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우중 (문단 편집) === 기업인 일화 === [[파일:external/www.econotalking.kr/img_14127_3.jpg]] * 김우중은 전용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 인식 --그 크기의 회사 회장에 전용기가 사치로 보였을 것 같진 않다마는-- 등의 문제로 체코의 어느 공항 어딘가에 있다가 유럽 다닐때만 사용했다고. 사실 그가 활동한 동유럽 지역까지 매번 전용기를 타고 날아간다고 하면 유지비도 상상초월급이기에 일부러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퍼스트 클래스 좌석이 비싸봐야 천만 원 단위이지만 전용기는 비슷한 거리를 갈 경우 연료비만 억대가 나온다. 해외출장이 특히 잦던 그가 계속 전용기를 탔다면 유류비 폭탄이 날아왔을 것이다. * 극성 [[축빠]]였다. 사원 체육대회에서 [[축구]] 경기가 열리면 선수로 몸소 출전해 풀타임을 뛰었다고 하고, 축구단 창단을 위해 당시 잘 나가던 여자 실업배구단까지 해체했다고 한다. 하여간 이렇게 해서 만든 [[부산 대우 로얄즈]]는 상당히 잘 나갔다. 현재 [[센텀시티]] 부지에 대우 로얄스의 축구전용구장을 지을 계획도 세워 놨을 정도였다. [[삼성그룹|삼성]]이나 [[LG그룹|금성]]이 [[삼성 라이온즈|야구]][[LG 트윈스|단]]을 창단하자 우리도 야구단을 창단하자는 간부의 제안을 즉각 거부할 정도였다. 이런 축구 사랑으로 아낌없이 축구에 투자하니 [[대한축구협회]] [[회장]]도 역임했을 정도다. 다만 대한축구협회에서 물러난 계기가 좀 거시기한데, 김 회장이 축협에 자금줄을 대 주면 당시 [[신문선|실무]][[허승표|진이]] 다 떼먹고 일처리 제대로 한 건 하나도 없었다.[* 최근 [[축사국]]을 중심으로 축협 개혁가라면서 이들을 축협 회장으로 미는데 정말 실소가 나온다.]이걸 보고 분개한 김 회장이 '''"내가 두 번 다시 족쟁이들과 상종하면 인간이 아니라 축생이오"'''라는 명언을 남기고 축구협회 일선에서 손을 뗐다고 한다. [[안정환]]의 해외진출도 김우중이 힘을 실어줘서 가능했다. 안정환이 [[이탈리아]]에서 씁쓸히 물러났던 [[이유]] 중 하나도 대우그룹이 기울면서 스폰서가 끊겼기 때문이다. * [[광주광역시|광주]]와 특별한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등경기장]] 건립기금으로 향토기업인 [[금호그룹]]보다 많은 액수를 출연해 지역사회에서 큰 화제를 모은 적 있다. 이후 [[해태 타이거즈]]의 활약으로 호남에서 야구붐이 일면서, 홈구장 건립에 '''1등'''으로 기여한 대우그룹의 이름이 호남 야구팬들에게 자연스레 인식됨에 따라 막대한 홍보효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금호그룹은 한동안 이 일로 기업 평판에 타격을 입었다. 원래 금호 그룹에게 1순위로 광주의 프로야구단 창단 제의가 들어갔던 만큼, 만약 금호에서 야구단을 창설했으면 당시 버스회사 방식으로 운영되던 [[금호전자]]가 철수하지 않고 성세를 유지했을 것이라는 결과론도 있다.] * [[노조]]를 극렬히 반대하는 [[삼성그룹]]가와는 달리, 동시대 재벌들과 비교하면 노조에 대해 진보적이고 관대했다고 한다. 대우가 FSO를 인수했을 때 조건이 '''3년동안 자의적 퇴사를 제외한 모든 사원들의 안정적 고용'''이었다. 덧붙여서, 이에 관련된 에피소드 중에 현재 인천시 부평구 을에서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과의 [[http://m.khan.co.kr/view.html?artid=200406131841201&code=210010|일화]]가 하나 있는데, 1985년 대우자동차 파업사태 때 노조[* 당시 대우차 노조 집행부는 현재의 강성 노조가 아닌 친기업 어용 집행부였다.]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공장 노동자들 내에서 영향력이 컸던 홍영표 의원과 노민추 소속 노조 중심인물들을 시청에 불러다가 즉석에서 직접 임금 협상을 했었다고. 그 결과 노조 측에서 요구한 임금 인상률 18%까지 아니어도 16.5%까지 인상시켜주었고, 노조와 노동자들의 복리후생을 철저히 약속했다고 한다. 또한 진보 노동운동에 참여한 홍영표 의원을 당시 경찰에서 예의주시하며 체포할 수 있는 것을 알아채 '''그를 자신의 자동차 트렁크에 숨겨''' 경찰이 둘러싼 시청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홍영표 의원은 그 후 대우자동차 공장의 지하 프레스실에 숨어 프레스실을 점거하고 대정부 농성을 계획하다 노동자로 위장한 경찰에 잡혀 결국 체포됐었다고 한다(...). 그 후 그의 대범함을 높게 산 김우중 회장은 그가 대우자동차판매에 복직할 때 영국시장에 고위직으로 파견시켜주었다고 한다. 또한 그룹차원에서 나이가 들어서 운동을 접고 취업을 하려던 운동권 인재들을 대거 특채하기도 했다. 김우중의 논리로는 "그사람들 자기 영달을 위해 싸운게 아니라 방향은 다르지만 공익을 위해 싸운거 아니냐"는 것. 사실 운동권에는 명문대 출신들도 많고, 조직관리나 선전등의 노하우도 있기 때문에 김우중은 그룹의 이미지도 개선하면서 좋은 인재를 쉽게 획득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 분규 진압을 아예 안한 것은 아니었다. 여느 기업인과 마찬가지로 노조분규는 철저히 진압했다. 1984~85년 대우어패럴 노조활동 탄압[* 이는 1985년 6월 구로동맹파업의 발단이 되었다.], 1987년 대우조선 파업 강제진압 및 [[이석규]] 노동자 사망 등의 노동운동 진압이 빈번하였다. * 그러나 그는 여느 재벌회장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 입장에선 비판 일변도였다는 시각도 적지는 않은 편이다.[* 하지만 김우중 회장은 1989년부터 1991년까지 그 자신이 거제도 옥포조선소에 근무하면서 회사안정과 노조문제를 직접 해결했다. 또 노동자의 집에 방문해 같이 식사를 하며 문제점을 경청하는 등의 일들을 생각하면 그는 다른총수들과는 유별난 부분이 있었다. 그래도 그들의 입장을 이해라도 할 생각은 있었던 것.] 특히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가 뜨던 1989년, 당시 수배 중인 노동시인 [[박노해]]가 <월간 노동해방문학> 9월호(통권 5호)에 원고 400매 분량의 [[http://db.kdemocracy.or.kr/isad/view/00127795|논평(오픈아카이브 기준 p261)]]을 실어 이 책과 김우중의 철학을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이 논평은 [[http://www.laborsbook.org/book.php?no=559&uid=46|<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란 책으로도 나왔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62907|오마이뉴스에 소개된 내용 일부]]). 하지만 그 박노해도 출소 이후 [[새천년 NHK 사건]]에 연루된 것이 알려지면서 이중잣대적인 행보를 보이고 만다는 점에서는 비판이 퇴색된 면도 있다. * 1990년대 초반에 북한의 "[[김일성]]" 부자와 면담자리를 갖기도 하였다. [[임동원]]의 회고록 <피스메이커>에 따르면, 김일성이 우리나라 관료들과 만난 자리에서 '''"김우중 회장과 같은 사람 5명만 있으면 그 나라가 일어설 수 있다."'''고 상찬을 했을 만큼 마음에 들어했다는 후문. * 경영 스타일은 '''친화력 9단 + [[일 중독]] + 독불장군'''형으로, 대우그룹의 모든 일을 자신이 직접 챙겨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한창 때는 비서진도 일부러 체력이 좋은 남자 비서들을 골라서 선발했는데도 비서들이 김우중의 스케줄을 따라가기 힘들어서 몇달에 한 번씩 교체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식성도 이를 따랐는지 빨리 준비하고 먹을 수 있는 [[비빔밥]]이나 [[설렁탕]]을 즐겼다고. 하지만, 이렇게 상부에서 중요 정보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구조조정본부장을 만나보니 그룹 실상조차 제대로 모르더라."([[강봉균]] 당시 경제[[수석비서관]])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협력사였던 GM의 [[밥 루츠]] 부회장도 이 점을 비판하였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는 것은 최악이다. 많은 이들이 과거 대우 회장이 그런 독재자였다고 고백했다. 그는 직원들이 자신에게 충성하는지만 신경을 쓰다가 회사를 말아먹었다고 한다." -> [[밥 루츠]], [[빈 카운터스]], p.311. 해당 서적에서는 폭스바겐 회장을 비롯한 "유능한 독재자"의 사례를 소개하기 전에, 이런 식으로 자신이 생략하겠다고 했던 "무능한 독재자"의 사례로 김우중 회장을 살짝 언급한다.], 당시 GM은 법정관리에 들어간 대우자동차와 지분 매각을 놓고 협상 중이었기 때문에, 가격을 낮출 수 있는 비판적인 정보를 입수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서 볼 필요가 있다. * [[김대중]] 대통령을 지나치게 믿다가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쪽보다는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했던[* 대출을 더 받을 수 있으면 틀림없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경제난 와중에도 오히려 공격적인 경영으로 세(勢)를 불렸다.] 연유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김대중을 믿었던 건 군사정권 시절, 신문에 이름 좀 오르내린다는 기업들은 여당에 후원금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는 여당 2, 야당 1의 비율로 정치자금을 제공하며 야당 인사들과도 친분을 다졌던데서 연유한 것. 그리고 경기고등학교 후배로 대우그룹 임원을 지냈던 [[박정훈(정치인)|박정훈]]이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1709_6187.html|내정간섭 수준의]] 각서까지 요구할 정도로 기세등등한 [[국제통화기금]] 하에서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이, 재계 총수들과의 자리를 마련, [[1997년 외환 위기]]를 빨리 극복하기 위해 과감한 [[구조조정]]을 부탁하였지만, 회의가 끝나고 김우중의 후배인 타 재벌의 총수가 김우중에게 "어떨 것 같습니까?"하고 묻자 김우중은 "뭐 별일 있겠어. 다 들어서고 나면 처음엔 저렇게 군기를 잡잖아. 이번에도 별 탈 없을거야."라 말하며, 상황을 낙관하였다.[* [[공병호]], 대한민국 기업흥망사, 해냄, 2011] 다른 30대 그룹이 이헌재의 애정어린 독려(?) 후 '''5일만에''' 시행을 전제로 구조조정 계획을 제출했지만, 김우중의 대우그룹은 오히려 당시 경영난에 처한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며 정부의 호감을 사는 한편, '''추가 대출'''을 기대하는 대담한 발상을 실천에 옮긴다. 하지만, 당시(1998년) 대우그룹의 모기업이었던 (주)대우 한 회사의 [[부채]]만 22조원(...). 참고로 '''당시 국가예산의 30%에 달하는 금액'''으로 결코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1998년 예산이 70조 정도였다. 그러니까 정부차원에서 정부출범에 대한 보은차원에서 부채를 다 보전해주고 싶어도 해주기 힘든 상태였다는 말.(...)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 역시 김우중의 현실인식이 [[http://news.joins.com/article/7161338|매우 낙관적]]이었음을 [[http://news.joins.com/article/7171396|지적]]하고.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41574|있다.]][* 사실, 총부채가 '''140조에 육박하는''' [[소프트뱅크]]같은 기업도 멀쩡히 존재하고 있듯이 부채규모가 꼭 회사 존속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1998년 10월 일본 노무라증권이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제목의 보고서를 냈을 만큼, 쌍용자동차 인수 후 국내 2위의 재벌이 된 대우는 '''시장의 평가가 나빠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그 직후에 대우가 집중적으로 투자한 중국과 제3국 시장의 성장이 상황을 반전시킬수도 있었기에, '''김우중 회장이 사안을 좀더 심각하게 바라보고 구조조정에 착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 우리나라에서는 [[IMF 사태]] 이후로 이미지가 만신창이가 되어버렸지만, [[베트남]]에서의 평가는 현재까지도 매우 높다. 이는 대우가 베트남 진출할 때에 [[라이따이한]]에 대한 복지 지원, 현지인 대우 등에 많은 신경을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베트남에서 존경하는 한국인으로 김우중을 꼽는 경우가 많다.[* 할아버지 대접을 받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지금은 [[박항서]] 감독이다.--] 베트남에서 한국 기업이 선전한 것도 사실 대우가 만들어놓은 이미지의 수혜를 받은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 실제로 이런 방식은 다른 [[다국적기업]]들도 본 받을 만한 것인데 많은 [[다국적 기업]]이 미성년자 노동, 개판인 직원복지, 고용인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 등으로 현지에서 욕을 먹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유럽에 가서는 "너희는 노조라는게 없냐?"고 욕을 엄청 먹었다고 한다(...). 김우중이 한국기준으로 본다면 그나마 노조에 관대했던 축에 들었지만 동유럽 기준으로 꽤 꽉막힌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애초에 폴란드의 민주화 운동에서도 노조를 중심으로 주축을 이루웠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당시 고용안정을 이끌어 낸 것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한편 [[2017년]] 초 [[삼성전자]] 베트남 공장에서 차별대우 때문에 일어난 노동자 시위로 인해 현지에서는 김우중 회장의 현지인 대우와 복지 능력이 재조명받는 일이 일어나곤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