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영주(북한) (문단 편집) === 몰락과 실종 === 1973년 9월, 5기 7중전회에서 김정일이 새로운 조직비서에 선출된 것을 보면 이때 조직비서에서도 물러난 것이 확실하다. 이 때문에 1973년 말부터 남한에선 김영주 숙청설이 돌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74년 2월 15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정무원 부총리에 임명되었고 1974년 2월 장길부 장의위원에 위촉되면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미 김영주가 돌아오기 직전인 5기 8중전회에서 김정일을 정치위원에 보선, 김일성의 유일한 후계자로 추대한 상황에서 예전과 같은 존재감은 없었다. 이후 이집트를 비롯하여 해외 순방을 다녔으며, 최고인민회의 회의 주석단에 꼬박꼬박 나타났다. 장진성의 주장에 따르면, 1974년 쯤에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조직지도부 업무에서 완전히 물러나서 조직지도부 부부장이었던 김정일이 조직지도부를 장악한 것이라고 한다. 1976년 3월, [[남일]] 장의위원, 1976년 5월, [[홍원길]]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런데 1976년 9월, [[최용건]] 장의위원회 명단에선 탈락하였으며 이후 최고인민회의 주석단에도 나타나지 않았음으로 정무원 부총리 및 정치위원회 위원에서 완전히 해임된 것이 드러났다. 이 때문에 남한에선 '곁가지' 신세가 되어 숙청당했거나 지방 한직에 임명되어 앞으로 모습을 드러낼 일이 없을 거라 여겨졌다. 일부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에게 자신에게 개길 뜻이 없음을 드러내고자 식구들을 데리고 자강도로 내려가서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분석은 [[황장엽]]이 망명한 후 김정일이 김영주를 숙청했다고 주장하면서 백학순을 비롯해서 상당수 북한학자들이 수용, 정설이 되었다. 하지만 북한의 실세가 김영주에서 [[김정일]]로 교체되는 것을 지켜봤던 중앙위원회 부부장 박병엽은 당시 김영주가 밀려난 것은 아니라고 증언한 바 있다. 정무적 감각이 매우 뛰어난 김영주가 향후 후계 구도에서 [[김정일]]이 부상하는 것을 막는 것은 사실 상 어렵다고 생각하고 김정일 세력과 어느 정도 선에서 타협을 하고 물러났다고 한다. 이러한 타협으로 실제로 자신의 자리를 [[김정일]]에게 넘겨준 김영주는 자강도에 있는 특각에서 편안히 지냈으며, 그의 [[가족]]이나 평소 김영주 라인에 섰던 간부들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박병엽]]의 증언에 따르면 김영주는 [[김성애]]가 김일성의 집에 들어온 이후 계모에 대한 반항심으로 밖으로 나도는 김정일을 거두어 사실상 자기가 키우는 등 어린 김정일과 매우 친밀한 관계였고 이후로도 후견인을 자처했기 때문에 김정일과 매우 친밀한 관계라고 설명한 바가 있다. 김정일의 러시아어 과외교사를 했던 김일성 종합대학 교수 김현식 역시 김영주가 어려서 어머니 김정숙을 잃은 조카 김정일을 불쌍하게 여겨서 어릴 때부터 잘 돌봐주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실제로 김영주가 산송장 취급받는 김성애에 비해서 명예직이나마 당의 요직을 거치면서 계속 대외활동도 했던것은 김정일과 김영주의 관계가 양호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유추가 가능하여 현재는 김영주와 김정일이 정적이었다는 설은 설득력을 잃은 상태이다. 게다가 김영주가 은퇴하던 1970년대 초는 김영주가 당조직지도부장으로 철권을 쥐고 있던데에 반해 김정일은 정치위원회에도 몸을 담지 못한 선전선동부의 부부장에 불과했고 그런 김정일이 김영주를 몰아내는 것은 아무리 수령의 아들이라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뭣보다도 김정일을 적극적으로 정치위원회과 조직지도부에 추천한 인물이 다름아닌 김영주였다. 이 때문에 일본의 저명한 북한 연구자 와다 하루키 교수도 김영주를 김정일의 후견인으로 해석한다. 김정일 리더십의 전문가인 임재천 교수 역시 김영주 숙청설에 대해서 부정하는 입장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