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유신/평가 (문단 편집) === 신라라는 국가에 대한 반발 === 당시 신라 지도층의 행적을 보면 처절하다 못해 굴욕적이기까지 한데 그 정점이 바로 '''[[치당태평송]]'''이다.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와 비교하며 까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현대인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비굴해 보이는 이런 어법은 신라 치당태평송만 그런 게 아니라 현대 이전의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교류할 때 다들 하는 관행에 가까웠다. 삼국사기와 수서 동이전에 의하면 고구려의 [[영양왕]]이 [[고구려-수 전쟁|수나라의 침입을 물리친 후]] 화해를 요청할 때 스스로를 '요동 똥 땅의 신하(遼東糞土臣某)'라고 자칭하면서까지 사죄하는 문서를 보냈고, [[위서]]에 전문이 실린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고구려 공격을 요청할 때 보낸 국서에서는 '백제 공주를 (북위에 보내) 후궁을 청소하게 할 수도 있다'라고까지 했다. 치당태평송이 결국 이후 역사를 바꾼 나당동맹과 직결되기 때문에 사대굴욕 외교의 유명한 사례로 알려져있긴 하지만 고구려나 백제도 중국에 보내는 저런 표현들이 치당태평송의 구절들의 수위에 못지 않았다. 물론 전후사정을 보면 세 나라 모두 진심 따윈 없이 외교적 이득을 얻기 위해 말뿐인 외교적 수사였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일단 을지문덕때 싸웠던 수나라는 고구려보다 먼저 망했긴 했지만 그 뒤를 이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끝내 고구려는 져 멸망했지만 그렇게 기었던 신라는 끝내 삼국 중 유일한 승자가 되어 200년 이상 왕조를 더 이었다. 잊지 말자 '''강해서 살아남는게 아니라 살아남아서 강한거다.''' 역사 속에서 아무리 강한 대제국이라 해도 200년을 넘기지 못하는가 하면 약소국이라 해도 그 이상을 간 경우는 많다.] 또 신라가 당을 도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면서 북방 영토 대부분을 포기한 것도 협소한 영토가 콤플렉스인 현대 한국인들에겐 안좋게 보일 수밖에 없는데 비단 현대인 뿐만 아니라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고려에서도 이러한 이유로 신라의 삼국통일의 한계성을 지적하거나 인정하지 않았다.[* [[고려]]도 [[발해]]의 북방영역 대부분을 통합하지 못했으니 신라 통일과 영토적 한계성은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으며 고려의 통일은 거의 '신라가 통일했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신라의 통일을 부정하면 고려의 통일도 성립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간에 고려는 근본적으로 외세의 개입없이 자주적으로 통일을 했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신라의 통일과는 차이가 존재하는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고려의 통일만이 진정한 통일이라고 보는 의견도 존재한다. ] 변방 영토의 크기에 매몰되는 현대인과 달리 당시에는 정통성의 통합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시각에는 거의 한국판 [[카스트]] 제도로 보이는 폐쇄적 신분제도인 [[골품제]]로 유명한 것도 마이너스 요소. 한마디로 현대 한국인이 싫어할만한 요소들로 무장한 신라의 존속을 위해 싸우고 그 국가의 높으신 분이기까지 했으니 현대 한국인들이 싫어하는 경우가 꽤 있다.[* 물론 이 또한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 골품이 관직의 상한선을 결정하는 탓에 [[최치원]]과 같은 능력있는 6두품들이 6번째 관등 [[아찬]]위로 올라갈 수 없어서 좌절했다는 기록을 두고 현대인들은 골품제의 배타성, 폐쇄성에 대해 한탄하지만, 관점을 고대국가 수준으로 낮추어서 달리 바라보면 이는 피정복지나 병합된 국가 출신 인물도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개방하였다는 뜻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금관가야 왕족 출신의 김유신은 진골에 편입되어 대우받았고 고위직에 올라 삼한일통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또한 최치원을 비롯한 6두품들의 진급상한선인 [[아찬]]역시 찬찬히 놓고 보면 정말로 그렇게 낮은 직위인가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아찬은 신라에 9개밖에 없는 한개 주의 최고 지배자인 도독의 자리까지 임명될 수 있으며, 이들이 얻지 못하는 직위는 [[상대등]]이나 중시([[시중]])처럼 유사시 왕권을 바라볼 수도 있는 최고위직 정도밖에 없었다. 당장 백제 16관등 중 최고위 관등이었던 [[좌평]]을 신라 관등에 편입할 때 이들이 받은 관등이 [[일길찬]]이었고 이를 승진시켜 [[아찬]]으로 대우하였다.][* 또한 신라의 1~5위 관등 중 신라 초기부터 있었던 관등인 2, 3, 4위 [[이찬]], [[잡찬]], [[파진찬]]는 각각 신라 상대의 최고위 3개 씨족 박, 김, 석씨 씨족집단의 수장에게 주어졌던 것으로 추측되며 1위 [[이벌찬]]과 5위 [[대아찬]]은 이후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생각했을 때, 왕위계승권까지 주어지는 이러한 직위를 신하, 또는 외부인 출신들에게 개방하지 않는다고 하여 폐쇄적이라는 인식은 지나친 감도 있을 것이며, 오히려 신라 초중기의 개방적 사회상 속에서 ([[탈해 이사금]] 시기에 왜인 출신 귀화자 [[호공(신라)|호공]]이 [[대보]]즉 왕 다음의 2인자 자리에 올랐다.) 왕권 안정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보는 것이 옳을 수 있다.][* 다만 골품제는 영구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집단에서 혈통이 멀어지면 내려가고는 했는데, 가령 신라 상대의 최고위 3개 씨족 중 하나였던 [[석(성씨)|석]]씨가 하대 신라 대에서는 5~6두품까지 내려갔다는 점, 또 피의 순수성을 강조한 나머지 성골이 거의 사멸되어 당대에 상상하기 힘든 여자를 왕위에 올린 뒤에야 진골에게 왕위가 돌아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오르는 것은 불가능해도 내려가기는 쉬운 혈통구조는 분명 폐쇄적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당장 고구려만 봐도 외부 유이민계 집단 출신이지만 국가에 커다란 공을 세우고 왕족과 혼인하여 신분을 상승시킨 [[온달]]의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이런 식의 평가가 나오는 이유는 [[자국 혐오|대한민국에 대한 불만]]을 그대로 [[남탓|신라라는 나라에 투영하는 태도]]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로 대중으로부터 자주 폄하되는 나라가 바로 [[조선]]이다.] 이런 시각이 간과하거나 외면하고 있는 점은 신라가 살기 위해 굴욕적인 행보를 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저자세로 일관한 국가는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나당전쟁|신라가 당나라와 필사적으로 벌인 전쟁]]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는 나당전쟁 이전 고구려 멸망까지의 상황은 잘 알려져 있으면서, 정작 [[삼국통일전쟁|이 긴 투쟁의 시대]]의 [[삼한일통|결말]]이 되는 사건[* 다만 이건 어느 정도 이견이 있는데, 진짜 결말은 [[천문령 전투]]와 [[발해]]의 [[건국]]이 진짜 결말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인 나당전쟁이 오랫동안 간략한 설명에 그치고 그 의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기벌포와 매소성에서 당군을 이기고 나서도 나당전쟁은 끝나지 않았는데, 토번의 공세에 당나라가 주력군을 수도 장안 인근의 관중일대로 '잠시' 이동시켰던 것이다. 여기에 요서일대에 거주하던 거란이 당나라에 대항하고, 고구려유민과 말갈인들이 동모산에서 일어나게 되자, 동북방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감소하면서 당나라의 대외정책이 신라에 대한 추가공격을 포기하고 유화책으로 변하게 되었다.] 만약 신라가 당시 최강대국인 당나라를 상대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한 준비를 하고, 외교를 펼쳤는지 안다면 신라에 대한 이미지는 상당히 바뀔 것이다.[* 실제로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현재 조선의 상황과 신라의 상황을 비교하면서 "신라때보다 왜 조선이 안 좋은 거냐?" 라는 식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수나라는 당시 패배적인 상황에서 을지문덕에게 농락당한 것이고, 치당태평송은 적의 공세에 무너져 내리는 신라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치당태평송을 보낼 때에 신라의 상황은 매우 암울하였는데, 선덕여왕때에 합천의 대야성이 함락되면서 낙동강 중류지역을 백제와 경계로 두게 되었다.(이때 김유신이 압량주도독으로 백제전선 지휘관이자, 수도인근지역 방위를 책임지는 지휘관으로 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서 신라는 한강유역에 대한 통제력이 떨어지고, 중국과의 교섭통로마저 사라질 위기였다.(한강유역이 위험하다고 병력을 파견하다가 백제가 경주를 공격하면 나라가 망할 수 있는 상황이였고, 그것도 아니라면 상주일대만 공격해 교통로를 끊어 버리면 한강유역은 더이상 신라의 영역으로 남아 있지도 못할 것이였다.)] 신라, 나아가 이후의 조선 왕조에 대한 감정적힌 폄하는 일제강점기와 주위의 최강대국이 득실한 상황에서 나온 열등감이 작용한 측면이 상당히 많다. 하지만 한 가지 알아야 하는 것은 치당태평송을 바쳤을지언정 당나라가 신라를 속국화하려 했을 때 신라는 치밀한 계획을 바탕으로 당시 최강대국인 당나라와 당당하게 맞섰고, 결국 패배해 멸망한 고구려와 달리 당당히 승리했으며 그 후 수백 년 뒤까지 이어가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당장에 김유신부터가 '''소정방에게 도끼 들고 쳐들어가서 따졌던 것'''만 봐도 저자세로만 나왔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 이러한 행위는 무례하게 보일 수 있으나 먼저 무례를 행한 건 소정방이지 김유신이 아니다.] 현대 한국의 상황만 보더라도 중국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동맹이 절실한 동시에 경제적으로 중국에 기대야 하는 아이러니가 있다. 그리고 [[미국]]과 [[중국]]은 중립 외교를 용납하지 않고 있다.[* 미국은 자국과 동맹국이라면 독재국가라 할 지라도 OK하지만 반미국가면 민주국가라 해도 NO를 외치며 중국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일본만 보더라도 인구, 국토 모든 면에서 한국을 앞선다. 그래서 한일협정에 고압적으로 나서도 한국은 제압할 방법도 없다. 그리고 북한 역시 핵실험을 해도 한국 혼자서는 뾰족한 방법도 없다. 실제로 한국 단독으로 상황을 헤쳐나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며 7세기 신라도 다르지 않았다. 혼자 단독으로 상대해 이길 수 없는 상황에서 당나라와의 동맹은 절실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비슷한 이유로 욕을 많이 먹는 [[태종 무열왕]] 문서에도 있는 내용이지만 신라와 당의 연합은 '외세를 끌어들인 반민족적 행동'[* 당시의 개념상 삼국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에는 매우 어려운데, 고구려와 백제가 부여와의 연관성(최소한 지배층 내에서 이러한 것들을 찾을 수 있다.)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신라는 이러한 내용도 없다. 사실 부여계란 연관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와 백제는 삼국시대 수백년간 서로 멸망시키려고 치열하게 싸웠지 같은 동족이라고 친하게 지내고 그런 것이 거의 없었으니 연관성이 있어도 딱히 의미가 없었지만. 그리고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19세기 서구문물이 유입되는 구한말과 강점기시기에 도입된 것이다. 그리고 이 논리대로라면 [[인천상륙작전]]과 [[5.18 민주화운동]] 당시 미국의 지원을 바란 광주 시민들, 반독재 민주화를 위해 [[김대중 납치 사건|미국과 일본의 보호를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도 외세가 도와준 반민족 매국노가 된다.]으로 폄하되지만, 중국을 부추겨 고구려를 공격해 달라고 요청하거나 일본을 끌어들여 고구려[* 광개토왕릉비에 404년 백제의 지원을 통해 왜군이 고구려의 대방(황해도) 땅을 침공한 것이 언급된다.]와 신라를 쳤던 백제의 외교 활동 등을 '살기 위한 몸부림'이나 '뛰어난 외교수완'으로 치켜세우는 것은 어찌보면 모순이자 이중잣대이다. 물론 이는 전자의 경우 결국 두 나라를 멸망 시켰다는 결과가 있는것에 비해 후자의 경우 결과적으로 최종적인 성과가 없었다는 점에서 평가가 갈릴 수밖에 없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반대로 민족적 행동이라는 상대적으로 최근의 시선을 그대로 1400년도 더 전의 과거에 대입시키려는 것도 고려할 부분이 많다. [[백제]] 멸망 이후 [[백제부흥운동]]에 <당나라+신라 vs 백제유민+왜>의 대결로 이루어졌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고구려]] 역시도 국경을 맞대는 [[당나라]]와는 계속 갈등 관계였지만 백제, 신라, 왜와 직간접적으로 연대하였고 북방 부족과 국가들인 [[말갈]], [[돌궐]], 토번국 등이 당나라에 같이 대항하는 세력이었다. 이후 고구려 후속 국가 [[발해]]만 해도 말갈족이 주류였다. 백제가 당나라와 결합해 고구려를 치고 백제가 왜와 연합해 신라를 치고 그걸 고구려가 구원하는 등 합종연횡은 계속됐고 [[외국]] 세력을 끌어들이는 것에 백제가 앞장섰지만 신라가 [[한강]] 유역 확보 후 <고구려+백제+왜> vs <신라+당> 연합으로 맞섰던 것을 고려하면 이런 [[외교]]적 합종연횡은 계속 이루어진 것이므로 어느 한 [[국가]]만이 특별히 외세를 끌어들인 것은 특별한 것은 아니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김유신, version=1000, paragraph=6)] [[분류:김유신]][[분류:인물에 대한 평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