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영환(1963) (문단 편집) === [[전향]] === 그러나 [[1991년]]에 [[김일성]]을 만났을 때부터 북한 체제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그와 밀입북에 동행했던 조유식은 해주 해안가 시내에서 폐공장같이 버려진 아파트를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고 증언했고 주체사상탑 카펫 바깥으로 가다가 그가 손님인 걸 모르는 안내원이 "왜 정해진 길로 안 가냐"는 말을 들으면서 관료적인 인상을 받았으며 김영환은 김일성을 만난 후 주체사상연구소 학자들과 토론에서 "당이 잘못하면 누가 그것을 바로 잡습니까?"라는 질문을 했지만 학자들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는데 여기서 북한 체제의 한계성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김영환 본인은 김일성이 주체사상을 잘 몰라서 실망했다고 밝히기도 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1/0002122034?sid=100|#]] 남한으로 돌아와서 주사파 지하조직 활동을 계속 하긴 했지만, 1994년 이후 [[고난의 행군]]을 보면서 주체사상에 큰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주체사상에 대한 회의감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으며, 결국 진보잡지 [[월간 말]] 1995년 4월호 '반미, 북한 그리고 90년대에 대한 나의 생각'이란 칼럼에서 [[전향]]을 공식화했고 1996년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한청협) 기관지 <자주의 길> 3호에 '세상이 바뀌면 시대정신도 바뀌어야 한다'라는 칼럼을 기고해 NL노선과 결별함을 선언했다. 일설로 방북 때 북한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굉장히 모욕감을 느꼈고 이것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자신은 남한의 "혁명 지도자"로 받아들여질 줄 알았지만 북한은 그냥 흔해빠진 장기 말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김일성은 이틀 동안 두 번이나 김영환을 만났다. 그것도 자기 별장에서이다. 처음엔 세 시간 반, 두 번째엔 두 시간 정도 길게 이야기를 하며 김영환을 치켜세웠고 이별할 때는 특별히 선물로 권총 두 자루와 미화 40만 달러를 김영환에게 수여했다.[[http://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41764|링크]] 특히 첫 번째엔 같이 식사까지 했다. 북한의 절대권력자 김일성이 이런 태도를 보였는데 그 밑 사람들이 장기 말 정도로 대하는 모습은 상상조차 힘들다. 오히려 그때 김일성과 대화를 통해 북한에 실망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1997년]] 지도부 투표를 거쳐서 민혁당을 해체하고 자신은 주사파 활동을 중단하였다. [[월간 말]] 1998년 5월호에 <'''북한 수령론은 완전한 허구이자 사기극'''>이라는 글을 기고하고, 훗날 [[뉴라이트(대한민국)|뉴라이트]] 운동의 토대가 되는 잡지 <[[시대정신(잡지)|시대정신]]>을 창간하였다. [* 이때 김영환의 영향을 받던 전북총련은 [[한총련]]을 탈퇴하고 '푸른공동체21'을 설립하고 북한민주화운동으로 완전히 돌아선다.] 그러나 북한 공작원과 접촉한 하영옥이 조직을 재건해서 이석기 등을 중심으로 민혁당 하부조직[* 이들은 나중에 [[경기동부연합]]으로 이어진다.]은 계속 활동하였고, [[1999년]] [[국가정보원]]에 일제히 검거되면서 김영환도 구속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민족민주혁명당 사건]] 참조. 1999년 검거 직후 공개적으로 주체사상을 포기한다는 선언과 함께 '[[전향|준법서약서]]'를 쓰고 공소보류로 풀려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