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윤환 (문단 편집) === 정치인 시절 === || [[파일:D00D25F1-46CA-4322-A7C5-26CCD11D5C22.jpg|width=100%]] || [* 옆에 있는 [[노태우]]도 175cm로 그 당시 사람으로서는 상당히 장신인데도 불구하고 김윤환이 확연하게 더 크다.] 고등학교 동창인 [[노태우]]의 권유로[* 사석에서는 [[전두환]], [[노태우]]와 서로 반말하면서 술 마시는 사이였다고 한다.] [[민주정의당]] 창당 멤버로 들어갔다. 민주정의당 전국구로 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권 아래 [[청와대]]와 집권당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면서 정치권을 주무르는 [[실세]] 중의 실세로 군림한다. [[전두환]] 정권 후반기인 1985년 2월 [[노신영]] 국무총리 내각이 출범할 때 [[문화체육관광부|문화공보부]] [[차관]]으로 입각하였다. 문공부 차관으로 있던 1986년 여름, [[미국]]에서 열린 국제 공보관 회의에 참석하려 갔다가 외신 기자들로부터 "대한민국의 차기 대통령은 누가 유력하냐"라는 말에 사견임을 전제로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유력하다"는 발언을 한 게 문제가 되어 귀국길에 [[국가안전기획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말 그대로 조사만 받았다. 고문을 했다거나 강압적인 수사를 한 게 아니라, 왜 그런 발언을 하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질문했다고 한다. 김윤환 본인은 기자들이 하도 귀찮게 물어서 그냥 대충 둘러댄 거라는 식의 답을 했고 당시 특별히 수상한 뒷일 같은 것도 없었던지라 금방 풀려났다.] 1년 뒤의 일을 예언한 셈이니 훗날 붙게 될 '킹메이커'라는 별명이 진짜인 셈. 1986년 8월 개각 때 [[허문도]]의 뒤를 이어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정무제1수석비서관]]에 임명되었다. 1987년 7월 [[김정렬(1917)|김정렬]] 내각이 출범하자 [[박영수(1928)|박영수]]의 뒤를 이어 무정부 시기의 첫이자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1988년 대통령비서실장에서 퇴임한 뒤 민정당으로 복귀했고, 2개월 뒤 [[제13대 국회의원 선거|13대 총선]]에서 고향인 경상북도 군위군·선산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여소야대의 13대 국회가 개원한 뒤 민주정의당 원내총무에 임명되었고, [[평화민주당]] 원내총무 [[김원기(1937)|김원기]], [[통일민주당]] 원내총무 [[최형우(정치인)|최형우]], [[신민주공화당]] 원내총무 [[김용채]]와 함께 4당 체제를 이끌어가는 원내 사령탑으로 화려한 활약을 펼쳤다. [[3당 합당]] 이후에도 [[민주자유당]] 원내총무, 사무총장, 정무 제1장관을 맡으며 정계의 중심에서 활약했고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같은 지역구에서 4선에 성공했다. [[제14대 대통령 선거|14대 총선]]을 앞두고 김윤환은 당대의 '''[[킹메이커]]'''로서 정치적 영향력이 절정에 올랐다. [[김영삼]]에게 거부감을 갖고 있던 구 [[민주정의당]] 출신 [[민정계]] 인사들을 설득해서 강력한 김영삼의 지지 세력, 일명 신민주계를 규합하여 결국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한다. 당시 김윤환은 민정계 인물들에게 '국민들이 군부 출신 민정당 인물들에게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으니 일단 김영삼을 세워서 정권을 이어가고, 그 다음에 우리(TK+민정계)가 주도하는 보수 정권을 창출하면 된다.'는 시나리오를 제시했다고 한다. 이렇게 김윤환은 [[전두환]] 밑에서는 친구인 노태우를 후계자로 옹립해 대선에서 승리했고, 노태우 밑에선 [[김영삼]]을 후계자로 지원해서 역시 대선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 이후 김윤환은 정치권에 몰아친 사정의 태풍을 피해 해외에서 체류하다시피 했다. TK 민정계의 동료였던 [[박준규(1925)|박준규]]와 [[박철언]] 등이 대거 정계에서 축출당하는 상황[* 박준규는 부동산 투기 의혹 이후 국회의장과 국회의원직을 모두 사퇴해야 했고, [[박철언]]은 슬롯머신 사건에 연루되어 국회의원직을 잃었다.]에서 김윤환은 대통령을 만들어낸 2인자임에도 오히려 몸을 사려야 했다. 그런 와중에 1993년 대구 [[동구 을]] 재보궐선거, [[1994년 재보궐선거]]에서 민자당 후보가 TK에서 모두 낙선하자 1994년 말 [[서청원]]의 뒤를 이어 정무 제1장관에 임명되었다. 1995년 2월 [[김종필]]이 민자당을 떠나고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6월 지방선거]]에서 민자당이 참패하자 다시 민자당 [[사무총장]]으로 복귀했고 얼마 뒤에는 민자당 [[대표|대표위원]]에 취임하여 명실상부하게 여당의 2인자가 되었다. 민자당이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개정한 뒤에도 김윤환은 대표위원으로 유임되었고 [[제15대 국회의원 선거|15대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당시 신한국당의 국회의원 당선자 139명 중 그의 계보로 꼽힌 당선자는 무려 26명으로 전체의 5분의 1에 육박했다. 총선 승리 이후에는 대표위원직을 사퇴하고 [[이홍구]] 전 국무총리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1997년 4월 6일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국민 대화합이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찬성 입장을 밝힐 예정"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김윤환 신한국당 고문도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을 건의하였다"는 보도가 나옴으로써 집권당인 [[신한국당]] 내부에서는 [[전두환]], [[노태우]]의 형 집행이 확정되기도 전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논의가 오가기 시작했다.[* 1997.4.8 경향신문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40600329101012&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4-06&officeId=00032&pageNo=1&printNo=16070&publishType=00010|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에 대해 입장 밝힐 예정]]][*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40600209101006&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4-06&officeId=00020&pageNo=1&printNo=23501&publishType=00010| 李(이)대표全(전)|盧(노)씨 사면건의 검토 金潤煥(김윤환)고문"대법 刑(형)확정후 실시 이미 건의"]]] [[1997년]] [[4월 17일]]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형 집행이 확정되자 집권당인 [[신한국당]] 내부에서 본격적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관련 논의가 시작됐다. 당시 신한국당의 김윤환 고문과 대구-경북쪽 인사들을 비롯한 구 여권 출신 대선 주자들은 종전부터 사면에 찬성하는 쪽에 섰다. 김윤환 고문은 "부정축재한 거 환수하고, 여러 가지 한다면은 죄는 주지만 벌은 안 주었으면 하는 그런 심정이다."라는 발언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처벌에 봐주기식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발언으로 당내 분위기를 주도해 나갔다. 이러한 경북, 경상도 연고,지역주의 정치인들의 노력에서 김윤환은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구테타 세력의 처벌을 무력화시키려고 애썼으며 결국 이루게 된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사회와 민심에 반하여 12.12 사태의 반란군 주역들은 특별사면 받게되었고 12.12 사태 주역들의 재산환수 조치는커녕 사면받은 구테타 주역들은 국방부를 상대로 군인연금을 달라며 소송까지 벌리는 등 구테타 세력의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65839_19482.html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 최종 판결후 사면 문제 제기]]] 이렇게 막강한 세력을 구축한 김윤환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15대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으나, 이내 자신이 후보가 될 가능성이 없음을 깨닫고 [[이회창]]을 차기 대통령으로 밀면서 다시 '킹메이커'로서의 위세를 떨쳤다. 당내 민정계와 [[영남]] 세력을 대거 규합해 이회창을 대선 후보로 옹립한 김윤환은 3회 연속으로 대통령을 좌지우지하고 옹립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울 뻔했지만, 정작 이회창은 [[병풍#s-4|아들들의 병역 문제]]와 [[이인제]]의 이탈을 막지 못하면서 대선에서 패했다. [[잃어버린 10년#s-5|여당에서 야당으로 전락한 이때부터]] 김윤환의 정치적 생명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고,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16대 총선]]를 앞두고는 자신이 밀었던 이회창 총재에게조차 구시대 정치인으로 몰리면서 [[토사구팽|팽]]당해 공천을 못받고 한나라당에서 쫓겨난다.[* 이 당시 이회창의 참모가 [[윤여준]]이었는데, 그간 총선의 화두는 [[공천]]이었음을 상기시키며, 김윤환을 위시한 민정계, 구시대 인물들을 쳐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이회창은 계속 망설이다가 결국 윤여준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윤여준의 전략대로 중진급 현역 의원과 정계 거물 수십여명을 날리고 정치 신인들을 대거 전면에 내세운 개혁 공천은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면서, 예상을 뒤엎고 한나라당의 총선 승리를 이끌어냈다.][* 후일 이회창은 김윤환과의 결별이 살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중 하나였다고 회고했다.] 이후 [[조순]], [[이수성(정치인)|이수성]], [[박찬종]], [[이기택]], [[신상우]] 등 3김 정치 + 이회창에게서 팽당한 정계의 옛 거물들을 끌어모아 [[민주국민당(2000년)|민주국민당]]을 차렸다. 재야의 [[장기표]]나 심지어 신군부 출신 [[허화평]]도 있었다! 이렇게 거물과 명망가만으로는 상당히 그럴싸했지만, 선거를 앞두고 급조한 정체성이 불문명한 정당으론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결국 양당 구도에 밀려 지역구에서는 [[춘천시]]의 [[한승수]] 前 경제 부총리, 전국구에서는 후보 1번이던 [[강숙자]] 등 총 2명 당선에 그치는 참패를 당했다. 본인 역시 자기 지역구인 구미시에서 한나라당 [[김성조]] 후보를 상대로 10%p를 약간 하회하는 격차의 패배를 당했다.(41.7% : 32.1%) 16대 총선 낙선 후 김윤환은 조순의 뒤를 이어 민주국민당의 대표를 맡아 당을 추스리는 역할을 하게 되었지만.. 이때부터 그의 몸에는 2년 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암]]이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회창에게 토사구팽을 당한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아 [[화병|그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쳤다.]] 당시 김윤환을 만났던 [[최병렬]]의 말에 따르면 함께 [[스테이크]]를 시켜놓고는 썰어놓지도 않은 채로 한 시간이 넘도록 이회창에 대한 분노를 쏟아냈다고 한다. 암이 자라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이후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의 약세와 [[자유민주연합]]의 패망으로 나름대로의 입지를 살려 3당 연합(혹은 [[DJP연합|DJP 재연합]])에 낄 수 있었지만,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 통과로 DJP 연합이 완전히 붕괴되자 유일한 지역구 의원 [[한승수]]도 탈당해버렸다.[* 한승수는 무소속 의원 신분으로 [[외교통상부]] 장관직을 유지하다가, 2002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하자 7월 장관을 사퇴하고 한나라당에 입당해 이회창 후보의 외교담당 특별자문이 되었다.] 이 시기 [[박지원(1942)|이분]]과 함께 "[[영남후보론|호남이 밀어 주는 영남 대통령론]]"으로 [[이회창]]을 패망시키는 정치공학적 구도를 구상했고 인지도가 낮아 가능성이 없다고 여겨졌던 [[노무현]]이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노무현과 김윤환이 협력하는 일은 없었고[* YS에게 팽당한 5공, 유신 세력을 포용한 김대중과는 달리, 노무현은 3당 합당 당시부터 보여주었던 자신의 원칙대로 옛 군부 정권 시절 인사들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대신 [[친노|자신과 뜻을 함께했던 주변 사람들]]을 세웠다. 5공 시절부터 킹메이커로 이름을 날린, 그것도 TK의 좌장이나 다름없던 김윤환이 노무현과 연합할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던 셈.] 김윤환 본인은 대선 직후 [[신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2114|#]] 이후 신장암 치료를 위해 [[국립암센터]]에 입원했고 [[미국]]까지 가서 투병했지만, 결국 회생불가 판정을 받고 귀국한 뒤 [[2003년]] [[12월 15일]]에 사망했다. 향년 71세. 대화와 협력을 명분으로 실제론 막후 밀실에서 정치자금과 권력을 배경으로 야합하는 일본식 정치의 대명사였다. 한국에서 내각책임제에 부정적인 이유중 하나가 이런 정치인이 오랫동안 의회를 장악해 자기들끼리 나눠먹는 계파정치판으로 만들 거란 우려이고, 실제로 지금의 내각제도 아니고 대통령중심제도 아닌 어정쩡한 대한민국 국회구도에서 보수계파의 노회한 수장 이미지를 구축한 인물. 하지만 노무현이 실제 "[[영남후보론|호남이 밀어주는 영남 대통령]]"으로서[* 개혁 성향의 영남 후보를 세워서 영남표를 잠식하고 수도권의 개혁 성향 야당표를 결집시켜야 한나라당의 호남 포위 구도를 깨뜨릴 수 있다는 내용이다. 실제 [[천하삼분지계]]가 [[제갈량]]만의 독창적 사고가 아니라 당시 주요 [[책사]]들의 공통적 인식이었던 것처럼 '호남이 밀어주는 영남 대통령' 소위 영남후보론도 정치권에서 민주당이 승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나리오로 여겨지던 내용이다. 당시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선 [[노무현]]의 지지율이 2~3%에 불과할 때도 일단 민주당 후보 경선만 통과한다면 대선 승리 가능성은 가장 높을 것이란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당선된 것이나, 홀로 여러 계파를 다룬 점 등 정치적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뿐만 아니라 민주화 운동가로 활동하던 시절 김윤환이 속해 있던 민주정의당에 맞서 싸웠던 [[김근태]]는 국회의원이 되어 김윤환을 만난 다음 "그래도 김 선배 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장내에서 민주주의의 명맥이 이어질 수 있었다."는 평가를 했고, 언론계 인사들 역시 "허주는 순리를 바탕으로 정치를 물 흐르듯 한다."는 호평을 아끼지 않았던 점을 보면 친화력만큼은 역대 정치인들 가운데 최고로 손꼽힐 수 있을 만큼 대단했던 사람이다. 죽기 직전에 낙선하고 정계에서 은퇴한 이회창이 사과의 뜻을 표했으나 공식적 화해 없이 세상을 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