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윤호(군인) (문단 편집) == 생애 == [[1930년]], [[경성부]](現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경신고등학교(서울)|서울경신고등학교]] 졸업 후 [[1950년]] [[육군사관학교]] 10기생으로 [[임관]]했다. 이 때 육사 생도들은 [[6.25 전쟁]] 발발로 인해 몇 개월 정도의 단기 교육을 받고 바로 임관하여 전쟁에 투입되었으며[* 11기부터가 4년제 정규 과정을 거친 육사 세대인데, 이들은 스스로를 '정규 육사 1기'로 부를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 자부심은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육사 11기 경상도 출신 멤버들이 세운 [[하나회]]로 이어진다. 아이러니한건 자부심을 가지는 이들은 정작 6.25 전쟁 때 참전하지 않고 후방에서 교육을 받은 수혜를 누린 세대라는 것. 이들이 무시하는 단기 육사 선배들은 11기가 후방에서 안전하게 교육받을 때 전쟁통에서 목숨걸고 뛰어다녔었다.] 김윤호도 생도대대 소총병으로 활약했다. [[조선인민군]]과의 근접전에서 오른쪽 허벅지에 기관총 관통상을 입기도 했다. 이후 [[베트남 전쟁]]에도 주월 [[제9보병사단]] [[부사단장]]으로 참전했고 사단장, [[육군교육사령부]] 부사령관을 거쳐 [[육군보병학교]]장(당시 계급은 소장)을 맡게 된다. 그러던 중 [[1979년]],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게 되는데, 당초 김윤호는 반란군 멤버는 아니였지만 반란군 수뇌부였던 [[황영시]] 중장의 뒷수습을 위한 도움 요청을 받아 다음날 새벽 5시에 서울로 상경하여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에 합류하게 된다. 그 후 반란군 수뇌부였던 [[전두환]], [[노태우]],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와 더불어 6인 위원회의 일원으로서 군부 개편 작업을 진행했다. 6인 위원회는 숙군을 명분으로 하여 쿠데타 저항자 및 반대 세력의 장성들, [[정승화]] 계열 등 잠재적 위험 장성들, 8~10기의 장성들[* 하나회가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는 심각한 인사 적체에도 있었다. 1~10기가 1년도 안되는 단기 교육으로 배출된 후 6.25 전쟁을 거쳐 확장된 군의 자리들을 채우면서 초고속으로 진급하는데 비해, 11기 이하 정규 육사 세대들은 본인들의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윗선배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는지라 진급이 적체되어 불만이 극심했다.] 등 대략 40명을 합동 전역식을 통해 예편시켰다. 김윤호가 불려온 또 한가지 이유는 대미접촉을 위해서 였는데[*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이 자신의 통제를 무시하고 최전방 병력을 빼돌려 쿠데타에 가담시킨 것에 매우 격노하여 쿠데타 진압을 주장한 것에서 보이듯 신군부는 미국의 노여움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었다.], 주미 대사관에서 무관으로 근무했던지라 영어에 능하고 미군 고위층과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김윤호는 주한 미국 대사관으로 가서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12.12 군사반란을 변호하고 신군부의 정치 개입은 없을거라고 ~~~거짓~~~약속했다. 이러한 공로로 김윤호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황영시]]의 뒤를 이어 1군단장을 맡게 되며 신군부가 장악한 5공화국 정권에서 출세 코스를 달린다. 반란의 핵심 멤버는 아니였기 때문에 핵심 요직들을 맡지는 못했지만 대장 진급 후 [[제1야전군사령관]]을 거쳐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까지 역임했다.[* 당시 합참의장은 지휘권 없이 대통령/국방장관에 대한 자문 역할을 수행하는 명예직에 가까워서 핵심 요직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후 1990년 국군조직법 개정을 통해 합참의장은 지금과 같은 3군 통합 지휘권([[군령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군령권]]과 [[군정권]] 모두 [[육군참모총장]]이 가지고 있었다.] 합동참모의장으로 있던 1983년 [[5월 5일]]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이 일어났는데,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전두환]]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의 지시로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이 군을 지휘하게 하자 이에 반발하였다. 이 사건의 여파인지 합동참모본부 청사에 전기 누출로 화재가 나자 예편했다. 예편 후에는 [[대한석탄공사]]와 한국가스공사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2013년]] [[1월 12일]]에 향년 82세로 사망했고, [[대전광역시]]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사실 김윤호 대장이 하나회나 신군부 세력에 적극 동조, 협조해 영달을 누리기는 했지만 12.12 군사반란이나 5.18 민주화운동 당시 진압군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군부와 한통속이었음에도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