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원봉 (문단 편집) == 여담 == * 어릴 때부터 강한 반일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김원봉이 밀양 보통학교에 다니던 1911년,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때 학교에서 나눠준 일장기를 화장실 변소에 처박고 자퇴했다고 한다. 이게 단순히 자퇴로 끝났기에 다행인 거지 [[일제강점기|시대가 어느 시대인지]]를 감안하면 정말 대단한 패기가 아닐 수가 없다. * 항상 무표정으로 상당히 과묵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에서 그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냈던 [[김구]]마저도 그가 웃는 모습은 거의 못 봤다고. 하지만 웅변 때문에 한 번 말했다 하면 상대방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 밀양의 절에 자주 들려서 주지스님과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고 하는데 주지스님이 회고하길 '인생에서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완벽한 인간'이었다고 한다. *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여성 독립운동가였던 [[박차정]] 여사와 결혼하고, 신접살림까지 차려서 살았다. 나중에 부인이 1939년 곤륜산 전투에서 어깨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을 때, 손수 밀양에 돌아와 묻어주었다고 한다. 김원봉이 손수 만든 무덤은 아직도 밀양에 보존되어 있다. 다만 관리가 잘 되지 않아서 풀숲이 무성하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박차정 여사의 모교인 [[동래여고]] 동문회에서 주기적으로 묘소 관리를 하러 들른다고 한다. * [[의열단]]의 단장답게 항상 인물을 만나면 의심과 경계를 했다고 하며, 아무에게나 쉽게 정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광복 후 우익의 [[백색테러]]를 피하기 위해 같은 장소에서 2시간 이상 머물지 않았다고 한다.[* 이 2시간 이야기는 일제강점기가 아니라 광복 후 이야기다.] 그래서 잠은 제대로 잤을까 싶을 정도며 그의 정신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의열단 창립 때부터 얼마나 잘 피해 다녔는지 일제 패망 때까지 잡히지 않았다.[* 실제로 일제는 김원봉에 대해 "보기엔 우유부단한 것 같지만 성질이 극히 사납고 치밀하다. 오안부적(傲岸不敵)(: 거만해서 대적할 자가 없음)의 기백과 신출귀몰하는 특기도 가졌다."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 미국의 기자였던 님 웨일스는 그녀의 저서 『아리랑(Song of Arirang)』에서 김원봉에 대해 "그는 고전적 유형의 테러리스트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몰랐다. (중략)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중략)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가씨들은 그를 멀리서 동경했다. (중략) 미남으로 로맨틱한 용모를 가졌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 해방 직후 [[조선인민공화국]][* 현재의 북한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조선인민공화국|해당 문서]] 참고.] 내각의 군사부장(국방장관)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 김원봉은 속으로는 같은 좌익 계열이었지만 [[김일성]]을 매우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1945년 8월 해방 직후, 귀국 전에 중국 상하이에서 체류할 기간 동안 일본군으로 강제징집 당했던 [[황용주]][* 뒷날 [[MBC]] 사장이 되는 인물이다.]는 김원봉과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황용주에 따르면 ''''김원봉은 김일성의 무장항일투쟁을 매우 좋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김일성의 활동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하기도 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1938898|#]] 그러나 겉으로는 김일성을 찬양하였다. [[6.25 전쟁]] 중인 1953년 3월 21일 '''로동신문에 '김일성장군의 교시를 지침으로 인민의 충실한 복무자가 되자''''라는 글을 썼다.[[https://m.dcinside.com/mini/gongsi/805313|#]] * 밀양시 내이동의 김원봉, 윤세주 생가터 부근에 의열단 전체를 다루는 의열기념관이 있다.[[http://www.euiyeol815.or.kr/|#]] * [[한국광복군]]의 [[장준하]]에 따르면 김원봉은 [[미인계]] 사용에 능숙했다고 한다.[* "몇 사람씩 따로 불러다가 술을 사 먹인다든가 혹은 금품으로 매수하는가 하면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 계열에서는 심지어 미인계를 쓰기도 하였다." - 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박경수, 돌베개, 2003년 8월 5일)에서.][* [[장준하]]의 평생지기 절친이자 같이 [[한국광복군]] 중 한 명이었던 [[김준엽]]의 회고록 <장정>에 따르면 [[김준엽]]은 [[김두봉]]의 딸이자 김원봉의 수양딸이었던 김상엽에게 호감을 갖고 몇 번 서로 이야기를 나눠보았다가 주변 동료들로부터 김원봉측에서 미인계를 쓰는 것이 분명하고, 이 김원봉이 쓴 미인계로 인해 암살을 당한 사람도 있다는 말을 듣고 등골이 오싹해져서 그 이후로 김상엽과 만나는 것을 삼갔다고 한다. 다만 [[김준엽]] 본인은 김상엽이 본인에게 미인계를 쓴 것 같지 않다고 한듯 하다. 그리고 [[김준엽]]의 경우 [[장준하]]와는 다르게 나름 김원봉에게 호기심을 갖고 거주하는 집에 직접 찾아가보거나 [[충칭]] 시내 한복판에서 우연히 김원봉을 만나서 먼저 다가가 인사도 해보았지만, 오히려 김원봉 측에서 [[김준엽]]을 피하는듯한 인상을 줬다고 한다.] 실제로 돈과 여자는 첩보계에서 자주 쓰이는 도구이며, 특히 체계적인 정부 조직이 없던 당시 상황에서 미모와 말빨만 교육하면 되는 미인계는 포섭에 가장 동원하기 쉬운 방법이었을 것이다. * [[독립운동가]]이자 [[민주화 운동가]]인 [[정화암]]은 "영웅호색이라고, 김원봉이가 원래 [[호색]]을 했거든요. 그래서 화류병에 만신창이였지요. 그래서 그 부인(첫 번째 아내)이 완전히 [[성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김두봉]]의 조카딸([[박차정]])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말하며, 김원봉이 [[화류계]]에 자주 출입했고 이때 얻은 성병 때문에 본처 최 씨와 두 번째 부인인 박차정이 성병에 전염되어 죽었다고 증언했다. * 오마이뉴스 기자이자 약산김원봉기념사업회 비상임 이사가 쓴 「약산로드 7000km」에서는 경향신문의 후속보도가 존재하지 않고 기사에서 존재하고 있는 오류들 때문에 김원봉이 간첩을 남파했다는 것은 가짜뉴스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경향신문 보도가 김원봉을 '8.15 직후 괴뢰집단 국가검열성 고문'이라고 명시한 점(실제로는 해방 직후가 아닌 48년부터 52년까지만 국가검열상을 맡았고 보도된 시점에는 국가검열상이 아니라 이미 노동상이 되어있었음)등을 비추어 볼 때 김원봉의 직책도 틀리고 시기도 틀리기에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한홍구 교수는 또한 "어마어마한 간첩단이라고 말했는데, 경향신문의 이 보도 이외에는 후속 보도가 없다고 전해지고 있다. 주요 간첩사례를 다룬 <북괴대남스파이전선(1979)>, 중앙정보부의 <북한대남공작사>, 국군보안사령부의 <대공30년사> 등에도 경향신문이 보도한 '약산의 간첩 남파'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라고 지적하였다. * 학교 역사 시간에 김원봉, 김두봉, 양세봉을 합해서 쓰리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가끔 이봉창과 윤봉길까지 합해서 오봉이라고 하기도 하는 모양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