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영주(북한) (문단 편집) === 김정일 시대 === 이후 20년 가까이 종적을 감추어 잊혀졌던 김영주는 말년의 김일성이 [[김영삼]] [[대한민국 대통령]]의 남북 정상회담 시도로 정치 전면를 총지휘하면서 이 과정에서 친 김일성 성향의 구세대 인물들이 필요해지면서 다시 정치에 등장했다. 이 과정에서 그 대표격인 김영주의 복귀설이 돌았고 실제로 1993년 12월 개최된 조선로동당 6기 21차 전원회의에서 갑자기 등장, 정치국 위원으로 복귀했으며 이어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9기 6차 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으로 선출되면서 그 당시 남한 사회를 경악시켰다. 이 때문에 김일성이 김정일을 쳐내고 김영주를 다시 세우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도 있었지만 그보단 그냥 정권의 무게감을 주기 위해 불렀다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로 이때 조직지도부장, 선전선동부장, 국방위원장, 정치국 상무위원 등의 요직을 꿰어차고 북한의 실권을 휘두르고 있던 김정일이 김영주의 등장을 자신에 대한 위협을 인식했다면 김영주의 국가 부주석 임명을 묵과했을리도 없었을거고 김일성이 죽은 후에 김영주를 가만 뒀을 리도 없다. 여튼 이때 정치국 위원에 선출되어 김정일 시대 내내 당 조직개편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17년간 정치국 위원을 지냈다. 부주석으로 임명된 후 얼마 가지 않은 1994년 7월, 형 [[김일성]]이 죽자 김일성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7년 2월, [[최광]]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김일성 헌법이 도입되어 중앙인민위원회 제도가 폐지되자 자동적으로 부주석에서 퇴임하였다. 하지만 새로 신설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에 선출되어 예우받는 원로로 남게 되었다. 이후 동료 명예부위원장들이 차례로 죽으면서 1998년 12월, [[전문섭]], 1999년 9월, [[리종옥]] 장의위원을 지냈다. 2003년 9월,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에 재선되었다. 2008년 10월, [[박성철(1913)|박성철]]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2009년 4월, 12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명예부위원장에 또 재선되면서, 건강 때문에 물러난 것이 무색하게 무척이나 장수하였다. 2010년 9월, 3차 당대표자회가 열리고 30년 만에 중앙위원회와 정치국이 새로 선거되면서 정치국 위원에서 소환되었다. 2011년 12월, 조카인 김정일의 죽음까지도 목격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