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우중 (문단 편집) === 위기와 몰락 === 만렙 수준의 대인관계 능력과 돈 될만한 무언가를 찾는 상업적 안목로 대재벌의 반열에 올랐지만, 김우중 회장은 '''기술은 사오면 된다'''며 자체적인 [[R&D]]를 등한시하고 있었다. 당시 대우조선공업 기술연구소장이 기술개발을 중시해야한다고 했으나 기술이라는 건 필요할 때 밖에서 사오면 되는 건데 왜 쭈그려 앉아서 기술개발 하냐고 [[http://m.irobot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892|반박했다고.]] 월간 조선에서도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512100007&ctcd=&cpage=|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선과 상당히 대비될만한 의견들도 적지는 않은데, 물리학자 [[정근모]]박사의 경우 [[https://mnews.joins.com/article/23240494#home|그가 과학기술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으며, [[http://news.hankyung.com/article/1998032200511#Redyho|1998년에는 김우중 회장이 직접 기술연구소 이사장으로 활동한]] 적도 있었다. 여담이지만 [[http://wikistory.co.kr/index.php?no=176949|아들이 대우자동차 연구소에 재직했었]]다. 이러한 '기술은 사오면 된다'라는 워딩은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임팩트 때문인지 [[2008년 9월 세계금융위기]] 이후 타 대기업에서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세계경기가 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우수 R&D 인력을 증원하기도 하였다. 여러모로 대비되는 대목. 한편 1989년대 중반부터는 상기했듯 김우중 본인도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에, 전자부문에서 브라운관용 고강성 CRT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것과, 영국 워딩 기술연구소, 독일 뮌헨 연구소를 인수해 독자 플랫폼을 개발하는 등의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출처 신장섭 저, '김우중과의 대화']. 하지만 타 경쟁기업들도 비슷한 시기에 경쟁력있는 제품을 꾸준히 시연하고, 결정적으로 1997년 [[1997년 외환 위기|IMF 구제금융사태]]가 발생하면서 은행 차입을 통해 큰 판을 벌리는 대우의 경영 스타일은 발목을 잡게되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오히려 [[쌍용자동차]]를 추가로 인수하고[* 다만 이것에 대한 변을 하자면, 정부의 요청과 SUV쪽이 부실했던 대우차의 라인업을 보강하고자 하는 양측의 이해관계가 잘 맞아 이루어진 것이다.대우차가 보기에는 쌍용차의 부채비율을 자사에서 해결할 수 있을거라 판단하기도 했고...] 폴란드, 베트남 등지의 주민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대우 상표의 인지도를 크게 높이는 공격적인 경영을 하였다. 하지만, 팔리지 않는 제품을 해외 법인으로 밀어내어 수출 실적으로 잡고 당시 화두로 떠오른 [[구조조정]]을 소홀히 한 것이 문제였다. 현대, 삼성에서도 부채율 감소에 힘을 기울이던 상황이었지만, 대우그룹은 일본 증권가나 외국 평가기관의 '''경고가 사전에 있었음'''에도, 상황을 매우 낙관적으로 전망하였던 것. 실제로 [[구조조정]] 계획을 초과 달성한 --이건 직원 입장에선 좋은게 아닌데-- 삼성과 현대, 90% 이상 달성한 LG와 SK등과는 다르게, 대우는 18.5%에 그쳤다고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ctg=10&Total_ID=7182691|한다.]] 한편 대우가 청산회사를 세우고 나서도 한동안 기업청산을 못한 데에는, 상기한 '''팔리지 않는 제품들'''과 '''정부에서 빚으로 본 사업건'''들이 뒤늦게 빛을 봐 그것들의 흑자가 '''청산법인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나는 등 장기적인 성과가 있었던 덕분이라고 한다. 일례로 2001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레간자와 라노스가 합리적인 가격대와 성능을 갖춘 차량으로 선정되기도 하였고 한때 북미 고객만족도 평가부문에서 현대ᆞ기아를 제치고 BMW의 뒤를 이어 4위를 차지한적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잠재력 좋은 학생도 중요한 시험대(위기)를 통과-극복해야 비로소 세간의 인정을 받는 법인데, 몸집불리기에 성공하며 [[LG그룹]]과 [[삼성그룹]]까지 앞선 2위 재벌이 된 대우의 내실은 부실해졌고, 결국 1999년 8월 26일, 어음 만기 사태를 이기지 못하고 대우그룹이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공을 들이던 대우자동차 또한 부도 이후 2000년에 북미와 유럽에서 최대 실적을 거두며 좋은 수익을 거두었음에도 결국 2002년에 청산되었다.[* 다만 북미에서는 퇴출당했다고 하기에는 조금 부적절하다. 왜나하면 당시 대우는 적자가 난 상황이었고, DMA(대우차 미국법인)가 대우차를 인수한 GM에 대우차 브랜드 사용허가와 딜러쉽 유지를 요구했지만 GM이 이를 냉혹히 거절한 것도 '''대우차보다 더 나은 인지도의 자회사'''가 있기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 내 자회사가 많은 GM과 기아밖에 없었던 현대는 상황이 다른 것이다. 대우자동차도 부도가 나지 않았다면 분명 미국시장에 신경을 썼을 것이 분명하고.] 여담이지만 월간오토라는 잡지사에서 직접 1990년대 중형차 3대장을 '''구매해서''' 실험했는데, 쏘나타 3는 핸들에 몸을 박고 크레도스는 의자가 뽑히고(!) 레간자도 박살이 났다. 사실 쏘나타 2는 북미 충돌테스트에서 B필러 앞이 무너질 정도로 차체강성이 쓰레기였던걸 생각하면 나아진건 맞는데... 뭐 그땐 안전테스트가 워낙 개판이라 직접 차를 사 충돌실험을 했을 때 그냥 전원 사망(...) 수준의 안전도를 자랑했으니.. '''동유럽을 비롯한 제 3세계시장'''은 소련붕괴 직후부터 개척에 들어가 '''2010년대에도''' 현지 주민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접근하며 호감을 산 대우를 그리워 하는 시장 반응이 있었을 만큼 그 브랜드가치를 인정받았으며, 중국에서는 절경으로 알려진 구이린(桂林) 지역에 대규모 호텔을 건립하는 한 편, '''탁월한 접근력'''[* 정치계에선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전부터 '''여당 : 야당 = 2 : 1로 정치자금을 제공하고도 무사'''했으며, '''1990년채 초반에 김일성을 만나 독자적인 대북 연결선을 구축'''하고도 별 탈없이 넘어갔을 정도다.] 및 홍보 능력으로 현지의 관민(官民)들과 원활한 관계를 형성했지만, 모기업인 대우가 사라졌기 때문에 이를 활용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대우자동차의 경우는 GM의 브랜드 일원화 방침으로 대우 브랜드의 부활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 다만 [[포스코대우]] 주도로 사우디를 시작해서 대우자동차의 부활을 다시 이루고자 했었지만, GM이 사우디 정부를 상대로 한 악랄한 로비와 쌍용차의 참여로 인해 결국 쌍용차가 진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포스코 본사 입장에서도 쌍용차에 자사 철강을 납품하고 있어서, 대우를 앞세워 자동차 개발에 착수하지 않아도 되다보니 내부에서도 대우출신 인사들과 포스코 본사 간부들간의 알력다툼이 심했다. 포스코에서는 계속 자동차사업을 진행하겠다고는 하지만 이 역시 일부 공직자들의 돈 빼돌리는 창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착공삽을 뜨기 전까지 섣부른 판단은 금물인 상황이다. 자세한 건 포스코대우 문서 참조.] 그룹 해체 이후 [[분식회계]]를 통한 [[사기죄|사기]] 대출 혐의로 수사가 진행되면서 [[베트남]]으로 장기 도피하여 잠적하였다가 2005년 귀국하게 되었는데 이 때 공항에 나온 노동자들과 대우 피해자들이 몰려와서 그를 손가락질하거나 비난하였다. 한때 노동계와 시민단체 등로부터 '''해외 도피자 명의로 공개수배'''를 받기도 하였다.[* 여담이지만 당시 대우자동차 노조 측에서 현상금으로 500달러(...)를 걸기도 했다.] 2006년 징역 8년 6개월,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 9253억원'''(!)의 형을 구형받았고 2007년 말 노무현 대통령의 특사로 사면되었다. 참고로 추징금이 전두환의 '''100배''' 가까이 된다. 물론 사면은 사면이고, '''추징금은 내야한다'''. [[전두환]]의 추징금이 화제가 된 2013년에는 김우중 추징금을 어떻게 받아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전두환은 재산이 있는 것이 너무도 뻔했기에 추징금 환수가 금방 이루어졌지만 김우중은 17조 원이 도무지 털어도 나오지 않을 돈임이 뻔해서인지 금방 묻혔다. 2000년 10월호 <월간중앙>에서 김 전 회장의 프랑스 니스 은둔사실이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207251|특종 보도되었고,]] 현재도 김우중 개인의 세금체납액이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1&aid=0009742424|상당하다]]고 한다. 아들이 유령회사를 통해 600억원대 해외 골프장을 소유하고 있다는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7/25/2013072502725.html|기사]]도 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