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영주(북한) (문단 편집) === 당의 2인자 === 1958년 10월 전원회의에서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장'''에 임명,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으며 이에 대해 당의 갑산파, 군의 [[허봉학]], [[김창봉(북한)|김창봉]] 등이 김영주를 일제에 부역한 반동으로 조직지도부장에 어울리지 않다고 반발하자 1967년 [[갑산파 숙청 사건]]을 통해 [[박금철]]과 [[리효순]] 등 갑산파를 쓸어버렸으며 1969년에는 허봉학, 김창봉을 극좌 좌경 맹동주의자로 몰아서 역시 숙청하는 등 김일성의 절대적인 수령제의 건설과 김일성 우상숭배의 정착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 1965년 8월, [[강영창]] 장의위원, 1965년 9월, [[김은순]] 장의위원, 1965년 12월, [[서채순]]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6년 10월, 조선로동당 제2차 당대표자회의에서 비서국이 설치되면서 비서로 선출되었으며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김영주의 급속한 성장에 허봉학, 김창봉 등이 불만을 드러냈으나 1969년 1월에 모두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신에게 개기던 소위 '군벌관료주의자'들이 제거된 후 1969년 12월, 4기 20중전회에서 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69년 1월, [[김갑순]] 장의위원, 1969년 3월, [[김태근(1914)|김태근]] 장의위원, 1969년 8월, [[리주연]]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 마지막날에는 김영주가 당규약 개정 보고를 맡았는데 4차 당대회에서는 명백한 2인자 [[박금철]]이 맡았던 자리였다. 그 정도로 김영주의 힘은 대단했다. 5차 당대회 결과 정치위원회 위원 겸 조직비서에 재선출되었다. 한편 괌 독트린 이후로 미군 철수의 압박,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 친미국가인 파키스탄의 패배, 1971년 중화민국의 유엔 축출 등의 불길한 상황을 연이어 목격하고 비슷한 일이 한반도에서 벌어질 것에 대해서 극도로 불안해하던 [[박정희]] 정부에선 남북대화를 통해 긴장을 줄여야겠다고 판단하고, 남북대화를 모색하였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정부는 북한의 2인자를 김영주로 파악하고 어떻게든 김영주와의 라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고 북측에 거의 강요하듯이 김영주와의 직접 회담을 요구하였다. 북측에선 김영주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했으나 남한에서 김영주를 만나야 회담이 의미가 있다고 밀어붙혔고 그 결과로 [[1972년]] 5월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두 번 회담을 하는 등,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에 일정 정도 기여하였다. 이 시기에는 실제로 [[라울 카스트로|김일성이 김영주를 자신의 후계자로 고려하고 있었다는 분석이 많다.]] 냉전기 대표적인 공산주의 연구자였던 마이론 러쉬(Myron Rush) 교수도 김영주를 김일성의 후계자로 분석하였다. [[파일:external/www.tongilnews.com/44950_1.jpg]] 좌측부터 [[이후락]], 김영주, [[김일성]]. 허나 명실상부하게 김일성의 후계자로 여겨졌던 김영주를 물러나게 한 것은 다름아닌 그의 건강이었다. 70년대부터 김영주의 건강은 극심하게 악화되었고 이 때문에 7.4 남북공동성명 때도 북에서 김영주를 집요하게 요구하는 남측에 김영주의 건강을 이유로 수차례 거절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김영주를 만난 [[이후락]]은 김영주의 건강이 정말로 좋지 않은가 알아보기 위해 그에게 강제로 술을 먹였는데 김영주는 한잔을 딱 마시고는 그대로 기절하여 며칠이나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영주에게 금주령을 내렸던 김일성이 노해서 김영주를 질책했다고. 결국 김영주는 공직수행이 불가능한 정도가 되어서 이후락의 평양 방문에 대한 답방도 자신이 아니라 부수상 [[박성철(1913)|박성철]]을 보내야 했으며, 1970년대 초부터 건강 이상을 호소하면서 공직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의사를 계속 비추었고 김정일을 자신의 후임으로 임명하고 싶다고 김일성에게 제의했지만 김일성은 이를 두고 시기상조라고 거절했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자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김영주의 좋지 않은 건강을 틈타 김성애는 노골적으로 야욕을 부리며 정치에 간섭하려 하였고 이 때문에 김영주와 김성애의 관계는 매우 나빴던 것으로 전해진다.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73년 8.28 성명을 발표하여 일방적인 남북대화 중단을 선언하고 한동안 잠적하였다. 참고로 김영주의 병이 무엇이었는지는 말이 아주 많은데, 이후락은 식물신경불화증(자율신경실조증)이라고 기록했으며, 그외에 뇌졸중(장진성), 당뇨병(강명도), 정신분열증(박규식의 김정일 평전) 등등 증언마다 다르게 언급한다. 한편 50을 넘긴 나이에 이런 중병이 왔음에도 그는 '''100세를 넘겼다'''[* 심지어 김일성의 후계자가 된 [[김정일]]보다도 10년이나 더 장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