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김일성 (문단 편집) == 여담 == *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金聖柱)였으나 1929년에 김일성(金日星)으로 개명하였다. [[1935년]]에는 한자 표기를 金日成으로 변경했다.[* 일제강점기에는 '金日星'으로 더 자주 표기되었다.] 북한식의 변형된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쓰면 Kim Il Sŏng이 되고 기존 매큔 - 라이샤워 표기법으로는 Kim Ilsŏng이 되겠으나, Kim Il Sung은 당사자가 쓰던 표기가 굳어진 것으로 보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어의 라틴문자 표기법]] 참고. [[한어병음]]로는 Jīn Rìchéng(진르청. 항일 투쟁 시기에 알려진 '진지첸' 등의 표기로도 알려져 있다.), [[러시아어]]로는 Ким Ир Сен(킴이르센). 소련 체류 시절에는 러시아식 이름도 있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 자신의 손자 [[김정은]]처럼 상당히 어린 나이에 일국의 지도자가 되었다. 처음 북한의 지도자가 된 시점에서는 35세였고, [[한국전쟁]]을 일으켰을땐 고작 40세였다. [[최용건]]이나 [[김두봉]] 같은 자신의 바지사장들에 비해서도 한참 어린 나이였다. 남쪽의 [[이승만]]이 한국전쟁 당시 70대였으므로, 거의 아버지와 아들의 나이차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렇게 나이가 어린 상태에서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에 후술할 [[김일성 가짜설]]이 돌기도 했다. * 김일성의 가족관계와 출신성분을 생각하면, 정말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어울리는 사람도 아니라서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래서 북한이 정말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였다면, [[백두혈통|김씨조선]]의 집안은 가장 먼저 숙청을 당해야 할 입장이었다. 물론, 북한은 지금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국가도 아니고 그 놈의 엉터리 [[주체사상]]으로 만들어진 전제군주제 국가나 다름없는데, 현재 북한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도 헌법에서 제외하고 금지시켜버린 국가라서 [[자본론]]이나 [[공산당 선언]]을 주장하면 정치범으로 숙청되어버린다. 그래서 북한이 극좌계열처럼 보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극좌성향도 아니다. 오히려 파시즘의 근원인 [[제3의 위치]]와 매우 흡사하다. 그래서, 김씨조선 집안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이론에 의하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태생부터 출신성분에서 무조건 걸러내야 하고 박멸해야 되는 타도의 대상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아래의 내용같은 [[공산주의 유머/북한|공산주의 유머]]도 있다. >''' 제목 : 당신은 [[주체사상|주체조선]]에 어울리지 않소.''' > >"동무의 집안은?" > >"[[김응우|증조부]]가 [[지주]]놈의 [[묘지기]]였소." > >"계급주의의 개였군. [[김보현(북한)|동무의 조부]]는?" > >"[[대한제국|리조시대]]에 지방관을 하댔지요." > >"[[봉건제|봉건잔재]]의 끄나풀이구만기래, [[김형직|동무의 부친]]은 무엇을 하댔소?" > >"한약방을 운영하는 의사였다오."[* 게다가 그는 좌익들에게는 진료조차 해주지 않았을 정도의 강경 반공주의자였으며,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하였다.''' 그리고 한약방 영업도 무면허로 했어서 실제로 인텔리 분자인 것도 아니다.] > >"인텔리 분자였구만. 집안에서 믿는 종교 같은 것은 있소?" > >"[[강반석|어마니]]의 성함이 [[베드로]]([[반석]])였댔소." > >"이거이거, 종교까지 믿다니! 네놈 집안은 완전히 [[반동(정치)|반동]] 놈의 집구석이구만! 이런 반동 놈! 어디 잘난 이름이나 한번 들어보자우!" >------ >'''"[[김일성]]."'''[* 사실은 소련의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도 대부분 그들이 추구하던 국가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긴 했다. [[카를 마르크스]]와 [[블라디미르 레닌]]도 실제로 19~20세기 사회주의/공산주의애서 유력한 혁명가들은 대부분 [[프롤레타리아]]와는 거리가 멀고 돈많은 [[부르주아]]-[[중산층]]같은 지식인 출신이 더 많았다. 그리고, 이런 부르주아-중산층 출신 운동가는 신념이 확고해서 진짜 프롤레타리아 출신 운동가들과 달리 변절하는 일도 적었다.] * 대략 1970년대에 [[김정일]]은 [[기쁨조]]를 만들어 김일성의 비위를 맞추고[*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설도 있으나, 아버지가 [[김성애]]와 불륜을 저지른 성격도 있고, 자신도 70년대 초에는 권력을 얻기 위해 애를 썼음을 감안하면 이쪽이 유력하다. 굳이 김일성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여 국가의 수명을 단축시킬 이유도 찾기 어렵다. 실제로 김일성이 싫어했다면 권력을 얻고 싶어한 김정일은 이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김일성이 오늘내일하던 90년대 초였다면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 위함이라는 설이 어느정도 설득력을 얻을 지 모르나 기쁨조가 처음 생긴 1975년은 아직 김일성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다.] 자기 세력을 확보하였다. 안에 행복조, 만족조, 가무조가 있는데 그 중에서 만족조는 성적으로 만족을 주는 조이다. 이것도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는다고 하는데 기쁨조를 하다가 퇴직한 사람은 고급 [[아파트]]에 들어가게 해준다. 그러나 기쁨조를 나올 때 내부에서 있었던 일을 발설하지 못하게 각서를 쓰게 한다고 한다. 김일성의 경호원을 1년 6개월 했었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기쁨조는 1975년도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처음에는 인민국협조단에서 18명 정도를 뽑았는데 [[예쁘면 모든 게 용서된다|실력보다는 예쁘기만 했으면 됐다고]] 한다. 북한에는 '음팔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음팔이가 스트립쇼를 하면 김일성이 좋아했다고 한다. 김정일이 자기 아버지에게만 [[여자]]를 안겨주기에는 부러웠는지 예술단에서 예쁜 사람들만 뽑아 김정일 주위를 빙빙 돌게 만들었다고 한다. 김일성도 살아있을 때부터 기쁨조를 신명나게 즐겼다는 이야기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똑같이 1971년 득남을 했는데 김일성은 [[김현(북한)|김현]], 김정일은 [[김정남(북한)|김정남]]을 각각 얻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진짜 [[종요]]처럼 75살에 [[김백연]]을 득녀했다. * 북한 사람들은 키가 무려 193cm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 키는 177-180cm 정도 된다.[* 키가 180 cm 에서 190cm 까지 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김구와 대비해도 아무리 원근법으로 김일성이 앞쪽에 있다고 해도 키가 비슷하거나 좀 더 클 수 도 있다. [[https://www.worldkorean.net/news/photo/202207/44780_65712_2936.jpg|김일성 김구 사진]]] 말년에는 173cm까지 줄었다. 177cm면 2022년 [[한국]] 기준으로도 평균 이상이며, 영양이 부족한 [[북한]] 기준으로는 예나 지금이나 장신이다. 더불어 1930~1950년대 기준으로는 세계 기준으로도 꽤나 큰 편이었다. 서로 비슷한 키도 아니고 아래 쪽에서 올려다보면 상대방의 키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들고 김일성은 키에 비례해 덩치도 제법 되기 때문에 키가 작은 옛날 북한 사람들이 보기에 얼핏 그렇게 보였던 것 같다. 김일성이 [[청년]]기였던 1930년대 [[한반도]]의 20대 [[남성]] 평균 신장이 163~164cm이었음을 감안[* 지역차가 큰 편이라 [[전라북도]] 지방은 161 - 162cm, [[함경북도]] 지방은 167~168cm.]하면 현재 한국 평균 키로 환산하면 188~190cm이 된다. 즉 체감상으로는 실제보다 더 크게 보였기에 저런 소문이 돌았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에 김일성과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만난 사진이 있었는데 티토와 약간의 차이가 날 정도였다. 티토의 추정 키는 대략 172cm 정도로 추측된다. * 탈북자의 증언에 의하면 김일성 같은 후덕한 얼굴이 북한 기준으로는 '''잘생긴 [[외모]]다.''' 김일성과 관련된 모든 것을 신격화하는 북한이 김일성의 외모까지 찬양한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북한에서 김일성 얼굴에 대해 남기는 찬사는 '웅장무비한' '해빛같은 미소, 친근한 음성, 자애로운 안광, 따뜻한 체취' '눈부시게 환하신 존안, 천기를 헤가를듯 한 예지로운 안광, 마디마디 따스히 스며드는 친근한 음성' '거룩하신' '조선의 성산 백두산의 기상을 지닌 천출위인의 용모' 등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다.] 의외로 젊었을 적 외모는 남한 기준으로도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긴 하다.[* 그렇게까지 잘생긴 외모는 아니지만, 적당히 남자답고 군인스러운, 카리스마 있는 외모라고 평가된다. 가수 [[한동근]]을 닮았다는 평가도 있다.] 다만 북한은 젊은 김일성의 얼굴에 대해서도 '출중한' '준수하고 환한' '수려한'은 기본에 심지어는 "얼굴은 태양이요, 몸매는 산악인 듯 근엄한데 안광에는 천 리도 순간에 뚫을 듯한 영채가 뿜어 나왔다"는 등의 심하게 과장된 평가를 남겼다.(...)[* 마찬가지로 그의 아내인 [[김정숙(북한)|김정숙]] 역시 북한에서는 절세미녀로 선전되고 있다고 한다.] 김일성 본인은 이러한 외모에 자신이 있었는지 아니면 [[카리스마]]를 과시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항상 전면에 나서는 것을 좋아했고 이는 그의 아들 김정일이 결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정치]] 기반 확립과 [[숙청]]을 감행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김정일은 언제나 [[인민복]] 차림인데 김일성은 [[정장]]을 좋아했다는 것도 특이하다. 물론 이상의 사항은 어디까지나 1947년 이후 살이 찌기 전의 이야기. 45년에 처음 북한에 들어왔을때는 마르고 날씬한 체형이었으나 2년 사이에 폭식을 했는지 급격히 비만 체형이 되었으며, 턱선이 무너졌고 결국 혹까지 생겨나고 말았다. 다만 손자 [[김정은]]처럼 당장이라도 터질듯한 초고도[[비만]]까지 찌지는 않았다. * 흔히 김정은이 살찐 것이 할아버지의 이미지를 차용하기 위해서라는 설이 알려져 있는데 2020년 기준 김정은의 비만도는 김일성이 가장 뚱뚱했던 시절보다 심각하게 더 쪄 있다. 처음에는 따라한거라고 해도 김정은의 경우는 생활 습관 자체가 잘못된 것에 가깝다. 김정일의 이복동생 [[김평일]]이 내외적으로 김일성을 닮았다고 한다. 1946년 북조선로동당 당수 취임 즈음 때까지는 날씬한 모습이 유지됐지만 1947년부터 투실투실해진 것을 보면 2년 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youtube(MMLGkBnrWyM)] || [youtube(EW9CXyxWz-w)] || [youtube(qzhhHQhle6o)] || [youtube(DOfvtyBtuQg)] || ||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 창설 기념 연설 || 1948년 4월 19일 [[남북연석회의]] 연설 || 1977년 12월 15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 회의에서 한 연설 ||1994년 1월 1일 신년사 || * 기록영화에 남은 생전 김일성의 목소리는 상당히 걸걸했다. 이는 김일성의 나이 때문만은 아니었으며, 젊은 시절에 기록된 몇 안 되는 육성 녹음을 들어 봐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손자인 [[김정은]]의 목소리와 상당히 비슷하게 들리기도 하는데, 이는 김정은이 집권 초기부터 김일성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벤치마킹]]했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에서는 이런 김일성의 목소리를 '친근한 음성'으로 선전한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위상과 김정일이 북한 내부에서 목소리 공개를 사실상 안하다시피 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어느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긴 하다.] * 1994년 [[지미 카터]]를 만나고 정확히 14일 후 김일성은 사망했는데 1994년 당시 칠순이었던 지미 카터는 28년이 지난 지금도 멀쩡히 살아있다. 참고로 '''한국 한정으로''' 지미 카터는 그가 만난 독재자들이 얼마 가지 않아서 권력을 잃거나 사망한다는 [[징크스]]가 있다고 여겨져 농담삼아 '독재자 킬러'라는 [[별명]]이 있다.[* 하지만 이 별명은 대체로 억지로 끼워맞추기에 불과하고 시기상으로 봐도 [[박정희]], 김일성, [[우고 차베스]]를 제외하면 몇 년 정도 간격이 있어 카터에게 적합한 별명은 아니고, 무엇보다 이 별명은 전술한 것처럼 오직 한국에서만 쓰이지 해외에서는 전혀 쓰이지 않는다.] 그런데 김일성의 경우 정말로 지미 카터 때문에 사망한 것이라는 진지한 분석들이 있기는 하다. 지미 카터가 주선한 북미 대화 및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다가 과로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고 이 때문에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주장들이 있다. * 자신의 성씨와 조상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전주 김씨]]로, [[6.25 전쟁]] 중에 전주 김씨 [[족보]]를 구하려고 무진 애를 쓰기도 했다. 한 [[일본]] 기자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이 전주 김씨 족보와 조상의 영정을 모셔놓고 향을 피우는 방을 따로 마련해 놓은걸 봤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이 이야기 때문에 전주에서는 전주 김씨의 시조 김태서의 묘가 전주 모악산에 있기 때문에 북한과 [[전쟁]]이 나도 [[전주시|전주]]는 안전할 거라는 이야기를 우스개소리로 하고는 하지만 정작 6.25 전쟁 개전 초기(9월)에 전주에서도 [[학살]]이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의 본가인 전주 김씨 시조는 사실 [[경주 김씨]]의 일파[* 라고 했지만 경주 김씨가 인구가 많아 그렇게 표현했을 뿐 전주 김씨가 장손(長孫) 집안이다.]인 김태서로서 그 후손 전주 김씨는 [[몽골]] 침입 당시 [[경주시|경주]]를 떠나 이주한 방계이며 한동안 전주에 있다가 [[평양시|평양]]으로 이주했다.[* 17세기경 김일성의 8대조인 김계상이 전주에서 평양으로 이주했다.] 즉 근원적인 조상은 [[신라]] 쪽으로 닿는다. 하지만 김일성의 집안이 정말 전주 김씨인지를 [[교차검증]]할 만한 자료가 마땅치 않다. 1915년 전주 김씨 대동보가 편찬되었으나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소실되었으며 김일성 일가가 살았던 평안남도 대동군 일대가 누락되었다. 따라서 문서로써 김일성 일가가 확실히 전주 김씨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으며 실제로 전주 김씨들은 김일성과 종친이라는 이유로 [[분단]] 이후 상당한 세월을 [[눈치]]보면서 살았어야만 했다. 실향민+전주 김씨 콤보인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으며 이런 이유로 모국을 떠난 [[이민]] 1세대들도 있다. 일반 북한 주민들은 계속된 [[국가]]의 통제로 인해 지금은 자신의 본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주민들이 많다고 한다.[* 1992년에야 북한에서 존재가 밝혀진 고려 태조의 먼 후손조차도 [[https://m.mk.co.kr/news/headline/view/2000/05/54788/|족보 3권 분량을 태운 사례가 있었고,]] 직계 후손이던 왕명찬조차 '봉건 왕조의 후손'이라 낙인찍힐까봐 족보 및 옥새를 숨겨왔었다.] [[파일:external/images3.wikia.nocookie.net/Kimilsungtumor.jpg]] * [[목]] 뒤에는 혹이 있었으며, [[살]]이 꽤나 쪄 있어 [[반공 애니메이션]]에서는 주로 [[돼지]]로 묘사되었다. 김씨 일가를 돼지로 묘사하는 것은 이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심지어 똘이 장군에서는 '''인간의 형상을 한 돼지'''로 등장해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는데, 김일성 본인은 이 콤플렉스를 거론하는 것을 무척이나 기분 나쁘게 여겼으며 이것에 관해 논하는 것을 금지하하였고, 만약에 논할 경우엔 [[정치범수용소/북한|정치범수용소]]로 끌고 갔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북한측에서 찍은 사진 중엔 김일성의 혹이 찍힌 경우가 매우 드물다고 한다. 1988년 북한 정권 수립 40주년 기념 행사 때 프랑스 취재진이 녹화한 [[https://imnews.imbc.com/replay/1988/nwdesk/article/1816583_29513.html|영상]]에 그의 혹이 드러난다. 20초 부근 참고.[* 프랑스 [[TF1]]에서 '붉은 왕(Le roi rouge)'이라는 이름으로 [[1988년]] [[12월 2일]]에 방영된 르포 프로그램([[https://www.dailymotion.com/video/x8d7mik|전체 영상]])의 일부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988년]] [[12월 27일]]에 [[KBS 1TV]]에서 방영된 바 있다.] 김일성의 혹은 지방종으로 추정되는데 외과 수술을 통해 조기에 절제할 수도 있었으나, 치료 시기를 놓쳤고 고령이 된 후라 수술을 하면 건강에 타격이 가기에 그냥 방치해 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사이에 혹은 더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8051500209203007&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78-05-15&officeId=00020&pageNo=3&printNo=17417&publishType=00020|커졌다.]] 정원식 전 국무총리가 남북고위급회담 차 방북했을 때, 김일성을 예방한 적이 있는데 당시 내외통신(현 [[연합뉴스]]) 기자에 의해 혹이 선명하게 찍힌 사진도 있다. [[https://img7.yna.co.kr/photo/yna/YH/2020/04/12/PYH2020041207960001300_P4.jpg|#]] * 위의 이유로 김일성에게는 목 뒤의 혹과 사실상 왕국이나 다름없는 북한의 삼대세습 정치체제를 [[로마 황제]]식으로 비꼰 '혹부리우스'라는 별명이 생겨나게 된다. 아들 김정일은 머리 모양을 따서 '뽀그리우스'. * 김일성의 전직 주치의가 <신율의 시사열차>에 출연하여 "김일성이 젊은 청년 피 뽑아 한 달에 한 번씩 피갈이를 했다."라고 증언했다. 이 피갈이의 부작용으로 목 뒤에 혹이 생겼다는 [[https://www.youtube.com/watch?v=yXTLtZU2sOQ|것이다.]] 20대 내내 김일성에게 피를 헌납한 청년들은 죽기 일보 직전인 사람과 같을 정도로 폭삭 늙었다고 전한다. 실제 나이는 20대인데 외모는 70대처럼 변했다는 것이다.[* 다만 신빙성은 높지 않은게, 김일성이 특이 혈액형이라서 소수에게 뽑았으면 모를까 수십명이라면 딱히 노화가 올 정도로 위험한 행위가 아니다. 거기다가 싱싱한 청년 피를 뽑으려고 할 텐데 70대처럼 보일때까지 착취한다는 것도 말이 안된다. 40, 50대 수준에서도 뽑았다는 말이니까. 이와 비슷하게 김일성을 존경하던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도 건강을 위해 주기적으로 어린이들의 피를 수혈받았다는 말이 있었으나 사후에 루머로 밝혀졌다.] * 빨치산 시절부터 자신을 지지해 준 [[김책]]을 존경하였다고 한다.[* 김책은 당시 북한에서 김일성에게 반말을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김일성도 김책에게는 깍듯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원래 소련이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김일성으로 내세우려던 것은 김책이었다는 [[카더라]]도 있다. 그가 죽고 나자 [[함경북도]] 성진을 '[[김책]]'으로 바꾸고 공업대학을 만들 때 그의 이름을 붙여서 '김책공업종합대학'이라고 짓기도 했다. * 해방되자마자 계속 [[T-34-85]]를 모으고 있었다. 주로 [[소련]]에게서 공여받았으며 김일성이 [[6.25 전쟁|탱크를 꾸준히 모은 이유]]는 뻔했다. 그리고 약 5년간 전차를 모은 김일성은 그 전차를 이용해 [[6.25 전쟁|3년간 한반도를 아비규환으로 만들었다.]] * 자신의 카리스마를 대중들에게 드러내는 걸 좋아한 나머지 1946년부터 1994년 사망한 해까지 육성으로 신년사를 내보냈다. 예외적으로 1966년과 1970년에는 신년사 대신 [[로동신문]] 사설로 대체했다. 반대로 비밀주의를 표방하던 김정일 때에는 신년사 없이 공동사설이 신년사를 대체하다가[* 이는 김정일이 눌변이었기에 대외적으로 육성 공개를 매우 꺼렸기 때문이다.] 2013년에 김정은이 부활시켰다. * 그의 주장이 지금까지도 정치에까지 미치는 남북한 언어에 중대한 혼란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국 교과서조차 그의 주장을 검증하지 않고 인용하는 바람에 셀 수 없이 많은 오해가 생겨났다. * 북한에서는 표준 규범인 [[문화어]]가 '수령님께서 몸소 쓰시는 영광스러운 언어'라면서 김일성이 과거에 말한 '지주놈의 상통'(면상), '자본가놈이 뒈졌다', '대가리를 돌로 까부신다'와 같은 온갖 '''각종 욕설이 난무한 막말'''도 [[문화어]]라면서 대놓고 교과서에 실어놓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라고. 그러나 타국에서는 보기 힘든 유례 없는 일인데, 아무리 [[도널드 트럼프]]나 [[로드리고 두테르테]], [[훈 센]]과 같은 정치인들이 막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북한에 비하면 상당히 양반이며 적어도 미국이나 필리핀, 캄보디아는 대놓고 교과서나 언론에서 상스러운 욕설을 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된 이유는 불분명하나, 일각에서는 1967년 김일성이 "전투적 화법을 사용하라"고 지시한 것을 시초로 보기도 한다. * 그런데 이것도 지도자의 품격에 따라 달라져서, 김정일 때는 더 심해졌다고 한다. 북한을 외부에서 대하는 입장에서는 대단히 주목을 받던 표현이지만, 김일성 일가를 찬양할 때도 당연히 '전투적 화법'을 사용할 수는 없으니 부드러움을 넘어 낯간지러운 표현도 많이 쓰인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예 이들에게 쓰이는 높임말이 구분되어 '몸소', '서거', '가르쳐주다', '사랑', '선물' 같은 표현을 이 지도자의 행동을 대상으로 주로 쓰게 하였다. * 더 심한 것은 분단 전 [[조선어학회]] 등이 욕까지도 서울 방언에 기반해 설정한 결과를 반영한 이 표준어[* 심지어 '건느다', '역스럽다' 같이 남한이 아니라 북한이 서울 방언을 표준어로 택한 사례도 있다. 평양 방언 등이 없지는 않지만 거의 손에 꼽을 정도다.]를, 아예 평양말이라면서 거짓말을 하면서 서울말은 오염되었다는 식으로 대결을 부추긴 것이다. 김일성은 평양말이란 평안도 사투리가 아니라는 빨간 것을 파란 것이라고 주장하는 궤변[* 유럽의 언어들은 옛 식민지에서 독립한 나라들도 영어, 스페인어 등 원래 유래한 지역의 이름을 따서 자신의 공용어의 이름을 붙인다. 이건 중국에서 조선족을 위한 한국어 규정을 제정하면 중국어라는 궤변이나 다름 없다. 중국도 이런 언어를 '조선어'라고 하지 김일성 같은 주장은 안 한다.]을 섞어가며 문화어에서 서울 방언에 유래한 요소가 많음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세뇌하면서 '평양문화어'라는 주장을 세뇌시켰다. 일반인의 양심으로 생각하기에는 너무 뻔뻔하고 끈질긴 거짓말이기 때문에 지금도 '평양말'이 서울말과 비슷한 것인지 등을 헷갈려하는 사람들이 한국에 많으며, 그 손자 [[김정은]]도 '평양'이라는 타이틀에 매우 집착하여 [[평양문화어보호법]]으로 일반 직책에 '님'을 붙이는 사람 등을[* 그나마 외부의 우려와는 달리 '부모님', '선생님'이라는 표현은 이 '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거의 비유적 표현이 아니고 '''[[공개처형]]'''까지 지시하며 사실상 죽음에 이르도록 하고 있다. * '''북한 당국이 자신이 남한보다 민족어를 지킨다는 것도 김일성의 거짓말이다.''' 외래어 순화의 수준은 사실 통계적으로 분석하면 남한에 가까웠지만, 여기다가 북한에서는 민족의 언어 문화를 발전시킨 사람의 공적을 숨기거나 폄하하기 때문이다. 현 북한에서의 역사교육에서 한글 창조를 [[세종대왕]]이 아니라, 김일성이 완성했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실제로 탈북민 유튜버 [[놀새나라TV]] 에서 역사시간에서 배우기를 '''[[개소리|세종대왕님이 조선글을 창조하시다 그만 눈이 멀어버렸다. 그래서 우리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가 조선글을 완성하였다.]]''' 라고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 북한에는 한글날이 조선글날이라는 이름으로 있긴 하지만, 찬밥 대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세종대왕의 눈이 멀었다는 건 의외로 진짜 역사적 사실이다. 물론 실제로는 당연히 한글을 다 완성하고 반포까지 다 한 후 그 후유증으로 말년에 시력을 거의 잃은 거지 김일성이 완성했다는 건 완전히 개소리.][* 놀새나라TV 에서도 남한에 오고나서 한글날 이라는 날이 있는걸 '''처음''' 알았다고 한다. 과거 주영북한공사를 지냈던 [[태영호]] 의원에 의하면 조선글날은 푸대접 받아서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고 한다. 전에는 달력에라도 표시 됐지만 [[김정은]] 집권 후로는 이마저 빠졌다고 한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3&aid=0003480960|관련기사]] 자세한 내용은 한글날 문서의 [[한글날#s-7|북한의 한글날]] 문단 참조.] 그런데, '''북한 사람들은 이걸 실제로 믿는다.''' [* 다만 '김일성이 한글을 완성했다'는 주장은 실제와는 약간 다르며, 실제로는 이보다 더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자세한 것은 [[우상화/북한#s-2.1.1]] 항목 참조.] * 애초에 북한은 TV가 2016년까지 지방은 [[조선중앙TV]] '''한 채널이''' 끝이었고, 평양은 약간 풀어주는 대신 더 심하게 세뇌교육을 시켜버리니 진짜로 믿는것. 다만 지역마다 배우는건 좀 다른 모양이다. 인터넷에 유출된 교과서에 따르면 세종대왕이 인민의 요구를 악용하여 한글을 창제했다고 주장한다. * 분단 전 민족 언어문화를 발전시킨 사람 중 [[김소월]] 등 한 단원 정도로 남한에서 유명한 사람의 작품[* [[김소월]]의 초혼,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 최서해의 탈출기 정도가 실려 있다.]이 2010년대 교과서에 실려 있다. 그렇지만 60년대 후반 [[도서정리사업]] 때 그의 시가 유행하고 있었는데도 '''그 시집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 북한에서 외래어도 많이 쓰인다. 영어 fund에서 유래한 '몫', '할당량' 등을 뜻하는 '폰드(뽄뜨로 아는 사람이 많다.)' 같은 남한도 안쓰는 표현이 쓰이고, 중국에서 순화해서 쓰는 텔레비전, 컴퓨터, 마우스, 미사일 같은 표현도 북한은 '텔레비죤', '콤퓨터', '마우스', '미싸일'로 부른다. 심지어 잔을 외래어로 부르면 남한은 영어에서 유래한 '컵'이라고 하지만, 북한은 일본어에서 유래한 '고뿌'를 쓴다. [[테제]]라는 단어도 남한보다 인지도가 높다. 그러나 세뇌 교육 탓에 북한에서 온 사람들은 어느 게 순우리말이고 어느 게 외래어, 한자어인지를 잘 구분 못한다. '''심지어 [[https://www.nocutnews.co.kr/news/5202763|아빠트(아파트)가 외래어인지도 모르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이것 때문에 남한에와서도 자신들이 외래어를 많이 쓴다는 것을 모르고, 남한의 새 문물을 보고서는 '''남한의 동조[* 한국 교과서에서도 김일성의 주장에 기반한 내용이 실려 있어, 남한 사람들은 북한이 어느 부분이 순우리말을 쓸 것인가만을 찾고 북한이 외래어를 쓰는 부분을 잘 다루지 않아 스스로 김일성의 모략에 말려드는 모양새를 보였다. 심지어 '얼음보숭이' 같은 가짜 북한 표준어를 북한 사전에 한 번 실린 적 있다는 이유로 아주 대중적인 북한말처럼 교육하기도 했다.]와 더불어 '남한말이 정말로 영어, 일본어에 오염되었다'며 세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런 사실을 알면 북한에서 온 사람들도 적잖이 충격을 받는다. * 따라서 [[언어순화 운동]] 관련 주제에 대해 한국 정치에 가장 큰 혼란을 불러일으킨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군정 하에서 '혼다데', '하꼬' 같은 말이 거의 잊혀질 정도로 언어순화 운동이 강력히 추진되고 박정희 정부도 심지어 음악 그룹 이름까지 순화시키려고 할 정도였지만, 김일성이 언어 순화를 철저히 했다는 정치선전 때문에 기존 보수 우파가 갑자기 자신의 업적을 잊거나 부정하고, 일부 진보 진영에서는 우파를 욕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언어순화를 북한처럼 철저히 하자고 주장하는 혼란이 빚어진 것이다. * 해방 이후에는 남측의 정적들에게 죽을 위기를 몇 차례 넘겼다. 1946년 3월 1일 [[3.1절]] 기념연설을 하던 도중 [[백의사]]에게 암살 당할 뻔했다. [[수류탄]]을 암살자가 던졌는데, 그 자리에 있던 소련군 장교 노비첸코가 되집어던져 암살을 모면했으나, 그 장교는 가까이서 터진 수류탄 덕에 팔 하나와 여러 곳을 다치고 [[의병제대]]했다. [[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fs_006_0010_0130|소련군정문서 1946년 4월 6일자]]에 의하면, 이승만과 김구는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한 테러단을 파견했다고 한다. 그전에 북한으로 파견된 테러분자들이 김일성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는 소식도 보도된 바 있다. 자동차에 수류탄이 투척되었는데 자동차는 어떤 파손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테러분자들은 이승만이 조만식에게 보내는 것으로 보이는 추천장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승만]]과 [[김구]]는 파쇼테러단이라고 비난 받았다. 김일성이 권력을 확실히 잡은 1950년대 후반에서야 비로소 이 장교를 손수 찾아가 고마워했고, 북한에서 따로 연금과 여러 가지를 제공하여 은혜를 보답했다고 한다. 심지어 기념영화까지 나왔으며, 죽을 때도 북한에서 장례비를 지원했다. * 소 뒷걸음질로 쥐 잡는 격으로 여러 사람과 나라들을 살리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보자면 '''[[박정희]]'''[* 6.25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남로당 사건으로 군에서 예편된 후 군에 복귀하지 못하고 평생 빨갱이 소리나 들으며 살았을 것이다.], '''[[장제스]]와 [[중화민국]]'''[* 6.25 전쟁이 없었다면 중화민국은 중공군의 침략으로 멸망 당했을 것이고, 장제스도 반동분자로 몰려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 '''[[요시다 시게루]]'''[* 전쟁 특수가 없었다면 이케타 하야토의 발언으로 실각되었을 것이다.]와 '''[[일본]]'''[*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국은 일본을 농업국가로 만들려고 하였다. 근데 6.25 전쟁 덕분에 미군의 공급기지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엄청난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등이 있다. * 김정일이 실권을 쥐게 된 1980년대 이후로는 외교 분야에서 주로 활동했고, 유년기부터 항일투쟁과 해방 시기까지의 활동을 다룬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등의 저서를 집필했다. 하지만 이 회고록은 자기 입맛에 맞게 항일운동사를 마구 뜯어고치고 윤색해 북한 외부에서는 역사 왜곡 서적으로 비판받는다. * 평소 집무실에서 틈틈이 책을 읽는 취미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좋아했던 책은 역사책과 문학책이었으며, 심지어는 '''남한에서 발간된 책까지도 읽었다.'''[* 이와 비슷하게 김정일은 늦어도 2002년부터 북한에서는 금지된 [[인터넷]]을 통해 남한 사이트를 자주 드나들었다.] 실제 1989년 소설가 [[황석영]]이 [[문익환]] 목사 일행과 방북하여 주석궁에 갔을 때는 황석영의 여러 소설을 감명 깊게 읽었다면서 한동안 그와 책 내용을 두고 토론까지 했을 정도라 한다. 문익환 목사는 성경책을 보여줬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별 감흥이 없었던 것 같다. * 김일성은 시와 노래를 좋아해서, 지은 노래와 시가 몇 십 편에 이른다. 가장 유명한 노래는 '조선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일제 강점기 때 동북항일연군이 부르던 것을 1993년에 [[보천보전자악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수 [[전혜영]]이 다시 복원했다. 김일성이 좋아하는 노래는 [[사향가]]와 [[자장가]]이다. 사향가는 내용이 고향에 대해 묘사한 것으로서, 그의 조모인 [[이보익]]의 애창가였다. 김정일도 어린 시절에 그녀가 부르는 [[사향가]]를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또 자연을 노래한 시는《묘향산 가을날에》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의 내용은 평안북도 묘향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으로 국제친선전람관 내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김정일의 50회 생일을 맞이하여 '백두광명성찬가'라는 한시를 짓기도 했는데, 양강도 삼지연군 화강암 비석에 새겨져 있다. * [[서예]] 활동을 많이 했다. 북한의 공공건물에는 김일성의 친필이 있는 간판이 있는 것을 꽤 볼 수 있다. 김일성의 친필비는 개성에 있으며, 인민들이 살고 있는 주택에도 현판을 제작해서 나누어 주기도 했다. 김일성의 친필이 걸려 있는 건물로는 대동강여관과 김형직사범대학, 그리고 북한의 종합대학 중 하나인 [[김책공업종합대학]] 등이 있다. * [[북한 원]]의 인물이다. 북한 원 2기 3차 시리즈 100원권 지폐에는 '혁명의 영재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시며 전설적 영웅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라는 기나긴 수식어가 붙어 있다. * 김일성의 장례식에 당시에는 [[북한]]의 인민들이 총동원되어 매일 생화를 들고 김일성의 동상을 찾았고 이로 인해 북한에 꽃이란 꽃은 모조리 팔려버리는 상황이 발생되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김일성 사망 당시에만 해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날에는 김일성 동상이나 초상화 앞에 꽃다발을 갖다 놓는 관례가 있었고 이 시기를 이용하여 짬짬이 꽃장사에 나서는 장사꾼들이 있었는데, 김일성의 장례기간 동안마다 이 사람들은 말 그대로 떼돈을 벌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북한 돈으로 5원밖에 안 하던 생화 한송이의 가격이 김일성 장례기간 동안 10배 가까이 오른 50원까지 거의 인플레이션 급으로 올랐을 정도다. 심지어 그 가격에도 꽃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일시적으로 종이로 만든 조화가 김일성 동상앞에 놓이기도 했다. * [[러시아]] 신문에서는 김일성이 [[http://www.unityinfo.co.kr/sub_read.html?uid=18530§ion=sc6|너무 오랫동안 중국에서 살아 온 탓에 북한공산당 창건대회 때 그는 한국어로 된 연설문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김일성의 첫 연설이 처참했던 것은 사실인데, 사실 이건 김일성의 탓이 아니라 연설문을 소련군 장교가 러시아어로 써주고 고려인 2세가[* 시인 전동혁. 이 사람은 1957년 소련파가 숙청당해 힘을 잃자 소련으로 돌아갔다.] 조선어로 번역해서 문법이나 어휘가 조악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도 만주 동만특위 단장 통창잉(童長榮)의 연설[* 특히 중간에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사업에 이바지하라'는 내용.]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 인사들의 여러 연설로부터 적당히 짜깁기한 것이었다. *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거리가 [[캄보디아]]의 [[프놈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모잠비크]]의 [[마푸투]] 등에 있다. 특히 다마스쿠스에는 김일성의 이름을 딴 [[김일성 공원]]도 있는데, 이들은 공통적으로 다 친북 성향인 나라들이다. * 시인 [[김수영(시인)|김수영]]이 [[김일성 만세]]란 시를 발표한 적이 있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 * [[http://sonnet.egloos.com/4449662|'''"스탈린은 내 친구요."''']]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파일:Screenshot_2019-04-28-11-40-42_1556419320611.jpg]] [[파일:Screenshot_2019-04-28-11-40-55_1556419320393.jpg]] [[파일:Screenshot_2019-04-28-11-41-13_1556419320155.jpg]] * [[납북]]된 [[신상옥]]과의 대화 도중 [[고려연방제]]의 국호 후보에 대해 언급하면서 [[신라]]를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을 때 외세의 힘을 빌렸다는 점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박정희]]의 신라 계승 정신도 좋지 않게 보았다. 위 발언에서는 '우리가'라고 하여 고구려를 망하게 한 계파를 '우리'라고 주장한다고 적혀 있지만, '우리', '그'라는 군말이라 신라가 외세의 힘을 빌려 통일시켰다고 하여 나쁘게 본 것으로 묘사된 경우도 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hanmailhan&logNo=90045440245|#]] 아이러니한 것은 김일성 본인이 신라의 혈통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인데 김일성의 성씨인 [[전주 김씨]]는 [[경주 김씨]]의 분파로,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후손들이다. [[김태서]]는 전주 김씨의 시조인데 원래 경주 김씨였던 인물이 [[전주시|전주]]로 건너와서 분점을 낸 것이다. [[파일:937423D5-263A-4B0A-8DE5-6E692CB393D2.jpg]] [[파일:IE002116407_STD.jpg]] [[파일:KPA.jpg]] [[파일:2CB129F5-48BE-4B62-A0FC-4E5887954EA2.jpg]] [[파일:김일성 태극기.jpg]] [youtube(EZFkHX46pqM)] [youtube(DdcwJe7YAns)] * 북한 정권도 초창기에는 [[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했기에 김일성과 태극기가 나란히 있는 사진들이 있다. 심지어는 위의 사진처럼 김일성이 태극기에 경의를 표하고, [[애국가]]를 부르는 영상도 있다. 지금 와서 보면 매우 어색한 모습이기도 하다. * 장성택의 길이라는 책에 의하면 김일성은 자신의 건강이 예전만 못하다고 느끼던 시점에 자신이 가장 믿는 측근 10명을 불러 모은 뒤 손잡이가 은으로 되어 있는 권총 열 자루를 꺼내어 각자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그리고 엄중한 태도로 그들에게 후계와 체제 문제에 대한 중대한 발언을 남겼다. 그 발언은 "만약 자신이 죽은 후 [[김정일|후계자인 아들]]이 자신의 노선에서 일탈해 함부로 체제 개혁에 손을 댄다면, '''누구라도 바로 이 총으로 그를 사살하라"'''는 명령이었다 한다. * 2023년에도 그와 같은 고향 출신의 [[실향민/대한민국|실향민]]인 [[김형석(교육자)|김형석]] 씨가 존재한다. 북한에서 1947년까지 살다가 하나 둘씩 조용히 주변 인물이 잡혀가는 것을 보고 월남한 것이다. 김일성은 아이 때부터 골목대장의 성격을 가졌으며, 지식보다는 의지가 강하고, 목적의식이 강했던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를 젖 먹여 키운 할머니가 김일성에 의해 자식을 잃기도 했다고 한다. 그 할머니가 '그놈, 내 아들 두 놈 다 잡아 죽일 줄 알았더라면 그때 젖꼭지로 콧구멍을 막아서 죽이는 건데 못했다'라고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https://www.bbc.com/korean/media-58430776|#]] * 어려서 중국인 중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중국어는 대단히 능통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hd3R36WSFc|영상]]으로 보다시피, 김일성은 한국어 억양이 약간 섞인 중국어 동북방언 억양으로 말했는데, 이는 그가 [[지린성]]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이다. [[펑더화이]] 역시 김일성이 지린성 억양을 썼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 외에 [[월어]]를 비롯한 여러 지방의 중국어 방언도 수준급으로 구사할 줄 알아서 통역 없이 회담이 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러시아어는 30대 되어서 배우긴 했지만 소련에서 몇년 살았기 때문에 통역 없이도 그런대로 의사소통을 하는 수준은 되었으나 중국어만큼 유창하진 못했고 이 때문에 고려인 출신의 유성철, 문일 등 러시아어 통역을 데리고 다녀야 했다. * 북한 주민들은 무조건 김일성을 신으로 모시며, 탈북한 사람도 김일성을 존경한다는 설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나, 불행 중 다행히도 이는 북한 당국의 선전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 현 시점에서는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당장 [[6.25 전쟁]] 직후에도 전쟁으로 가난해졌으나 너무 감시가 삼엄하고 밀고자에게 대가를 잘 주어서 불만이 진압당한 것이며, 김일성이 독재 체제를 완전히 구축하기도 전인 6.25 이전에도 김일성이 학창 시절에 2차례나 살인을 저질렀다는([[https://www.joongang.co.kr/article/22093650#home|#]]) 소문이 [[CIA]] 보고서에도 기록되었을 정도로 널리 퍼졌던만큼 당대 북한에서도 김일성에 대한 불만이 암암리에 퍼져 있었을 것임을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출생한 북한 주민은 김정은을 ‘아버지 원수님’으로 김정일을 ‘할아버지 대원수님’으로 불러야 한다면 김일성에 대해서는 ‘증조 할아버지’로 불러야 맞지 않냐며 비꼬면서 자신에게 해준 것도 없는 옛날 할아버지 정도로 여기기도 한다. [[https://www.rfa.org/korean/in_focus/ne-hm-07062020063107.html|#]] 이미 도시에서는 김일성 동상 근처에서 북한 당국 입장에서는 '불경스럽게' 데이트를 하기도 하며 언론 뿐만 아니라 [[강나라]] 씨 같은 탈북자도 증언한 바 있다. 20대의 부모 세대라면 좀 존경심이 있을 수는 있지만 바깥 세계를 경험하거나 [[김만철]]의 사례 같은 것을 접하면 바로 증오로 바뀐다.[* 이것 때문에 탈북자 중 [[극우]] 성향이 많지 않냐는 오해가 있다. 그러나 김일성을 정말 싫어하기는 하되, 그 만행에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이 좋겠느냐, 어떤 정치 사상을 지지하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예컨대 [[박정희 정권]]에 도전한 민주화 운동가 [[함석헌]]은 '[[http://ssialsori.net/bbs/board.php?bo_table=0205&wr_id=117|위대한 영도자 하는 것은 다 민족의 도둑의 별명]]'이라며 김일성도 나쁘게 여겼고, 그 행태를 박정희가 닮아간다는 주장을 하던 인물이었다. 북한이 들어서며 사망자가 20명 이상 발생했던 시위인 [[신의주 반공학생사건]]의 사상적 배후로 주목받아 목숨을 잃을 뻔한 인물이다. 반공투사로 탈북민을 대하던 전통 때문에 정치적으로 활동이 많은 쪽은 보수 정치권에 편입되는 경향이 많은 정도다. 조용한 사람들은 주변 정보를 따라서 지지 정당을 정한다. [[북한이탈주민]] 문서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애시당초에 정치적 통제의 일환으로 조직생활을 강요한 장본인이 김일성인데, 이런 것이 굶주림보다 끔찍하다고 증언하는 경우도 많다. 북한 밖에서도 김일성을 진심으로 존경할 부류는 높은 정치적 지위를 북한 체제에서 누릴 수 있는 경우, 아니면 [[귀순 탈북자 2022년 월북 사건|이런 월북 사건의 당사자]]처럼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경우밖에 없다. 애초에 [[2015년]] 3월 [[자유아시아방송]]은 [[평안북도]]의 한 소식통을 통해 "김일성, 김정일을 '최고존엄'으로 떠받들던 시기는 ''''[[고난의 행군]] 시대에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전하기도 했다. 일단 북한의 가정마다 있었던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가 있는 저작들과 김일성의 회고록은 북한 주민들에게는 오래전부터 '''휴지와 땔감으로 애용되었다고 하며,'''[* 북한 주민들도 이런 책들을 훼손하는 것이 처벌을 받는 '범죄'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책 한 권을 모두 태워버리며 증거(?)를 인멸하기에 처벌할 수도 없다고 한다.] 김정은 정권이 새로 만든 김일성•김정일 배지는 장마당에서 입쌀 1kg 값도 되지 않는 5천 원에 팔리고, 덤으로 이들은 "북한주민들에게 '최고존엄'은 내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돈밖에 없다"는 말을 하며 북한 주민들도 [[자본주의]]의 맛(?)에 익숙해졌다는 것을 언급했다. [[https://www.rfa.org/korean/in_focus/ne-je-03162015094721.html|#]] 이 말대로라면 대다수의 북한 주민들은 진심으로는 김일성 일가의 '공'을 이해하지는 못할 망정[* 국제앰네스티 등의 보고서에 따르면 아직 반항심까지는 아니고 젊은 세대 중에서는 정치에 무관심한 계층이 주가 된다는 의견이 많다. 북한을 나오면 심한 배신감을 느끼는 경우는 많다.] 겉으로는 살아남기 위해 김일성 일가를 존경하는 '척'하고 북한의 거짓 선전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 의외의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한국전쟁 당시 [[한국전쟁기 미군의 폭격|미공군의 무차별 폭격]]은 일반민중 뿐 아니라 당 간부를 가리지 않았는데, 김일성 또한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전쟁 당시 김일성은 미군의 폭격으로 '''최소 2번 이상은 목숨을 잃을 뻔했다.''' 1951년부터 휴전 때까지 김일성은 [[평안남도]] [[강동군]] 시정면 곤지리의 전선사령부에서 지냈는데, 1951년 7월 29일 미군 전투기의 기총사격으로 그가 앉아있던 곳에서 불과 1m 지점에 총알이 박혔으며, 8월 4일에는 사령부 뒤뜰에서 500kg짜리 폭탄이 떨어졌으나 불발이어서 살아남은 일도 있었다. 당시 김일성이 머무는 동안에 전선사령부에 떨어진 미군 폭탄이 무려 149개라는 점에서, 김일성 또한 미군의 폭격에서 생명을 보장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김일성 또한 북한 인민들 처럼 미군 폭격의 공포를 직접 체험한 것. 물론 6.25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 김일성인 만큼 김일성이 폭격으로 죽을 뻔했던 것은 사실상 김일성 본인의 업보이며, 무엇보다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미군의 폭격에 무고한 한반도 주민들이 살상당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 1983년 2월 14일자 뉴욕 트리뷴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평양에 들른 한 [[쿠바]]인 기자는 김일성과 회견하고는 원숭이가 제 아무리 높은 왕좌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기껏해야 원숭이의 왕좌라는 내용의 중국 속담을 떠올렸으며, 4시간 30분 동안 '사상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론가로서 모든 인민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는 김일성의 사상을 듣고는 '도저히 필설로 묘사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며 김일성을 '정신분열적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묘사했다.[* 이후 그 기자는 6개월 뒤 하노이에서 돌아가는 길에 잠시 평양에 들렀다가 쿠바 대사관에서 실수로 김일성의 사진이 있는 신문으로 빈 병과 깡통을 쌌는데, 대사관에 있던 북한인 직원이 이를 보고 밀고하였고, 그 기자는 다음날 외교부에 호출되고는 '위대한 지도자' '민족의 아버지'의 사진이 실린 신문지로 폐품을 싼 '대역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북한에서 추방되었다고 한다.][* 출처: 강광식 편저, 북한의 실태 - 분야별 경험자료 및 예비적 고찰 , 1987,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30쪽] 즉, 김일성은 '''같은 공산권 국가 사람에게도 정신 질환자 취급을 받을 정도였던 셈이다.''' *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 [[4월 15일]] 바로 그 날에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가 일어났으며, 4월 15일은 [[킬링필드]]의 주동자 [[폴 포트]]가 사망한 날짜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