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용철(야구)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182132> [[KBO 골든글러브|[[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height=40]]]] [br] [[틀:KBO 골든글러브/1루수|'''{{{#b58a5d KBO 골든글러브}}} {{{#ffffff 1루수 부문 수상자 (1984)}}}''']] || ||<#182132> [[KBO 골든글러브|[[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height=40]]]] [br] [[틀:KBO 골든글러브/지명타자|'''{{{#b58a5d KBO 골든글러브}}} {{{#ffffff 지명타자 부문 수상자 (1988)}}}''']] || 아버지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때 일찍부터 야구에 입문했다. [[개성고등학교 야구부|부산상고]] 시절 [[3루수]]로 주로 뛰었는데, 2학년 때는 [[화랑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화랑대기]] 우승멤버였고, 3학년 때부터 활약하기 시작하며 [[황금사자기]] 우승을 이끌면서 팀의 전성기를 주도했다. 대학에 진학할 수도 있었으나, 아버지의 별세로 가세가 기울자 당시 실업 최강의 팀인 [[한일은행 야구단]]으로 직행한다.[* 여담으로 본래 [[한국전력공사 야구단]]으로 갈 생각이었지만 당시 한일은행 감독이던 [[김응용]] 감독이 직접 계약하기 위해 찾아와서 한일은행으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 24번을 달게 되는데, 어린시절 [[일본프로야구]]를 보던 중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24번을 달고 있던 [[나카하타 키요시]][* 당시 요미우리의 45대 4번타자였다.]의 타격 자세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때마침 한일은행 야구단에 24번이 비어 있었기에 골랐다고 한다.[* 이후 롯데 자이언츠에서도 24번을 달았다.] 당시 감독이 [[김응용]]이었는데, 고등학교 막 졸업하고 들어온 새내기에게 바로 주전 [[4번타자]] 3루수를 맡기면서 신임을 표했다. 김응용이 자신의 고등학교 후배에게 베푼 호의라기 보다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장신인 184cm의 키를 갖춘 김용철의 타격 재능이 워낙 좋은 편이었다. 실업리그 타격상을 차지하면서 국가대표에도 선발되는 등 코끼리 감독의 기대에 100% 부응한다.[* 당시 기존의 4번타자 또한 고등학교 대선배인 [[강병철]]이다. 강병철과는 훗날 프로때 감독과 선수로 재회해서 코시반지를 획득한다.][* 다만 국가대표에서의 실적은 초라하기 그지 없는데, 선배 [[김용희]], 후배 [[한대화]]와 3루수 주전 경쟁에서 반걸음 밀렸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야구 월드컵|세계야구선수권]]은 한번도 출전하지 못했고, 1976년 네덜란드 할렘 국제야구 대회, 1980년 [[롯데 오리온즈]] 초청 경기 등 소규모 평가전에서만 출전했다.] || [[파일:/image/sports/2009/baseball/expert_contents/pdh/ec_content/expert_389/1248452790_file_image_1.jpg|width=100%]] || 프로 출범 후에는 고향 팀인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해서 경력을 이어갔다. 가장 유명한 대목이 1982년 [[KBO 올스타전]]. 홈런 3개를 치면서 MVP가 유력하던 시점에 올스타전 3차전에서 선배인 [[김용희]]가 친 만루홈런 한 방에 [[MVP]]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인생은 그래서 한 방.~~ 그래도 상복이 아주 없는 편은 아니라서 [[KBO 골든글러브]]를 두 차례 수상한 바 있다. || [[파일:external/imgmmw.mbn.co.kr/29022C00-C4E6-4DB4-ADFC-B7AF9B60CA0B.jpg|width=100%]] || |||| {{{#ec1c24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심판판정에 대해 항의하고 있는 최동원과 김용희(오른쪽 끝), 김용철.'''}}} || 그리고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롯데의 창단 후 첫 우승에 한 몫을 했다. 1988년 [[최동원]]이 주도한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회]]가 구단들의 방해로 무산되자, 그에 대한 보복이 가해졌다. 그는 최동원의 트레이드에 대해 구단에 항의를 했고 끝까지 선수회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보복으로 [[트레이드]]된다. [[삼성 라이온즈]]에서 한국시리즈 실패의 원흉으로 몰린 [[장효조]][* [[1987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어이없는 외야수비로 4연패의 빌미를 주었다는 책임론이 제기되었다.]를 상대로 트레이드된 것. [[최동원]], [[김시진]]의 트레이드까지 합쳐 총 4:5 트레이드로 인해 그는 삼성으로 이적했고, 1992년 거기서 선수 생활을 마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