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옥균 (문단 편집) === 북한에서의 평가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사리원 민속촌 벽면 제너럴셔먼호 사건 모자이크.png |width=100%]]}}}|| || {{{-1 [[사리원시]]에 위치한 민속촌 내 역사 모자이크.[br]안중근, 홍범도, 전봉준과 함께 김옥균의 부조가 나열되어 있다.}}} || 북한에서 김옥균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보통 일본 제국에 관련되는 일은 북한 내에서 가장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경우 '갑신정변의 주동자'라는 점이 강하게 작용했다. 북한 사관에서 개화기 조선의 정국은 '착취적 노예제를 유지하려 했던 봉건 세력'과 '봉기를 일으켰던 민중 세력([[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의 배경)'의 대립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평가가 긍정 일색인 것은 김일성이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그를 높이 산 영향이 크며, 김일성은 이 회고록에서 몇 문단을 할애하여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릴 뿐만 아니라, 김옥균을 비판적으로 평가한 역사학자들이 잘못되었다고 훈시까지 내린다. >우리에게 조선력사를 배워주던 선생들은 대체로 김옥균을 친일파로 규정하였다. 해방후 우리 나라 학계에서도 오래동안 김옥균에게 친일파라는 딱지를 붙이였다. 그가 정변준비과정에 일본사람들의 도움을 받은것이 친일의 표적으로 되였다. 우리는 이것을 공정한 평가라고 보지 않았다. > >그래서 나는 력사학자들에게 김옥균의 개혁운동에서 인민대중과의 결합에 주의를 돌리지 않은것은 물론 잘못이다, 그렇지만 일본의 힘에 의거하였다고 그것을 친일로 평가하면 허무주의에 떨어진다. 그가 일본의 힘을 리용한것은 친일적인 개혁을 단행하자는데 목적이 있은것이 아니고 당시의 력량관계를 면밀히 타산한데 기초하여 그것을 개화당의 편에 유리하게 전환시키자는데 있은것이다,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전술이였다고 말해주었다. >---- >[[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中 김일성의 후계자인 김정일 역시 1963년 5월 6일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열린 한 담화에서 '갑신정변을 옳게 평가할 데 대하여'라는 내용의 교시를 내린 바 있다. 이 때문에 오늘날 북한의 역사학계는 김옥균을 '외래자본주의 세력의 침략에 대항한 민족의 첫 번째 부르주아 개혁운동가'로 평가하고, 갑신정변을 '조선 역사상 최초의 부르주아 개혁 운동'으로 평가한다. 사회주의사관에서 이러한 평가는 단순한 업적 이상의 사상적 의의를 지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