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용수(신라) (문단 편집) === 정치적 입지의 강화 === 그래서 어느덧 50대를 바라보는 용수가 임명된 '내성사신'이란 어떤 관직인가? 삼국사기를 기반으로 추론하면 내성사신은 궁궐을 구성하는 건물 · 임야의 관리, 궁궐에서 소요되는 물품의 조달 · 제작 · 보관, 궁궐에 부속된 농장 · 공장의 관리, 궁궐에서 이루어지는 제사 · 음악 · 요리 · 빨래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을 관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경제조직이었다. 단적으로 삼국사기의 직관지 3권 가운데 한 권이 통째로 내성사신의 관할이다.[* 물론 그 안에는 신라 하대에 왕권이 비대화되면서 신설된 관부도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충분히 놀라운 규모.] 더욱이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629년에는 이찬 임말리(任末里)의 총괄 아래 전선에도 투입되었는데, 이때 용수와 함께한 사람이 공교롭게도 [[김서현(신라)|김서현]]과 그의 아들 [[김유신]]이었다. 전투의 전개 과정에는 김유신에 대한 노골적인 미화가 상당히 섞여 있지만, 이러한 점을 차치하더라도 이들과 함께 전투에서 활동했던 것은 이후 양자가 친교를 맺어 두 가문이 결합하는 단초가 되었다. 또한 두 가문은 전투의 승리를 통해 군부에서의 입지를 다지고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때가 김유신의 나이 35세, 김춘추의 나이 27세였다. >가을 8월 왕이 이찬 임말리, 파진찬 용춘 · 백룡, 소판 대인 · 서현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유신은 그때 중당당주(中幢幢主)였는데, 아버지 앞에 나아가 투구를 벗고 고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패했습니다. 제가 평생 충성하고 효도하기로 스스로 약속했으니 전쟁에 임해서는 용맹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대략 듣기로 '옷깃을 바루면 갖옷이 바르게 되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펴지게 된다'고 하니, 제가 그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곧 말에 올라 검을 뽑고 구덩이를 넘어 적진을 드나들면서 장군을 베어 그 머리를 들고 왔다. 우리 군사들이 이를 보고는 승기를 타고 분발하여 공격해 5천여 급을 참살하고 1천 인을 사로잡으니, 성 안에서는 두려워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모두 나와 항복하였다. >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 김유신열전 건복 46년}}} 이후 선덕여왕 4년(635)에는 왕명으로 [[지방(지리)|지방]]을 돌아다니며 감찰하고, 나중에는 [[백제]]의 [[엔지니어]]인 아비지(阿非知)를 포함한 신라장인 200여 명과 함께 [[서라벌]][*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에 [[황룡사]] 9층[[목탑]]을 건립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