점령되자 강계를 임시수도로 정하고 그곳으로 숨어들었다. 나중에 중공군이 개입하고 난 뒤 12월 6일이 되어서야 평양으로 나왔다.] >[[천리마 운동|천리마 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이팝에 고기국 기와집에서 비단옷|'''인민은 쌀밥에 고깃국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겁니다''']]. >남조선 인민들은 스스로 해방 투쟁을 할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무장공비]]를 지속적으로 침투시켜서 해방구를 만들고 봉기를 시켜야 한다. > 사람이 건전한 인격을 갖추려면 다면적인 지식을 섭취해야 하지 않습니까. 학교당국은 어째서 새것을 한창 섭취해야 할 청년들에게서 세계적으로 공인된 선진사상을 연구할 권리마저 빼앗습니까. 맑스나 레닌의 저작들이 보통책방에까지 흘러나와 글을 아는 사람이면 다 읽는 판인데 유독 화성의숙에서만은 어째서 그런 책들을 못읽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1권[* 아버지의 유언마저 왜곡한 책이다. [[세기와 더불어]] 문서 참조.] 제2장 제3절 타도제국주의동맹. > 우리가 해방직후에 조선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고 떠들었다면 누가 그것을 인정하였겠는가? 인민들은 우리의 곁에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사회주의란 것은 한 이부자리를 쓰고 살며 한 가마 밥을 먹고 사는 것이라고 까지 악선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일제가 사회주의를 싫어하였고, 북한이 사후 행할 정책이 거부감이 심하리라는 예상이 있던 건 사실이나 대신 [[평안도]] 같은 지역은 자발적으로 민족자본가, 기독교 민족주의자가 있던 곳이었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52_0050_0020_0010_0020|#]] [[함경도]]는 좌파가 제법 있었으나 오기섭 같은 토착 공산주의자도 이 발언이 있고 난 후 수년 뒤 숙청된다. 더군다나 대한민국 [[제헌헌법]]에 사회주의적 요소가 있다고 [[유진오]]가 밝혔을 만큼 사회주의는 단순히 [[공산주의]]와 다른 진보적 사상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그의 정책이 너무 폭력적이기에 사람들이 꺼린 것이다.''' 실제로 북한에 살았던 사람들이 드러내던 전쟁 당시 대한민국에 대한 옹호를 목격하고 사회통제가 더 강화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지 않고, '''그때에 우리가 사회주의 구호를 들었다면 인민들은 무서워했을 것'''이며 곁에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 > “사회주의 혁명의 현단계에 있어서 당 및 국가사업의 몇가지 문제들에 대하여”(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한 결론, 1955년 4월 4일) [[https://repo.kinu.or.kr/bitstream/2015.oak/666/1/0000597245.pdf|#]] > 해방직후에 있은 일을 한가지 이야기하겠습니다. (중략) 나는 그때 청년들에게 우리가 나가는 길은 (중략) 조선식민주주의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때 군중속에서 누군가 불쑥 《장군님도 공산주의자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자신이 공산주의자라는것을 [[거짓말|숨기지 않았습니다.]][* 위에서 보듯 1955년만 해도 일본 때문에 사회주의를 내세운 것이 아니라고 변명하던 김일성이었다.]''' >---- > 1974년 12월 1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근로자》 8페이지에서 >소련을 모델로 삼는 것이 이 나라의 생활수준을 높일 수 있는지는 젼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일성은 자기 백성들을 너무 잘 먹이는 것을 경계한 것처럼 보인다. 1977년,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당시 동독 서기장.]와 만났을때 그는 '''"생활수준이 높아질수록 인민들은 사상적으로 더 나태해지고 행동은 더 산만해진다"'''[* 여기서 사상이 나태해지고 행동이 산만해진다는 것은 경제가 성장해서 국민들 삶의 질이 높아지면 국민들이 독재자에게 저항하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대한민국]]과 [[카자흐스탄]]도 경제 성장이 된 후에야 민주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는데, 한국에서 경제부장관이었던 [[김재익]]이 "경제가 성장하면 자동적으로 민주주의로 발전된다" 확신하였고 실제로 신군부에 협력했다는 비판에도 김재익의 경제정책은 한국이 신군부를 몰아내고 진정한 자유민주주의가 실현되는 토대가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당연하지만 제대로 된 국가지도자라면 '''절대 해서는 안되는 말이며,''' 김일성의 이러한 마음가짐 때문에 북한은 잊을 만하면 식량난에 시달리는 나라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것은 베른트 쉐퍼가 말했듯이 "어떤 동독 지도자 입에 올렸을 경우 무사하지 못했을" 발언이었다. 발라즈스 스잘론타이는[* 오역이다. 발라즈 샬론타이로 번역하는게 맞다.] "김일성은 일관되게 정권의 사회 통제력을 약화시키는 경제적 '조정' 보다 그렇지 않은 것을 선호했다"고 지적한다. >---- >B.R. 마이어스 저,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중에서- >우리 행성에서 핵무기가 있는 한 핵전쟁의 위협은 가셔질 수 없으며, 인류는 항시적인 핵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핵무기의 시험과 생산, 배치를 금지하고 지금 있는 핵무기들을 축감하며 나아가서 '''모든 핵무기를 완전히 없애버려야 합니다.''' >남조선에서 미국 놈들을 몰아내야 하겠는데, 그놈들은 절대로 그냥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언젠가는 미국놈들과 다시 한번 꼭 벌여야 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전쟁 준비를 다그쳐야 합니다. 동무들은 하루 빨리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 미사일|장거리 탄도 미사일]]을 [[북한의 핵개발|자체 생산할 수 있도록 적극 개발해야 합니다.]]''' --위에서는 모든 핵무기를 완전히 없애버려야 한다매-- >지금 일꾼들은 마치도 리순신([[이순신]]) 장군을 우리 시대의 영웅보다 더 나은 위대한 인물로 묘사하려 하고 있다. ‘조국해방전쟁’([[6.25 전쟁]]) 때 희생된 사람들 가운데는 리순신보다 나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우리 일꾼들은 그런 사람들이 많은데도 리순신 장군만 자꾸 내세우고 있다.[* 정작 김일성은 수년 전까지만 해도 '리순신 장군들과 같은 우리 선조들의 영예로운 업적과 용감성은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이 신성한 투쟁에서 우리의 인민군 장병들과 전체 인민들을 영웅적 위훈에로 고무 격려할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사후에는 그나마 왕이 아니라는 이유로 계급적 한계를 언급하고 외세 배격을 강조하는 하에 북한에서 연구되고 있다.] >---- >1967년, 김일성저작집에서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gounikorea&logNo=220934869735|#]] >노동자들에게 생활에 빈 짬을 주지 말라. >---- >중앙일보의 1995년 보도에서. 인민이 짬을 가지면 딴 생각을 품게 되므로 인민에게 끊임없는 사상교육을 해야 한다는 기조라고 한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3012042#home|#]] 실제로 '''자는 시간을 포함하여 8시간만 쉬고 나머지 16시간은 일하면서 사상교육 받으라'''는 내용의 저 기사에서 언급되는 사회주의로동법 제33조는 지금도 [[https://www.unilaw.go.kr/Index.do|여기서 검색하면]] 나온다. >내가 죽으면 나의 혁명동지들이 묻혀있는 [[대성산혁명렬사릉]]에 묻어달라. 그곳에서 내 옛 동지들과 함께하고 싶다. >---- >1994년, 죽음을 몇 달 앞두고 아들 [[김정일]]에게 유언처럼 남긴 당부. 그러나 김정일은 이 유언을 무시했고, 체제 선전을 위해 아버지의 시신을 [[엠버밍]]했다. >남조선 당국자들은 우리의 호의를 무시하고 민족 단합이 아닌 외세와의 야합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소위 자신들을 [[문민정부]]라 칭하지만 역대 군부독재 정권과 조금도 다를바 없습니다! [[북한의 핵개발#s-3.1|있지도 않은]] [[북한의 핵개발|핵 문제]]를 물고 늘어지며 갈등을 충돌(동)질 하는 건 미국입니다![* 웃긴 것은 그 자손들인 김일성과 김정일은 핵개발을 자신들의 '치적'이라고 자랑하듯 선전하고 있다.] >---- >1994년 생전 마지막 신년사 중. >동무들이 당의 결정을 아는가? 농사제일주의, 경공업제일주의, 무역제일주의, 세가지 제일주의인데 화학비료는 [[남흥청년화학연합기업소|남흥화학]]하고 [[흥남비료연합기업소|흥남화학]]을 생산정상화하도록 만들라. 비료만 생산정상화하라. >금년에 [[비날론]]은 계획된 대로 하고 명년에는 5만톤 만부하를 걸어야 돼. 그 다음에 [[세멘트]]를 우리가 정상화해야 돼. 세멘트를. 세멘트가 1 200만톤이란 말이야. 세멘트를. 난 세멘트를 만부하 역시 걸라는 게다. >허구 배무이(선박건조)를 많이 해야 돼. 배무이. 배무이, 그전에 내가 말한것을 백척을 맨들라(만들어라). 그 다음에는 전기를 앞세워야 돼. 내가 늘상 말하는것 같이 전력, 철도, 이거는 어떤고 하니 인민경제의 선행관(앞세워야 할 부문)이라고. >금속문제를 마저 해결해야 되겠어. 금속은 지금 어떤고 하니 우리가 구체적대책을 세워야 한다, 전기하고 금속만 풀면 우리 나라에서는 잘 살수 있다고, 우리가. >내가 이번에 [[지미 카터|카터]] 보고 회담할 때 지금 유엔에서 제재하겠다 하는데, 하려면 해라. 이때까지 우리는 제재받고 살았지 제재 안 받고 산적이 없다. 다 제재한다고 우리를. [[일본]]놈들도 제재하지, [[미국|당신들]]도 다 제재하지. 우리 제재 받고 살았다. 제재받고도 이만큼 살아나가는데, 제재하려면 더 똑똑히 해라. 우리 못살 거 뭐이가? 그랬더니 '제재 취소하겠다.' 그래. 취소 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나도 마찬가지다. 못사는가 봐라. 우린 더 잘산다. >---- >1994년 7월 6일 생전 마지막 지시 中[[https://youtu.be/L8GBat7Ecbo|#(02:13부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