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유정(소설가) (문단 편집) == 생애 == 본관은 조선 시대의 명문 [[양반]] 가문 중 하나인 [[청풍 김씨]]. 아버지는 김춘식(金春植, 1874 ~ ?)이며 어머니는 [[청송 심씨]]로 8남매 중 일곱째이자 2남 6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0대조가 [[대동법]] 실시에 크게 공헌한 명재상 [[김육]]이고, 9대조는 [[현종(조선)|현종]]의 비 [[명성왕후]]의 아버지이자 [[숙종(조선)|숙종]]의 외할아버지인 청풍[[부원군]] [[김우명]]이다. 거기에서 계보는 김우명의 넷째 손자 도택(道澤)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고향에서는 꽤 명망 있고 부유한 지주였다.[* 그 유명한 만석꾼 집안이다. 할아버지 김익찬(金益贊, 1845 ~ ?)은 1891년([[고종(조선)|고종]] 28) 증광 [[진사|진사시]]에 3등 91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91_038878|입격한 뒤]] 통사랑(通仕郞, 정8품) 행(行)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종9품)를, 아버지 김춘식은 1894년([[고종(조선)|고종]] 31) 식년 [[진사|진사시]]에 3등 787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94_040410|입격한 뒤]] 군부주사(軍部主事)를 지냈다. [[김윤식(조선)|김윤식]]의 조카뻘이다.] 하지만 신분이 낮은 소작인들에게까지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 ||<-2>[[파일:attachment/Meokseoli.jpg]]|| ||[[휘문고등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사진의 모습.|| 이러한 집안의 후원으로 김유정은 [[서울재동초등학교|재동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29년 [[휘문고등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문학부|문과]]에 차례로 입학하는 등 현대식 교육을 배울 수 있었다. 어린 시절 김유정은 10살도 되기 전 유년기에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누나들은 죄다 시집을 간 상태에서 홀로 남겨져 눈칫밥을 먹고 지내다 보니 여성에 대한 집착도 강했고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으로 자라났다. 게다가 애정결핍의 후유증으로 인해 말을 더듬는 증세를 보였는데 이는 휘문고보 2학년에 눌언 교정소에서 겨우 교정 받을 수 있었다. 또한, 말년의 병약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유정은 휘문고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운동장에서 투포환을 가슴에 맞고도 끄떡하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으며 야구 · 축구 · 스케이팅 · 권투 · 유도 등의 스포츠와 소설 읽기, 영화 감상, 바이올린 연주, 하모니카 연주 등 다양한 취미활동을 즐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늑막염]]에 걸린 채로 후술할 [[박녹주]]와의 일을 겪은 후, 실연의 아픔을 처절하게 맛본 김유정은 방 안에 틀여박혀 폐인 생활을 하다가, 지병인 [[늑막염]]이 악화되고 [[치질]][* 사실 형제들의 도움으로 병원에서 치질 수술을 받았으나, 당시 의학의 치료기술이 떨어지다보니 수술을 받아도 치질이 다시 재발하기 일쑤라 소용없었다. 또한 가난해서 제대로 된 치료와 관리를 하지못하다보니 더욱 악화되어 죽는 순간까지 치질로 고통받았다.]까지 걸리게 되어 [[1930년]] 여름에 형 김유근[* 김유정을 비롯한 다른 식솔들에는 관심도 없이 물려받은 재산을 혼자 탕진하여 김유정이 평생 가난에 시달리며 불행하게 죽는 데 기여한 원인 제공자이다.]이 있는 고향 춘천의 실레 마을로 내려간다. 낙향의 원래 목적은 집안의 남은 재산까지 탕진하고 있는 형 유근을 상대로 재산 분배 소송을 내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춘천으로 내려간 그는 들병이[* 당시 농촌에서 병에 담긴 술을 갖고 다니며 농민들에게 술을 파는 여성. 물론 [[매춘|술만 팔지는 않았다]].]들과 어울리며 술에 빠져 살았다고 한다. 박녹주에 대한 미련이 여기저기 집시처럼 떠돌며 술을 파는 들병이로 옮겨진 것이다. 들병이가 등장하는 작품 『솥』, 『산골 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등은 거의 실화에 가깝다는 것이 뒷날 확인되었다.[* [[http://www.kimyoujeong.org/Kimyoujeong/GeumByeong]]] 이후 유정은 매형 정씨의 주선으로 병도 휴양할 겸 충청도의 어느 광업소 현장감독으로 내려가게 되지만, 이곳에서조차 광부들과 어울려 매일 술만 먹다가[* 이곳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돈을 다 써 버린 김유정은 이후 말 그대로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여생을 보낸다.] 결국 건강만 더 악화된 채 서너 달 만에 고향 실레마을로 돌아왔는데, 광산에서의 경험은 훗날 그의 소설 『금 따는 콩밭』, 『노다지』, 『금』 등의 모티브가 되었다. 3편의 소설은 모두 1935년 3월에 발표되었다. 이후 김유정은 실레마을의 낙후된 환경을 목격하고 [[1931년]] 야학당 금병의숙(錦屛義塾)을 설립, 교사가 되어 주민들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인근부락 청년들은 서울에서 내려온 자기또래 젊은이가 농민회니 부녀회니 만들어 놓고 꺼덕이는 꼴이 아니꼬워 김유정에게 걸핏하면 시비를 걸었고 결국 유정은 고향 마을에서 가끔 싸움판을 벌였다. 유정은 싸움만 붙으면 야학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 했는데(비교적 건장한 덩치와는 달리 병으로 쇠약해가는 자신의 건강에 대한 불만이기도 했을 것이다.) 증리에 살고 있는 당시의 제자들에 의하면 김유정은 싸움만 붙으면 몹시 날래게 움직여 수십 명을 상대해 쫓아버렸다고 한다.[[http://www.kimyoujeong.org/Kimyoujeong/GeumByeong|#]] 하지만 일제에 의해 얼마 못가서 야학이 강제로 해체되고[* 당시 일제는 야학이 독립 운동을 촉진시킨다며 금지하고 탄압했는데, 그렇다고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인것은 전혀 아니었다. 이러한 야학탄압 때문에 조선의 문맹률은 일제강점기 내내 70%를 웃도는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유산을 상속받은 맏형 김유근이 방탕한 생활로 자산을 다 날려먹었기 때문에 경성과 춘천의 집을 팔 지경에 이르렀을 정도로 집안이 기운다. 이에 김유정은 [[1933년]]부터 [[경기도]] [[광주시|광주]][* 정확히는 현재 [[하남시]] 상산곡동인 중부면 상산곡리. 현재 해당 자리는 [[중부고속도로]]가 들어서면서 사라져버렸고, 그 옆에 [[서원철폐#s-3.1.9|사충서원]]이 들어서 있다. ([[http://mbook.newstool.co.kr/hanam/view.php?eid=6475&aid=6485|관련자료]])]에 있는 큰누나에게 얹혀살게 되나, 이때 이미 김유정은 치질의 고통에다 늑막염이 폐결핵으로 악화되어 항상 누워 있는 신세였다. 게다가 누나 집도 가난했고, 공장 노동자들에게 밥을 팔며 살던 김유정의 누나는 [[기둥서방]] 남편 정 씨[* 일도 안 하고 놀고먹으면서 아내를 상습적으로 폭행하고 유정을 헐뜯으며 나가라는 압박을 주는 인간 말종이었다.]와의 심한 불화에서 생기는 스트레스를 병으로 누워 있는 동생 김유정에게 "내가 고생해서 벌어 온 돈이 아깝다. 네 놈은 돈은 못 벌어 오고 집에 가만히 누워있기만 하냐! 취직이라도 좀 해라."라며 풀었다. 물론 김유정의 체력과 건강을 보면 이것은 불가능했던 일. 나중에 김유정이 정 그렇다면 일본에 가서 막일이라도 하며 살겠다고 하자, 큰누나는 유정이 험한 일을 하다가 그나마도 좋지 않은 건강이 더 악화되는 것이 염려되어 유정에게 사과하였고 둘은 화해했다. 그러나 유정은 매형이 싫었기 때문에 거처를 큰누나 집에서 다섯째 누나 집으로 옮긴다. 이외에도 옷차림이 남루하다고 병원에서 간호사들에게 무시당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을 쭉 안타깝게 지켜보던 김유정의 절친한 친구인 소설가 안회남[* 소설가이자 문학 평론가로, 우화 신소설 [[금수회의록]]으로 유명한 [[안국선]]의 아들이자, (후에 월북하는) 무용가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의 육촌형이다. 김유정이 '닭과 뱀을 고아먹고서야 살아날 것'이라고 했던 아래의 처절한 편지가 바로 안회남에게 보낸 편지였다.(이 편지에는 안회남의 초명이었던 필승이라는 이름으로 언급되고 있다.) 안회남은 이 편지를 받고는 안타까워했고 나중에 답장도 해주기 전에 김유정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장례식장으로 와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김유정의 장례식 비용 일체를 부담하고 김유정의 미완성 유고를 유족으로부터 전달받기도 했다. [[6.25 전쟁]] 중 월북했으며, 휴전 후 총살당한 [[임화]]의 일파로 몰려 숙청되는 바람에 마지막으로 행적이 알려진 1954년 이후에는 언제 어디서 생을 마쳤는지에 대한 말년의 행적이 알려져 있지 않다.]은 김유정에게 "차라리 밖에 나가서 소설을 써보는 것이 어떻겠니?"라고 제안하였고 김유정은 비로소 [[1934년]], 본격적으로 문학에 대한 열정을 품고 [[구인회]]에 가입한다. 그 결과 [[1935년]] [[1월]] 소설 [[소낙비(소설)|소낙비]] 등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김유정은 등단한 지 2년 만인 [[1937년]] [[3월 29일]]에 결핵과 치질이 악화되어 29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이 2년 동안 김유정은 그야말로 목숨을 불태운 집필 활동을 했는데, 단편작들을 모두 이때 집필한 것은 물론 결국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장편도 하나 만들었고 심지어는 번역본까지 한 권 만들었다. 이렇게 '''그가 2년 동안 남긴 작품은 무려 30여 편이나 된다.''' 그의 열정이나 문학적 재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장례는 그의 형제, 조카들, 친구 안회남에 의해 화장으로 치러져 한강에 유골이 뿌려졌다. 죽기 전인 1937년 [[3월 18일]]에 친구 안회남에게 보낸 편지는 그가 치질과 가난에 얼마나 시달렸는지를 말해주며 처절함 그 자체다.[* 무엇보다 이 편지에서 당시 김유정이 지병의 악화로 죽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편지를 받은 안회남이 안타까워하며 도와주려고 찾아가려 했으나 이때는 김유정이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한 뒤였다.]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있다. 그리고 맹열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되겠다. 달리 도리를 차리지 않으면 이 몸을 다시는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의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백원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 다시 탐정 소설을 번역해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 되고 흥미있는 걸로 두어 권 보내 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일 이내로 역(譯)하여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 주마. 하거든 네가 극력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필승아. 물론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그 병을 위하여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나의 몸이다. 돈이 생기면 우선 [[닭]] 30마리를 고아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10여 마리 먹어 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쏘구리 돈을 잡아먹는다.[* 치질로 인해 고통받으며 돈이 없어 제대로 된 치료를 못 받는 것을 의미한다.] 돈, 돈,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하여 다오.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오. 기다리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