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일성 (문단 편집) === 지도자로서의 평가 === 지도자로써의 나라를 올바르게 이끌 능력은 매우 부족하고 권력만을 탐한 잘못된 지도자이자 겉으로는 [[공화제|인민공화국]]을 표방하지만, 북한을 왕조와 다를 바 없는 '''3대 세습 독재국가'''로 만든 장본인이다. 불행히도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 능력만 세계의 독재자 중에서도 특히 뛰어났다.'''[* 비슷한 유형인 마오쩌둥은 권력을 얻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평가되나, 그는 군인으로써도 중국 역사를 통틀어서 손에 꼽는 인물로 평가되기에 독립운동을 했을지언정 과장이 있다고 평가되는 김일성과 동렬에 놓기는 힘들다.] 김일성은 [[조선로동당 총비서|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등의 직책을 지냈는데, 당 총비서 직책이 곧 최고지도자임을 의미하므로 사실상 압도적 전제권력을 지닌 독재자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당국가체제(黨國家體制)로서, 조선로동당 총비서 직함이 다른 어떠한 직책보다 앞선다. 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전문, 제11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조선인민은 ...(중략)... 조선로동당의 령도밑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라는 문구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조선중앙텔레비죤]]의 [[리춘히]]가 항상 "조선로동당 총비서이시며..."라며 가장 먼저 호칭하는 데는 다 이러한 이유가 있다.] 집권 초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수상을 지냈으며, [[8월 종파사건]]{{{-1 (1956년)}}}과 [[갑산파 숙청 사건]] {{{-1 (1967년)}}}[* 북한에서는 '''1967년 반당반혁명종파사건'''으로 불린다. [[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e40c528c77cac00c758-c228aca8c9c4-c9c4c2e4/20180717_2-07172018072413.html|#]] 박금철 부총리는 [[갑산파]]의 중심 인물이었으며, 민족보위상{{{-2 (오늘날의 '국방상')}}}도 맡고 있었다. 이효순은 대남총국장으로, 박금철의 수하였다. 이 사건은 김일성 우상화가 진행되던 시기에 그 흐름에 배치되게, 박금철에 대한 개인 우상화 때문에 일어난 숙청사건이다. [[https://www.sisu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165|#]] 이를 계기로 북한 내 반김일성세력이 종적을 감췄다.] 등을 통해 정적들을 모조리 숙청한 이후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에 올라서 스스로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 북한의 1인 세습독재 체제를 수립해서 [[1970년대]]부터 [[김정일]]에게 권력을 서서히 이양해나갔으며, [[1994년]] 사망하며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하였다. 사후에도 평양정권 주도 하에 [[우상화|'영생불멸의 위대한 수령']]으로 숭배되고 있으며 다른 공산주의·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과는 달리 영구적인 맹목적 숭배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분단을 경험했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전쟁을 일으켜 최소 360만 명의 사람들을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6.25 전쟁]]은 김일성이라는 일개인이 결심만 안 했다면 충분히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김일성의 북한은 평화적인 통일 노력을 모두 거절하고 전쟁준비만 했다. 베트남도 전쟁으로 적화통일을 이루긴 했지만 일단 공격을 북베트남이 했음을 숨긴 것도 아니고, 실제 자신의 공적이 있는 [[호찌민]]의 지지가 남북베트남 모두 압도적이어서 [[남베트남]] 정부의 주민 지지가 낮아 평화적으로 통일을 추진해도 적화가 될 공산이 있었다. 물론 호찌민도 전쟁으로 통일을 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호찌민은 자신을 김일성처럼 우상화하지는 않았다.] 존 에버라드 전 평양주재 영국대사의 의견에 따르면 한반도의 통일 여건은 똑같이 분단되었지만 좌우의 합의로 통일을 이룬 '''오스트리아보다 유리했다'''고 주장한다. 미소의 대립이 유럽에서 더 치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지원을 적화통일을 위한 것으로 이용했고, 이들을 끈질기게 설득시켜 남침에 대한 '승인'을 받아낸다.[* 참고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 요청을 무려 '''48번'''이나 했다고 한다.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2118018|#]]] [[https://www.joongang.co.kr/article/16499154#home|#]] 마오쩌둥조차 처음엔 전쟁을 거절했다가 스탈린의 승낙을 보고 자신도 동의하고, 국제연합군에게 밀리자 중국인민지원군을 파병하였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899404#home|#]] 이로써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의 중화민국을 공격할 기회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심지어 [[1965년]]과 1975년에 김일성은 '''다시 남침을 시도하려고 했으나''' 불행 중 다행히도 두 차례 모두 중화인민공화국 지도부의 만류로 실현되지 못했다. [[https://m.khan.co.kr/politics/north-korea/article/201310242254381/amp|#]][[https://m.khan.co.kr/world/world-general/article/20120516091158A/amp|#]] 6.25 전쟁 과정에서 남한도 [[보도연맹 학살 사건]] 등 엄청난 규모의 학살을 저지르고[* 특히 민간인 학살에 있어서는 국군이 인민군보다 횟수, 규모 모두 더했던 것만큼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긴 하다. 물론 인민군이 민간인 학살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한국전쟁기 미군의 폭격|미군의 폭격]] 역시 만만치 않은 인명, 재산적 피해를 야기했다는 것만큼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하지만, 애초에 김일성이 6.25 전쟁을 추진하지만 않았어도 동족이 서로를 의심하게 하면서 수백만 명이 전쟁의 포화 속에 목숨을 잃는 모든 일은 없었을 것이며, 후술하듯 전쟁과는 완전히 무관한 내치에서의 행적만 따져도 김일성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으로 꼽히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원래 김일성 계파는 '''소수에 불과한 세력이었다.''' 평안도는 [[조만식]]을 위시한 온건한 우익이 득세하고, 함경도는 좌익이 우세하였으나 [[오기섭]] 같은 공산주의자의 역할이 컸고 소련에 아부하는 척하던 김일성의 태도와 다르게 민족주의적으로 외세에 겉으로도 아부하려고 들지 않아[* [[소련군]]은 북한에 진주하면서 약탈, 강간 같은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현재도 [[김형석(교육자)|김형석]] 명예교수 같이 이를 직접 본 사람도 남한에 생존하고 있다. 대중적으로 알 수 있는 예로는 작가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다와이('줘'라는 뜻)라는 [[러시아어]]를 언급하며 '여자들까지 다와이 당했다고 난리였다'는 묘사나, 전광용의 <[[꺼삐딴 리]]> 같은 소설이 대표적이다. [[조만식]] 등은 이런 조치에 항의했으나, 김일성의 계파는 소련의 사상에서도 병력 관리를 잘 못한 것임에도 이 행태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두둔하게 하였다. 너무 아부를 잘했기에 이 모습이 남한에서 김일성은 '민족에 대한 배신자' 같은 인식을 낳은 배경이 되기도 했다.] [[함흥]]에서는 시위하다 총맞고 숨진 학생들도 있었다. [[http://dongne.donga.com/2013/04/30/d-story%E2%85%A1-%EC%9D%B4%EB%B6%81%EB%8B%B5%ED%8C%8C%EA%B8%B02-%ED%95%A8%EA%B2%BD%EB%8F%84/|#]] [[소련군]]이 북한에 들어서며 해방 직후 정치 활동을 하던 공산당 입맛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밀어내고, 거기에 김일성의 계파가 섞여 있던 것이다. 해방 직후까지 북한에 거주하던 한국 민주화 운동가 [[함석헌]]은 광복이 된 직후에는 '무식 유식 잘살고 못 살고 없이 나라 위해서라면 눈알이라도 빼서 바칠 심정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http://ssialsori.net/bbs/board.php?bo_table=0205&wr_id=117|#]] 오죽하면 소작인들이 지주와 친해서 소련군도 일부 공산주의자조차 '지주를 모욕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평가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갈라치기|사이가 좋은 사람들을 인민의 적으로 선전]]'''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도 하였다. [[http://waks.aks.ac.kr/dir/searchView.aspx?dataID=AKS-2013-KFR-1230004_DES@R135|#]] 그러나 큰 형님인 소련에 대한 아부하는 식의 쇼와, 인간이라면 예상 못할 뻔뻔한 사기행각과 질투심을 위주로 한[* 무슨 정책이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다른 정치 세력과 마찰을 빚은 것이 아니다. [[김영주(북한)]] 문서에 언급되어 있다시피 김일성은 소련파의 간부를 숙청하기 위해 비밀리에 소련에 친한 간부들을 두고 '자기 자식들은 북한 주재 소련학교에 보내면서 자기들끼리 뭉쳐 특별 대우를 받고 러시아어만 쓰는 '두개의 의자'에 앉아있는 자'라며 자신이 지목하는 대상을 없애면 더 출세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최대한 배아파하도록 증오심을 부추겼다.] 탐욕을 부추기는 방식을 위주로 하는 악랄한 세력확장을 통해 자신이 절대권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도덕적으로 못할 행동을 한다고 하여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도 종종 있었지만, 이미 뒤에서 그런 행동을 하도록 뒤에서 권력을 갖추어놓은 뒤였다. 김일성이 없었어도 북한이 이렇게 됐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처음에 북한의 정치권에 뛰어든 사람들은 비록 오랜 식민통치로 협의의 기술이 부족하거나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와 비슷하게 독재자 기질이 있는 사람들은 있을 망정 거짓말과 탐욕으로 일관하여 정치를 하려던 것이 아니라, 그나마 매력적인 정치이론을 들고 나오려고 하거나 잘못된 신념이든 그렇지 않든 어떤 신념은 있는 사람들이었다. 김일성은 해방전을 자신이 주도했다는 역사 왜곡[* 쉽게 말해서 '''한반도는 자신의 군대가 일본군을 물리쳐서 해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소련군 사령부를 찾아서 처음 한 말이 소련군이 벌인 해방전에 참가하지 못한 자신도 참가한 것으로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거절당하자 아예 가상의 군대를 동원한 역사왜곡을 벌여 아이들에게까지 이를 가르친다. [[김일성/생애]] 문서 참조. 그 외에도 아래 어록에서 보듯 스스로 '인민이 다가오게 하는 수단'이라며 거짓말을 정권 유지 수단으로 삼았음을 인정하긴 했으며, 건국 초기 종교의 자유나 소유권을 보장하겠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고 한다.]과 [[백두혈통 우상화 교과서|허황된 날조들에 기반한 개인숭배]] 등 숱한 거짓말, 자신의 반대파에게 가혹한 행위를 일삼는 사람에게 출세를 시켜주기 등의 수단과 함께 사회주의를 구실로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장악하여 주민들을 충성도에 따른 배급에 길들여서 절대 권력을 얻었는데, 이는 배급이 예고없이 끊겨 일어난 비극인 '''[[고난의 행군|90년대의 대기근]]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외부에서는 마치 [[사이비 종교]] 같은 [[우상화/북한|우상화]]와 [[요람에서 무덤까지]] 지속되는 [[가스라이팅]]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으나, '''사실은 김일성 일가에 반대하는 사람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헐뜯기만 해도 출세할 수 있는 금전적 보상이 따르는 권력의 단맛에 길들여 일반 주민을 노골적으로 탄압할 수 있는 친위대를 구성한 것이 더 무서운 것'''이다.[* 도덕적인 사람도 출세를 하긴 했으나 자신에게 속고 있는 우직한 사람을 좋아했다.] 그의 [[주체사상]]은 꽤 조악하고 모순이 심한 내용이었기에 [[마오주의]]는커녕 [[호자주의]] 수준의 파급력도 국제적으로 미치지 못하였고, 일찍이 [[소련]] 등지에서 비웃음거리가 되어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의 증언처럼 소련 국민들이 북한의 선전매체들을 '''개그 잡지'''라며 일부러 구독해 읽었을 정도였다. [[https://www.rfa.org/korean/commentary/lankov/alcu-07282022093959.html|#]] 대신에 구미가 당기는 사상을 내세우기 보다는 권력의 속성을 이용하여 도덕성이나 협동심을 무력화시키는 일을 잘하던 인물이었다. 가장 권력에 갈증을 느끼기 쉬운 머슴 같은 '노동계급'이라고 이름 붙인 하류층을 포섭하여 농민위원장 같은 높은 자리나 경찰에 해당하는 보안원 같은 자리로 출세시키는 등 이쪽으로 매우 지능적이고 교활한 행보를 보였다. 오늘날로 따지면 젠더 갈등, 노사 갈등 같은 것[* 참고로 지역 갈등의 경우 김일성은 '지방주의'라고 이름 붙인 다른 지방의 세력화를 극도로 싫어하여 그렇게 지역갈등을 부추기지는 않았다.]을 만들면서[* 김일성이 북한을 통치하기 전만 해도 저런 지역은 오히려 새로 개척된 지역이라 지역 주민간 신분이 비교적 평등한 편에 속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적서차별도 적고, '양반'이라는 지배계층이 적었다. 상업을 해야 먹고 사는 곳이라 직업 차별도 적은 편이었다. [[김구]]는 아예 이 일대를 '상놈의 낙원'이라는 표현까지 썼을 정도다. 실제로 대한민국이 통치하던 지역을 잠시 북한에서 점령했을 때 이로 인한 갈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거짓 정보와 상황을 흐리게 보이게 하는 수단으로 상대를 악마화시켜 죄책감을 없애고, 특정 계층에게 높은 자리를 안겨주고 재산도 두둑하게 챙겨주면서[* 이것보다 약하게 좋은 기업에서 어떤 계층을 취업 시키는 것만으로도 현대 사회에서도 갈등이 심한 편인데, 이건 단순히 앉아서 자식도 출세하고 재산이 들어올 기회가 생긴다는 것이라 사람에 따라 비열한 행동을 하게 할 동기가 될 수도 있었다. 김일성이 권력을 잡자마자 한 일 중 하나가 '혁명자유가족학원'이라는 [[만경대혁명학원]]의 전신인, 노골적으로 말하면 자신의 충성파의 자녀가 출세할 학교를 만들어준 것이다.] 이 상황이 아니면 남들 위에서 군림할 수 없다는 쾌락과, 이 상황이 아니면 권력과 재산을 잃을 것이라는 공포심[* 왜냐하면 원래는 권력과 재산이 딱히 없던 사람들에게 그런 것을 쥐어 주었기 때문이다.]을 통해 증오를 부추기는 무서운 전략인 것이다. [[황순원]]과 같은 남한으로 피난을 온 고향이 북한 땅인 소설가는 카인의 후예 같은 작품에서 이런 상황을 묘사하며 사랑이 필요하다며 이런 상황을 끔찍하게 여기기도 했다. 해방되자마자 소련 몰래 지방의 당조직 착수·노동계급속에서의 새로운 인재발굴(지지세력 확보), 기술자·전문가 발굴 및 추천(무력 확보) 같은 적극적인 세력 확장을 하는 등 처음부터 권력을 추구하는 능력은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인물이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636503|#]] 6.25 전쟁 때도 인민군 점령지에서 이것 때문에 신분이 아예 거꾸로 되고 벼락출세하게 된 사람들은 기세등등하게 그 앞잡이를 한 경우가 많았다. 김일성과 정실 관계가 있던 [[강량욱]] '''[[목사]]''' 같은 경우 북조선임시인민위 서기장[* 김일성, [[김두봉]] 다음으로 높은 자리에 있었다.] 같은 권력의 유혹에 빠져 신앙을 저버리고 북한에서 '''개신교인을 탄압'''하는데 앞장서기도 할 정도였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693907|#]] 그가 자신의 수족이 될 인물을 찾고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과정은 정말로 일반인은 생각할 수 없는 노련함과 수치를 모르는 대담성[* 평양에서 가장 유력한 정치인인 [[조만식]]에게 큰절을 올리며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소련군정과의 마찰을 줄이겠다'면서 조만식 당에 들어가겠다는 제안을 번복하고서는, 뒤에서 '''반동 영감쟁이 조만식을 죽여야 한다'''라고 그를 언제 처리할지 고민을 했다고 한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2639761|#]] 물론 마찰을 줄이는 것이 아니고 소련군 뒤에서 조만식의 올곧은 면을 헐뜯으며 그를 연금시키고서는 죽음에 이르도록 하였다. 윗문단의 숙청을 다룬 내용만 봐도 얼마나 상식을 뛰어넘는 뻔뻔한 행각을 보여왔는지 알 수 있다.]과 잔학성을 띤 것이었다. 심지어 '''김일성에게 이를 가는 사람들조차''' 그가 '사회주의자', '친 소련파'라고 믿어 '''김일성에게 속아넘어가는''' 바람에 진짜 사회주의자가 김일성의 정체를 모르고 그에게 협조를 한다든가, 남한에서는 소련이 속고 있음을 주장하여 북한을 견제한다는 카드가 잘 나오지 못할 지경이었다. > 소련군을 따라 1945년 9월21일 [[원산]]에 상륙, 한달 후인 10월14일 평양 시민환영대회에서 명실상부한 집권자로 부상할 때까지 김일성은 주로 소련 점령군 고위층과 긴밀히 협력, 때로는 [[접대|향연을 베풀면서]][* 평양 기생들을 동원하여 치스차코프 사령관 같은 소련군내 주요 인물들에게 술을 대접하며 아양을 떨기에 바빴다고 한다. [[https://hankookilbo.com/News/Read/199011070056900672|#]]] 정치상황에 복잡한 논리로 대응하는 남로당 [[박헌영]] 연안파 [[김두봉]] 또는 소련파 [[허가이]]에 비해 군대전우의 단순 충성논리로 소련 점령군에 협조했다. > 따라서 보다 통제하기 쉬운[* 통제하기 쉽다고 판단했으나 8월 종파 사건 즈음 소련에 친밀한 정치인을 숙청시켜 노골적으로 소련을 배신하는 등 보여주기 식의 알맹이가 없는 행태에 속은 것이었다.] 김일성을 소련 점령군 사령부는 대권주자로 점찍어 스탈린의 오른팔인 즈다노브 정치국원에게 직접 연결시켜 어렵지 않게 북한지도자로 옹립한 것이다. > 만주 항일빨치산과 [[하바로프스크]] 88여단에서 같이 근무한 25명 정도의 김일성 직계 빨치산은 김일성이 소련군 비호속에 정권을 장악할 수 있게한 전위 세력이었다. 이들은 안길 서철 임춘추 이동화를 제외하고는 거의 무학,국민학교 중퇴 정도로 '''김일성과는 이념적 갈등이 있을 수 없고 도전세력이 될 수 없으며 흩어지면 생존 불가능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김일성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행동집단이 됐다. 그들은 정권장악 후에도 당,안전기관,군대에서 반대파를 암살하는 폭력집단으로 행세했다. 결국 김일성 정권은 '''소련군의 지원과 그의 소수 빨치산 부하'''의 테러와 감시, 그리고 적시에 반대파를 제거하는 기민한 술책발휘로 이루어진 '''원천적 군사정부 성격'''이었다. > 김일성은 소련군의 방조속에 이들 빨치산 요원을 동원, 전쟁 전에는 [[조만식]][* 조만식의 [[조선사회민주당|조선민주당]]에 김일성과 정실 관계에 있는 강량욱이 [[프락치]] 역할로 잠입하여 가입하고 나서는, '''조만식이 체포되자 그 당을 아예 접수해버린다.'''], 전쟁 중에는 [[박헌영]], 전쟁 후 50년대 중반기에는 [[연안파]], 60년대 초에는 [[소련파]][* 한 마디로 가장 강한 세력의 힘을 빌어 만만한 세력을 가장 먼저 제거하고, 힘을 키워서 그 세력마저 배신하는 계산적이며 무자비한 행태를 보였다는 것이다.]를 '''상호이간''', 개인별로는 '''파격적 승진과 보직으로 환심을 사고 방심하는 순간 전격적으로 숙청, 제거하는 기민한 정치술수'''를 과시했다. >---- > 베일속 「김일성과거」 파헤쳐/「유성철 나의 증언」연재를 끝내고, 1990년 12월 1일, [[한국일보]]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199012010097542056|#]] 북한 당국의 경제 정책이 이상하다는 건 많은 사람들이 느끼며 아예 어떻게든 이를 어기며 사는 사람들이 과반 이상이다. 다만 북한을 빠져나와야 알 수 있는 군사력 강화로 미국은 자신을 건드리지 못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통일도 이루어낼 수 있어 부강해진다는 식의 주장은 깬 사람 정도나 믿지 않는다. 그렇지만 후자의 경우에도 무기를 아무리 만들어도 나라 경제가 나아지지 않으니 믿지 않는 사람들이 느는 추세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주민들이 우상화 선전은 안 믿어도 북한 당국의 행태에 따르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서 기인한다. 남한에서도 약간의 거짓말과 [[현역 대위 군사기밀 유출 사건|푼돈에 북한에 기밀을 빼돌리는 장교]]도 있으나, 훗날 김일성의 통치술을 전수받은 [[김정일]]의 요리사가 된 [[후지모토 겐지]] 같은 선진국 일본 출신조차 '자신이 일본에서 평생을 초밥 요리사로 일했다고 벤츠를 몰아볼 수 있었겠는가'라며 북한에 충성하게 될 정도였다. [[천리마 운동]] 같이 북한이 김일성의 리더십으로 60년대 즈음에 잘 살았다더라라는 주장도 많이 퍼져 있으나, 그건 국부를 김일성의 무리들이 다 가져가고 일반 주민들에게는 겨우 연명할 정도의 물질적인 보상만을 제공하여, 한민족 중 가장 키가 컸던 함경도 출신이 많은 탈북자들의 키를 재보아도 남성은 해방 이후 출생자부터 평균 키가 남한 주민보다도 작았다는 것이라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여성도 늦어도 60년대부터 밀린다. [[https://www.hankyung.com/society/article/2004062481608|#]] '''[[정신력]]이 부족하다며 일반 주민들을 갈구면서[* 통일부 북한정보포털은 '유인동기를 물질적 보상보다는 노동자의 명예심과 도덕적 양심'에 맞추었다고 한다. [[https://nkinfo.unikorea.go.kr/nkp/term/viewNkKnwldgDicary.do?pageIndex=1&dicaryId=194|#]]] 그들이 만들어낸 몫을 저들이 다 가져간 것뿐이지, 일제강점기 이후로 90년대 대량 기근 사태인 고난의 행군기까지 북한 주민들의 평균키가 아예 안 자랐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들이 다 가져가 놓고서는 그 지위를 유지하고자 외부에다가는 평양 중심 같은 잘 사는 모델만 보여주고,[* 이는 [[김정은]] 시기도 마찬가지라 북한이 경제난과 전력난에 시달림을 감추고자 대외에 선전하는 북한의 밤 모습도 절대다수가 수도 [[평양]] 중심부 인근의 야경이다.] 북한 주민에게도 남조선 등이 뼈빠지게 가난하다고 거짓말을 지속적으로 주입하고[* 한 탈북자는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가 [[일본]]인 줄 알았다고 한다. 당시 일본은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거품경제]] 시기였는데, 그런 시절에도 일본이 선진국이라는 사실을 주민들에게 철저히 감춘 것이다.'''] 외부 접촉을 광적으로 차단한 덕에 저 당시는 진실은 김일성 측근만 알고 북한 일반인과 북한 밖의 모든 인사들이 이런 사정을 알지 못했다. 주민을 직접 탄압하는 [[국가보위성]] 출신 중 중앙에 가까운 경우나 같은 경우나 다른 이유로 중앙에 가까울수록 '''정말로 탈북을 해도 북한에서 누리는 권세는 못 누리고 심지어 북한에서 사는 것보다 가난하게 살 수 있다.''' 가장 노골적으로 주민을 탄압하는 김일성의 최측근들은 남한에서 태어났으면 중산층에도 편입되지 못할 사람들이 많았다. 김일성 동료의 지인의 아들인 [[현철해]] 같은 경우도 나이를 속여가며 소위로 입대하며 김일성에게 아부하더니 지방간, 고지혈증, 당뇨 같은 질환[* 북한 매체에서 잠깐 비추어준 내용이다.]으로 호사스럽게 먹다가 죽었다. 물론 일반 주민들의 정신을 최대한 조종하고자 하였으나, 인간은 자신의 본능에 거스르는 세뇌가 불가능하여 외부에 대한 인식을 속이는 방식으로만 주민 세뇌가 가능한 터라 외부 정보를 접하는 순간 [[김만철]] 일가의 사례처럼 바로 김일성 가문에 깊은 배신을 느꼈다. 다만 저렇게 외부 정보를 극단적으로 차단시키면서 외지인들이 듣기엔 터무니없기 그지없는 김일성의 말이 거짓말인 것을 알든 모르든[* 1956년의 대숙청인 [[8월 종파 사건]] 당시 김일성의 반대파들이 소련에 알리려고 한 내용에는, 김일성 우상화의 근거가 된 [[보천보 전투]]가 보잘 것 없는 내용이었음을 김일성의 측근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는 내용도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의 무리는 정직한 사람들을 가장 두려워한다고 주장했다.] 그를 근거로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조직을 실제로 구축한 것이 더 경악스러운 것이다. 이렇듯 김일성은 조직을 다루며 보신을 하는 능력은 수준급이었으며, 고위 간부조차 김일성의 계획을 잘 모르거나 속는 등 가면을 쓰는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또한 김일성은 권력유지를 위해서 "독초는 적시에 제거하고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한다."라는 말을 남기며 북한 체제에 조금만 거슬리면 그 사람의 3대에 [[연좌제]]를 적용해[* 물론 진짜 '중대한' 경우에는 [[최창익]], [[황장엽]]처럼 각각 '''7촌 조카의 일가족/11촌까지'''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기도 했다. 정작 그 연좌제가 가장 먼저, 가장 철저히 적용되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김일성 본인이었다.''' 유유상종이라고 김일성의 망언과 판박이인 "풀을 죽이려면 뿌리도 죽여야 한다."라는 말을 남긴 [[폴 포트]] 역시 [[킬링필드]] 피해자들에게 적용된 연좌제가 가장 먼저, 가장 철저히 적용되어야 하는 인물이었다.] 지옥과도 같은 [[정치범수용소/북한|정치범수용소]]에 가두고는 학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단체생활을 통해 국민들이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만들어[* 김일성을 숭배하던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도 2중 감시를 통해 국민들을 억죄긴 했으나, 루마니아 출신으로서 '''그런 감시를 직접 몸소 경험했던'''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사무총장인 그렉 스칼라튜에 따르면 ('''최소''' 4중 감시를 하는) 북한이 이런 문제에서 한 수 위라고 한다. [[https://www.rfa.org/korean/commentary/greg/gscu-12222020093323.html|#]]] 국민들이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도록 한 데다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며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국민들을 [[북한/계급|3개의 계급]]으로 나눠 [[카스트]]와 같은 전근대적인 신분제를 20세기에 구축하는 등[*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과 [[민주 캄푸치아]]도 '성분'에 따라 '신분제'를 만들기는 했으나, 북한에 비하면 지속 기간도 매우 짧았다.] 46년간 집권하면서 무자비한 학살과 인권 탄압을 자행하며 폭압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했다. 더욱이 김일성은 사회주의가 반대하는, 자신의 자손에 대한 권력 세습[* [[안드레이 란코프]]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권력을 세습한다고 할 때 해외의 공산주의자들은 대다수가 김일성의 세습 시도를 반동 거짓 선전이 분명할 것이라고 믿을 정도였다고 한다. [[https://www.rfa.org/korean/commentary/lankov/alcu-05182023091936.html|#]]]에 수십년간 공을 들여 이런 실태가 영구적으로 유지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극단적인 권력지향성과 더불어 비도덕적이며 비열한 일을 많이 했다. 자본가들의 투자를 받을 때는 온갖 좋은 약속을 다 하지만 일단 투자를 받은 후에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70년대에 빼앗은 스웨덴 [[볼보]] 자동차가 아직도 시골길을 달리고 있다고 하며, 스웨덴의 채무국 가운데 채무 이행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나라는 북한 뿐이라고 한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루마니아조차 외채를 갚는다며 극단적인 긴축정책으로 민생을 파탄낼 때도 '외채를 갚아야 하니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선전을 했지, 김일성처럼 외채가 있다는 사실을 아예 숨기고 배째라는 식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축출되고 처형되기 직전에 진짜로 외채를 다 갚긴 했다.] 심지어 '''소련과 중국의 빚을 제때에 갚지 않는 일조차 흔했다.''' 1980년대에 조국의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마음으로 재일동포들은 북한에 투자하였지만 자기들이 이를 가로채고 투자금도 거의 돌려주지 않았다. [[https://www.rfa.org/korean/commentary/ae40d604c544/khacu-05152023110002.html|#]] 게다가 외부 교류를 통해 자신에게 반하는 뜻이 생기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해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 아니라 양국의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도 [[38선]]을 막아 남한에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만나지도 못하게 했고,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전쟁이 멎고 30년이 지나서 김일성 생전 단 한 번 실시하여 남북 __도합__ 100명만 만나게 하였다. '''남한만 해도 [[실향민]] 약 140만 명 정도의 인원은 죽기 전까지도 고향 땅을 밟을 수 없었고, 이산가족은 [[1971년]] 기준으로 당시 남북한 인구의 1/5에 달하는 총 천만 명은 된다고 평가받았을 정도다.'''[* UN 추계 기준으로 1970년의 남북한 인구는 4천 5백만 정도라고 추정되었고 신문 기사에서는 '5천만 남북인'이라고 묘사되었다. 60~70년대만 해도 남북한 모두 출산율이 대체출산율보다는 높았기에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여 21세기에 이르러서는 7천만명 대까지 증가한 것이다. [[https://freshyk.tistory.com/257|#]] 참조된 기사를 보면 나오지만 이런 사람들의 8촌까지 하면 당시 남북한 주민 모두를 포함할 수 있다는 말이 있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1120600329204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1-12-06&officeId=00032&pageNo=4&printNo=8056&publishType=00020|#]]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프로그램에서는 김일성에게 복수를 해야되겠다며 [[https://www.youtube.com/watch?t=30m18s&v=x8fo5fie15E&feature=youtu.be|군대에 말뚝을 박은 사람도 나왔고]], [[https://www.youtube.com/watch?t=16m00s&v=DQaRcYjtusk&feature=youtu.be|김일성에게 가능한 욕을 다 퍼붓는]] 등 한맺힌 절규가 잇따랐다. 그나마 김정일 시대가 되어 가족을 만난 경우도 있었으나 3만 명도 되지 못했다. 당시 만난 사람들조차 교도소 면회하는 사람마냥 감시받아야 하여 오히려 상봉 후 우울증에 시달린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801290480941408|#]] 2021년까지도 남한에서 이산가족 찾기를 신청하여 적극적으로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사람 중에서도 '''80%'''는 가족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https://www.nocutnews.co.kr/news/5671092|#]][* 이는 동서독이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후에도 이산가족끼리 친인척의 결혼식 정도는 갈 수 있었던 것과 완벽히 대조된다. [[https://www.yna.co.kr/view/AKR20180819001200082|#]] 사실 동독은 서독에게 북한 수준의 무력 도발은 전혀 하지 않았다.] 세습을 가장 반대하는 사회주의를 거스르면서 자기 자식도 폭군으로 키웠지만, 정작 혈육을 다른 나라보다도 중시하던 [[한국인]]에게 죄값을 계산하기도 힘든 행위를 하던 것이다. 더욱이 김일성은 권력을 얻는데 쓰던 거짓말을 숨기기 위해 변화하는 국제정세조차 무시한 채 해외 정보를 철저히 차단하고는 "[[세상에 부럼없어라]]"와 같은 선전 문구들을 동원해 국민들에게 북한이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라고 세뇌시키면서 국정 운영도 폐쇄적으로 해서[* 김일성 시기 북한이 얼마나 폐쇄적이었는지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의 존재에 대한 암시는 물론이고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민주 캄푸치아]] 정권의 붕괴 사실 자체를 감췄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는 남한으로 치면 [[대한민국 군사정권]]이 [[남베트남]] 정권의 붕괴 사실 자체를 감춘 것과 같다. 덤으로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 사실조차 전혀 알리지 않다가 김일성 사후인 [[2001년]]에야 조선대백과사전에 이를 실으며 처음으로 달 착륙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그가 죽을 무렵에는 북한을 명실상부 세계 최악의 독재국가로 만든 것은 물론이고[* 그와 비교될 만한 수준의 독재자들과 비교하면 [[아돌프 히틀러]]는 한반도의 해방 전인 1945년 4월에 자살한 데다가 [[이오시프 스탈린]]은 6.25 전쟁 휴전 전인 1953년 4월에 사망했으며, [[마오쩌둥]]은 1976년에 사망했고, [[마시아스 응게마]], [[이디 아민]], [[폴 포트]]는 모두 1979년에 축출되었다.] 경제 수준마저 [[한강의 기적]]으로 선진국 문턱까지 솟아오른 남한과는 정반대로 북한을 최빈국 문턱 수준으로까지 후퇴시켰다. 비록 북한의 세계 최빈국화는 김정일 시기에 들어와서야 이루어진 것이긴 하지만, 북한의 최빈국화는 김일성 체제에 기반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김일성을 북한을 세계 최빈국으로 만든 장본인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박정희]] 시기 한국이 경제성장을 했어도 집권 말기에야 겨우 중진국에 진입한 수준인데도 박정희를 보고 보수 층에서 '한국을 선진국으로 만든 인물'이라고 평가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럼에도 김일성이 워낙 국가를 폐쇄적으로 운영하고 국민들을 세뇌시킨 나머지 김일성의 집권기에는 많은 [[북한]] 주민들이 자신이 노예화되고 국가 상황이 나빠진 줄도 몰랐다.[* 북한 주민들이 [[고난의 행군]] 시기까지도 자신들이 한국보다 잘 산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북한의 폐쇄성을 보여주는 에시로 유명하지만, 사실은 김일성이 해외 정보를 현 북한도 개방적으로 만들 정도로 워낙 극단적으로 차단한 나머지 [[안드레이 란코프]]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 주민들은 80년대 후반까지도 '''북한이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인 줄 알고 있을 정도였다고 하며,''' 덤으로 이와 비슷한 시기까지만 해도 북한 사람들은 상술한 바와 같이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거품경제]] 시절의)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줄 알 정도였다고 한다. 한류나 중국의 외부 문물이 들어온 2000년대 중후반 이후에야 북한 주민이 자신의 국가가 가난함을 어렴풋이 인지하게 되었다.] 남한에 가족이 있던 사람들, 기독교 같은 종교를 믿었던 사람들[* 평안북도의 [[선천군]] 같은 지역은 분단 전 주민의 50% 정도가 기독교도였는데, 현재의 남한의 어느 시군구도 이 정도로 주민 중 기독교인의 비율이 높은 곳이 없다.] 등 분명 속앓이를 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지만 그 불만은 드러낼 수조차 없었다. 이 때문에 남북한의 화해·재통일 및 북한의 정상국가화가 기약 없이 보류되고 영원히 없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되었다. 명색이 갈라진 한반도의 북쪽의 지도자였으면서 통치기간 내내 한국과 세계에 적대 위주의 태도만 고집했으며, 전쟁은 비롯하여 군사적 도발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후계자들까지도 그런 입장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가 워낙 말이 통하지 않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해방정국에서 김구, 김규식, 여운형 등의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들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소 간의 갈등 심화와 좌우 사이의 새 나라의 정치적·경제적 방향성에 대한 대립 때문에 어려웠던 것도 있었지만 정부 수립 이후에도, 전쟁이 없은 채 국내 정치인들 간에 타협이 어느 정도 되었다면 분단이 실제 역사만큼 길어지거나 남북 관계가 실제 역사만큼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전후 긴 세월에 걸쳐 남북한의 청년들이 군대에 징집되어 그들의 시간을 잃어 온 것까지 이 모두가 김일성과 그 자신이 만들어 놓은 폭압적인 체제로부터 비롯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의 아들과 손자인 [[김정일]]과 [[김정은]]은 모두 김일성이 닦아놓은 기반과 정책 위에서 권력을 세습받아 잔혹한 학정과 대외 도발, 국민 세뇌, 우상화, 사치를 벌이고 무능한 경제정책과 대북제재 자초로 경제를 후퇴시키는 것인 만큼 김일성 한 명만 아니었어도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와 그로 인한 모든 비극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북한이 지금처럼 세계적 경제대국들이 즐비한 [[동아시아]]의 유일무이한 극빈국이자[* 아프리카의 최빈국들 중에는 북한보다 가난한 나라가 더러 있긴 하지만 이들은 거의 모두 내전과 쿠데타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나라들이다. 내전과 쿠데타의 후유증이 없는 국가 중 북한보다도 가난한 나라는 [[말라위]]와 [[마다가스카르]]가 전부다.] 2차 대전 후 최악의 독재국가 중 하나가 될 일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김일성은 전술한 것처럼 반세기 동안 집권하며 만행들을 저질러왔음에도 고국 내부에서는 사후 30년이나 된 현재까지도 그 어떠한 비판조차 허용되지 않은 채 계속되어 마치 신인 것처럼 숭배되고 있으니 더욱 통탄할 일이다. 전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정도로 극악한 독재자로 여겨지지만,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남북 분단 및 고착화 + 6.25 전쟁 + 수많은 이산가족 양산 + 남북 간의 대립 + 남한 반공주의의 극단화[* 실제로 남한의 [[개신교]]가 반공 성향이 강한 것도 북한의 기독교 탄압을 피해 월남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심하게는 [[한경직]] 목사처럼 [[서북청년단]]을 옹호하는 일도 있었다. 더욱이 북한은 공산권 국가 중에서도 [[민주 캄푸치아]]를 제외하면 제일 극단적인 케이스였는데 남한 사람들은 공산주의 국가 중에서도 가장 기형적인 모습을 가장 자주, 그것도 가장 가까이에서 접하다 보니 공산권에서도 매우 이단적인 모습을 전형적인 공산주의로 간주하게 되었다.] + 남북한 징병제 + 북한의 인권탄압 + 북한의 최빈국화'의 책임을 혼자 전적으로 가진 원흉으로서 [[이완용]]과 함께 한민족 역사상 최악의 인물임과 동시에 한민족의 반역자로 영구적으로 비판받는 악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완용보다 김일성이 더욱 극악무도한 것이, [[일제강점기|이완용이 만든 체제]]는 길어야 40년 갔으나 [[북한|김일성이 만든 체제]]는 2024년 현재 그의 2배에 가까운 76년 동안 현재진행형이며, 김일성은 이완용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을 넘어 이완용을 능가하는 추잡한 악행들을 저질렀음에도 이완용 이상으로 안락하고 호화로운 삶을 살다가 아무런 죗값을 치르지 않은 채 이완용 이상으로 오래 살고는 편하게 죽었기 때문이다. 물론, 전세계적으로는 그냥 식민지 국가의 일개 관료에 불과한 이완용과 달리(당장 한국 입장에서 치환해 보면 이완용도 '''가볍게 능가하는''' [[리투아니아]]의 매국노 [[안타나스 스녜츠쿠스]]는 인지도가 전무하다) 전세계 최악의 독재국가를 정립하고 전쟁과 엄청난 인권유린을 저지르며 외교적인 도발을 벌인 김일성의 인지도가 압도적으로 높으니 자업자득이다.] 그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지 않은 한국인들도 그를 [[아돌프 히틀러]]나 [[폴 포트]]도 능가하는 악마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악행들을 수도 없이 저질러왔지만, 특히나 6.25 전쟁을 직접 겪었던 대한민국의 1940년대생 이전 노인 세대들은 김일성에 대한 차원을 달리하는 분노를 가지고 있다. 김일성이 야기한 6.25 전쟁으로 인하여 '''직접''' 가족이 죽거나 이별하고 김일성의 군대로 인해 재산도 빼앗기고[*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은 북한 치하의 서울에서 숨어다니며 자신이 세운 가게의 물건을 김일성의 인민군에 의해 빼앗겼다.] 김일성이 점령지에서의 권력 강화를 위해 재산과 권력에 대한 피해 의식을 기반으로 부추기던 질투심과 증오로 인해[* 남쪽에도 해방이 되자마자 농민의 토지 '소유', 가진 놈의 것을 뺏어서 '내 것으로' 만든다는 식의 원래 사회주의와는 다른 선전을 펼쳤고, 토지를 무작정 몰수하여 권력이 약한 사람들에게 주는 식의 북한식 토지개혁을 이런 사람들이 추진하였다. 처음에는 [[동유럽]]식으로 저런 개혁을 온건하게 하려고 한 걸 김일성이 잔인한 방향으로 밀어 붙인 것이다. [[http://www.koreanhistory.org/3968|#]] 이런 김일성에 대응에 한국 정부도 일반 좌익과 이런 세력을 구분하지 못하고 매우 극단적으로 대응하여, 북한의 학살과 같은 지시에 좌익들이 잘 따른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고 나서도 김일성대학 입학 같은 출세를 미끼로 자신들의 토지개혁을 이런 좌익들을 거쳐 하게 했다고 한다. [[https://v.daum.net/v/20100624174712803|#]] 북한에서의 역사의 흐름을 보면 저 땅을 국유화시켰기에 김일성이 거짓말한 것이다. [[중국공산당]]조차 부농의 토지를 마구 빼앗지는 않고 보상을 추진하려던 적도 있는데 북한은 그냥 가진 것이 많은 자들의 재산을 다 빼앗게 해주고 출세시켜 준다는 식의 정책에 가까웠다. [[http://chinesewiki.uos.ac.kr/wiki/index.php/%EC%A4%91%EA%B5%AD%EA%B3%B5%EC%82%B0%EB%8B%B9%EC%9D%98_%ED%86%A0%EC%A7%80%EA%B0%9C%ED%98%81|#]] '''이런 집성촌의 같은 성씨도 죽이던 학살에 2010년 정도 돼서야 위령비를 세우거나 2020년대에 들어서 진상이 알려지기 시작하는 마을도 있다.'''] 마을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싸움을 하는 등 비극을 겪고, 나라가 3년 만에 세계 최빈국으로 초토화되는 꼴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김일성의 생전에는 [[인터넷]]이 요즘과 비교하면 없다시피했기에 김일성의 만행이 해외에 그렇게까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고, 이 때문에 해외에서는 오히려 아들인 김정일은커녕 손자인 김정은에게도 악명이 밀린다. 정치적 측면에서 좌우파 모두에게도 평가가 매우 좋지 않다. 좌파에게서는 세습과 [[https://marx21.or.kr/article/389|계급적 착취]]나 앞뒤를 안 가리는 권력욕[* 40년대 후반의 해방정국에서조차 오기섭 같은 입장의 북한의 사회주의자들은 지주, 자본가라도 돈만 내면 되나며 청년동맹 같은 조직을 만들고서는 그곳에서 충성하는 사람을 사회주의 이념을 따르는 사람보다 더 좋아하는 행태를 싫어하고는 했다. 애시당초에 해방 1년도 되지 않아 가장 먼저 숙청시킨 인물이 친일파, 우파 정치인이 아니고 [[현준혁]] 같은 민족주의 진영에서도 지지받는 온건한 사회주의자라는 의혹이 있을 정도였다. 친 소련 성향보다 민족주의적 좌파 성향이 강한 그를 로마넨코 소장을 설득하여 암살의 허락을 받고 소련이 이를 무마시켜주었다는 것이다. 즉 김일성의 무리는 '''자기들이 공산주의자를 암살해놓고서는 민족주의자들의 소행이라는''' 선전을 했다는 것이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646263|#]]][* 더 단적인 예로는 빨치산을 때려잡겠다며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사건인 [[거창 양민 학살사건]]을 주도한 [[최덕신]]은 월북을 해서 웬만한 사회주의자 이상으로 떵떵거리며 살다가 생을 마감한 사례도 있다.]으로 비판받는다.[* 예를 들어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는 2000년 5월 17일호에 북한에 대해 "북한 체제를 공산주의와 동류로 취급하는 것을 참을 수 없으며, 북한 스스로도 감히 공산주의를 표방한다는 사실을 좌시할 수 없다"고 언급하였고,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5/10/16/2005101670301.html|#]] [[태영호]]의 증언에 따르면 [[영국 공산당]]을 위시한 일부 공산당이 우익 정당보다 적극적으로 북한을 비난하는 것이 참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https://m.blog.naver.com/genseoks1/221332652845#|#]]] 또한 민족주의자에게도 자국민 인권 탄압과 6.25 전쟁 개전으로 비판받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