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영삼 (문단 편집) === 개관 === * 역대 대통령 중 [[대한민국 보수정당|보수계 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에 모두 몸을 담아본 유일한 인물이다.[* 1980년대 그가 소속한 민주당인 [[통일민주당]]은 합당 후에는 현재 보수정당의 뿌리 중 하나가 되었지만, 정작 당시엔 민주당계로 분류되었고 심지어 '''김대중, 노무현도''' 통민당에 있던 시절이 있었다. 민주당이 두개로 갈라져 그 중 하나가 보수정당이 된 복잡한 역사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크게 보면 커리어를 보수정당→민주당계 정당→보수정당[* 다만 그가 처음 정치를 시작한 [[자유당]]은 점점 타락하다 [[4.19 혁명]]으로 망했기에, 1990년대 [[민주자유당]]과 계보가 직접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사실 YS가 사사오입에 반발해 7개월만에 자유당을 탈당해서 기간도 짧긴 했다.) 이념적으로도 사실 군부 색채가 일부 끼어든 민주자유당은 (점차 우경화되긴 하지만) 자유당과 결이 다르다. 이는 일반인들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모두 독재자로 싸잡아 보지만, 일부 학자들은 민간인 출신 이승만과 군인 출신 박정희, 전두환은 좀 구분지어 보기도 하는 것과도 연관이 있을듯.]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저 두 번의 진영 변경이 모두 당시 정치사의 중요한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는 게 포인트다.[* 첫 번째 진영 변경은 [[사사오입 개헌]]에 항의하는 뜻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두 번째 진영 변경은 본인이 주체가 된 [[3당 합당]]이다.] 그래서 지금도 좌우 양쪽에서 욕을 먹을 때도 칭찬을 받을 때도 있는 참 아이러니한 대통령이다.[* 주로 민주 진영에선 민주화 운동의 대부 중 한명으로 치켜세우고 특히 진중한 김대중과 비교되는 김영삼 특유의 강단을 높게 평하는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이런 점은 오히려 극우 측에선 김영삼 보수 대통령 아니라고 자기부정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연출하며, 반대로 김영삼의 대표적 과오라 할 수 있는 IMF 사태에 있어서도 서로 민주당 쁘락치다 vs 보수정당 대통령이라고 욕하거나 아니면 군부독재 시절 이미 쌓여왔던 적폐가 이때 재수없게 터진 것일 뿐이라는 쉴드를 좌우 양쪽에서 쳐주는 등(실제 IMF 이전까지의 경제 성과는 괜찮은 편이었다) 참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어찌됐든 군인 출신 대통령의 시대를 마치고 본격적인 (실권을 가진) '문민 대통령'의 시대를 연 인물이라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 적지 않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인물임은 분명하다.] 어쨌든 이런 역사 탓에 YS의 후신으로 불리는 세력은 보수정당과 민주당 양쪽에 존재한다. 그뿐 아니라 2002년, 2007년에 각각 당선된 [[노무현|민주당계 대통령]], [[이명박|보수당계 대통령]]이 시초는 YS키즈라고 불리는 김영삼 라인 출신들이었다는 재미있는 역사도 만들었다.[* 때문에 사실 YS부터 DJ, 노무현, MB까지 20년을 민주계 정권으로 따로 보는 시각도 일부 있다.][* 참고로 YS의 라이벌이자 동료였던 DJ 직계 라인들 중에선 대통령 당선자가 한명도 없는데, 2007년 대선 낙선(정동영) 혹은 2022년 경선 낙선(이낙연) 정도가 전부였다. 물론 노무현의 경우는 정확히 따지면 YS키즈였다가 삼당합당 이후 민주당으로 넘어가 DJ키즈도 된 YS+DJ--퓨전--키즈라고 보는게 더 정확하긴 하다만.] * 정치 인생의 대부분을 [[박정희]] - [[전두환]] 등 군사 독재 정권과 맞서 싸우는 일에 써왔던 인물이라 그런지 [[육군사관학교|육사]]와 [[군인]]들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것 같다. 대통령 퇴임 후 [[일본]] 언론[* [[https://www.youtube.com/watch?v=RYQtEINmYH|영상]].] 등과의 인터뷰에서 "육사는 다른 공부는 안 하고 사람 죽이는 것만 배우지 않습니까?", "육사는 바보들의 모임"[* 다만 김영삼이 육사 자체를 마냥 안좋게만 본건 아니라, 대통령 시절엔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축사자로 가 "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하나회|잘못된 것]]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군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아 주는 일에 앞장설 것을 여러분에게 다짐합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박정희는 총 맞아도 싼 인물"[* 여담으로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일본육사(편입) 출신이다. 다만 여기서 한 발언은 육사와는 관련이 없고, 독재자 박정희가 10.26 사건으로 암살당했을 때 죽어도 싸다고 느낀 소회를 말한 것.] 등 과격한 발언들을 아끼지 않았다. 후술되어있듯 "전두환은 대통령도 아니데이"라는 발언도 한 것 보면 군부 출신 대통령에 반감이 무척 많았던 대통령이었다. * 존경하는 인물로는 한국 사람 중에서는 성격이라든가 지도력이라든가 정치가로서 [[조병옥]]을 지목한 바 있고, 외국 사람으로서는 전직 미국 대통령인 [[존 F. 케네디]]를 지목한 바 있다. 특히 케네디는, 자신이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구태 정치인으로 찍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케네디 대통령이 군사정권의 행보에 태클을 걸면서 빨리 이들을 석방해야 된다는 성명을 발표, 실제 미국의 눈치를 봤는지 재판도 안끝났는데 도중에 석방된 일화를 거론하며 은연중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 민주화 운동의 일환으로 단식 투쟁하던 시기와 관련해 [[김영삼 보름달 사건]]이라는 유명한 [[도시전설]]이 전해진다. 그리고 보름달 사건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또다른 도시전설이 있었는데 바로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 김영삼이 노태우의 집무실에 쳐들어가 막말을 퍼부었다는 [[루머]]가 있었다. 다만 훗날 노태우는 회고록을 통해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 [[파일:external/ppss.kr/%EA%B9%80%EC%98%81%EC%82%BC3.jpg]] 서법에 따르지 않고 독창적인 글씨체를 구사했다고 한다. ‘大道無門’([[대도무문]])은 그의 필체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 붓만 왔다 갔다 한 듯 필획이 약하다는 평. 여백을 거의 두지 않고 굵은 체로 종이 전체를 메우고 있는 것에서 ‘통 큰’ 사람임을 드러낸다고 한다. 또한 글씨 속도가 매우 빠른 편이라 실제로도 일을 빠르게 결정하고 좌고우면하지 않았을 성격으로 보인다고 한다. 글씨의 기교가 거의 없고 정확한 정사각형 형태로 쓰고 있는 것은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고 올곧은 사람임을 드러낸다는 분석이다. 나름 마니아층이 있어서 그의 글씨는 한 점당 300~400만 원까지 꾸준히 경매에 낙찰된다고 한다. 최고 기록은 560만 원이었다. *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의 <지도자가 가는 길>을 감명깊게 읽었다고 한다. * 2022년, 민주화 이후 역대 대선후보 신뢰도 여론조사에서 보수정당 인물 중 1등을 차지했다.[[https://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1148793|#]] 재미있는건 2050·중도·진보 지지층에선 1등을 한 반면, 60대 이상·보수 지지층에선 [[윤석열]]에 밀려 1등을 하지 못했다는건데, 이걸 보면 김영삼 대통령 호감층이 진영을 넘어 꽤나 넓게 분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퇴임 후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총 5번 [[대만]]을 찾았다. 대만을 방문하여 [[천수이볜]] 당시 [[중화민국 총통|총통]]과 면담하고 대학에서 강연을 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의 대만 방문은 단순한 외유일 뿐만 아니라 1992년 단교 이후 끊겼던 한국-대만 직항을 되살리고자 한 것이기도 했는데[[http://www.taipeitimes.com/News/local/archives/2001/07/28/96043|관련 기사]]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 때인 2003년에 성사되었다. 또한 재임 중인 1993년 대만대표부를 개설했다. 중국은 김영삼의 대만 방문에 불편한 기색을 보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https://koreajoongangdaily.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aid=2484102&ref=mobile|관련 기사]] * 다만 재임 중의 대중국 외교는 괜찮은 편이었고, 특히 취임 직후인 1993년 4월 중국 [[허난 성]] [[안양시(중국)|안양시 화현]]의 시골 마을에 사는 소년[* 1982년생으로 당시 만 11세가 될 무렵이었다.] 저우샤오화(周少華)로부터 참외 씨앗 66개가[* 취임 년도 김영삼의 만 나이에 맞춘 것.] 동봉된 취임 축하 편지를 받은 뒤 1994년 3월 방중 때와 8월 청와대에서 만나는 등의 훈훈한 일화도 있었다.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3738835|방중 당시]] [[https://imnews.imbc.com/replay/1994/nwdesk/article/1936144_30690.html|한국 방문 당시]]. 여담으로 저우샤오화의 고향인 화현 마을은 중국 내에서도 매우 낙후된 시골 마을이었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보도되면서 한중 우호를 상징하는 곳으로 급부상하여 허난 성 정부가 학교를 아예 새로 지어주고 아스팔트 도로까지 대거 포장해주는가 하면 가정 형편이 어려운 저우샤오화의 집에 특별 식량 및 한국 방문시 입을 의류를 지원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다만 이후의 근황은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0311280087845630|2003년 11월에 한 번]] 나왔고 이후의 소식은 알 수 없다.] * 일제강점기 말기 [[창씨개명]]한 일본식 이름은 '가네무라 코유(金村康右)'이다. 심지어 일본 언론과 인터뷰를 보면 알겠지만 일본어도 제법 한다. 하지만 오늘날 그의 일본식 이름을 아는 대중은 매우 드문 편인데, 이는 박정희, 김대중의 일본식 이름인 다까기 마사오, 도요타 다이쥬가 넷상에서 안티들의 공격 소재로 심심찮게 이용되는 것과 달리, 김영삼의 일본식 이름은 언급이 거의 되지 않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 김영삼의 아버지 김홍조(金洪祚, 1911~2008, 향년 98세)와 김영삼 본인(향년 87세)은 모두 80이 넘게 살았다. 최초로 아버지가 아들의 대통령 취임식을 본 사례다.[* 2022년 5월 10일에 [[윤기중]]이 아들인 [[윤석열]]의 대통령 취임식을 보게 되면서 두번째 사례가 되었다.] 이범숙(李範淑, 1876~1969, 향년 94세, 윤보선의 어머니), 김태향(金泰香, 1910~1999, 향년 90세, 노태우의 어머니), 강한옥(姜韓玉, 1928~2019, 문재인의 어머니)은 어머니가 아들의 대통령 취임식을 본 사례다. 매일 아침 조깅과 배드민턴을 하면서 젊은이 같은 건강함, 활력을 유지하였으며, 대통령 시절 국빈이 방문해서 [[청와대]]에 머물면 같이 조깅을 하기도 했다. [[지미 카터]]나 [[빌 클린턴]]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주화 투쟁을 하던 1980년대에는 가택 연금 해제 후 '''민주 산악회'''를 조직해, 민주화 동지들이 건강을 유지하고 뜻을 모으는데도 도움되는 일석이조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당시 중앙정보부나 안기부 등의 도청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추측도 있다. 건물 안이나 평지에 비해 미행이 붙거나 전자 도청을 하기가 어려운 높은 산에서 정치 전략을 짜기 위해 등산을 자주 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철저한 관리 덕분에 단식 투쟁 후에도 회복이 빠른 편이었으며 만 87세까지 장수하였다.[* 교통사고로 무릎이 불편하게 된 [[김대중|DJ]]은 몸 운신이 비교적 편한 수영을 택했으며 또한 부인인 이희호가 헌신적으로 음식 내조를 해주었다는 후문이 있다.] 김영삼은 생전에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질산 테러]] 및 조폭, 경찰들과 부딪히며 위험한 고비를 수차례 넘겼으나, 심적으로 움츠러들지 않고 다음 날 [[김대중]]과 함께 국회에 등원해 여권의 잘못을 지적하는 배짱을 발하였는데, 이러한 '''기백''' 저변에는 타고난 건강 체질 + 철저한 관리 + '''용기'''가 있었던 것이다. * 선친 김홍조는 거제도에서 [[멸치]] 어업을 했다.[* 영화 [[투캅스]] 2에서도 이와 관련된 대화가 나온다. 이제 더 이상 대놓고 지역 유지들에게 보호세를 걷을 수 없게 되어 툴툴거리는 강형사(박중훈)를 파트너인 이형사(김보성)가 "용기를 내십쇼. 대통령도 월급받으면서 일하는 세상인데요"라 위로하자, 강형사는 "마! 대통령은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멸치어장이라도 있지"라고 되받아치고 이형사가 전혀 몰랐다는 듯이 "멸치어장이요?"라 반문하자 "넌 신문도 안 보냐?"라고 한심해하는 강형사에게 이형사는 "전 가쉽란은 안 읽습니다"라고 대꾸한다.][* [[김경진(소설가)]]의 첫 군사소설 동해에서도 짤막하게 나오는데, 그 유명한 멸치어장 소유자를 장문휴의 함장이 떠올리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냥 동네 어민 수준이 아니라, 어선 수십여 척에 멸치 가공 공장을 여러 개 갖춘 업계의 큰손이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김영삼은 야당 정치인 시절부터 주요 정치인들과 재야민주화운동가들에게 명절 때마다 꾸준히 멸치 박스를 선물로 보냈다. 이때문에 정치인과 재야인사들 중에 '''YS 멸치''' 혹은 '''민주멸치'''를 받은 사람이 허다했다. [[김종필]]이 김영삼을 조문하면서 이 멸치 박스 이야기를 언급했는데, 김영삼은 여당, 야당, 정치적 대립 관계 여부를 신경 쓰지 않고 설 선물로 멸치를 보냈다고 한다. 지금도 깨끗한 멸치는 귀한 선물이지만 당시엔 꽤나 이색적인 [[선물]]이었다. 그런데 김영삼 재임 시절인 1995년에는 멸치 가격이 급등해서 큰 난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당시에는 '김영삼이 아버지 돈 벌게 해주려고 멸치값을 올렸다'라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물론 이 멸치값 급등 자체는 김영삼과는 무관하고, 실제로는 씨프린스호 기름유출 사고 등으로 멸치 어획량이 크게 감소한 탓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야당에서는 정부의 물가정책을 질타하고, 김영삼 정부에서 긴급 대책 자료를 만들고 멸치를 긴급 수입하는 등의 소동이 있었다. * [[박근혜]]와 함께 [[금수저]] 출신 대통령으로도 자주 언급된다. 바꿔 말하면 한국에선 부잣집 출신 대통령은 이 둘뿐이고[* 물론 박근혜는 원래부터 금수저는 아니었고, 부친이 대통령+독재자 크리를 타면서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게 된다. [[육영재단]] 항목도 참조. 결국 부친이 멸치 사업을 한 민간인 출신 진짜 금수저는 김영삼 뿐이라는 소리.] 나머지 대통령들은 대부분 서민층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이런 부유한 집안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김영삼은 학생 때 전쟁에 징병되어 군복무를 수행했다. 더군다나 YS는 집안의 하나뿐인 외동아들이었다. 집안의 대를 이어줄 아들을 낳는데 집착했던 과거에 외동아들이 군대에 끌려간다는 것은 부모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1980년대까지는 조건(삼대독자)을 총족시켜야했지만 외동아들일 경우에는 일종의 병역특례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그 많은 재산을 민주화 운동하는데 많이 털어부었기에 금수저에 대한 반감이 강한 유권자들에게도 인정받았다. * 2022년 전까진 유일한 [[서울대학교]] 출신 대통령이기도 했지만[* 김영삼이 기득권층과 타협하지 않고 여러 개혁을 성공시킨 이유로 그의 무대포 성격에 비유해 "무식하니 용감했다"는 평을 쓰는 경우도 있는데, 사실 김영삼의 이미지와 달리 학력은 초엘리트였다.(...)], 2022년 서울대 출신인 [[윤석열]]이 취임하며 이 기록은 깨졌다. * 김영삼이 [[빌 클린턴]]을 두 번째로 만났을 때 대뜸 "Who are you!"(너 누구야!) 라고 인사를 건넸다. 화들짝 놀란 [[박진(정치인)|통역관]]이 대통령이 "How are you?"(잘 지냈어?)를 잘못 말한 줄 알고 정정했는데 나중에 왜 그러셨냐고 물어보니 [[경상도]]에선 반가운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면 "이게 누꼬?" 라고 인사한다며 그래서 Who are you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영어에도 거의 똑같은 표현이 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look who it is!" 라며 못 알아보겠다는 척을 하는 것.] 그러나 [[박진(정치인)|통역관]]이 영남 방언을 모르자 '''"배아라(배워라)"'''라고 돌직구를 날리기도 했다. 그 외에도 YS 관련 유머를 보면 이 영남 방언과 관련된 유머가 많으며 실제 사례도 적지 않다. * YS 시리즈 내용 中에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빌 클린턴]]과 만나서 빌이 "I'm [[힐러리 클린턴|Hillary]]'s husband." 라고 하자, 김영삼이 그걸 'nice to meet you' 비스무리한 인사말로 알아듣고 "Me too." (사실은 nice to meet you too 또는 you too 라고 해야 맞은 문법) 라고 답변했다는 유머가 있다. 한때 이 일화가 사실인 것처럼 항간에 퍼졌지만, 사실 이건 [[일본]]의 전 총리 [[모리 요시로]]의 일화를 차용한 것이다. 근데 나중에 일본 모리 요시로 전 총리의 일화가 구설수에 오르자, 한 일본측 관계자들은 "한국의 어느 대통령의 일화가 와전된 것."이라 해명하려 했다고 하니 뭔가 양쪽이 떠넘기기 분위기.(...) * [[파일:external/ilyo.co.kr/1378255197627740.jpg]] [br] [[파일:external/www.kyosu.net/25823_12014_2647.jpg]] 생전에 [[칼국수]]를 매우 좋아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칼국수]] 집 단골이었다. 단골 국숫집으로 알려진 모 점포에 매년 연하장을 보낼 만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2013년 뇌졸중 증세가 악화되기 직전에는 고생 많이 했다고 따로 돈을 주고 갔는데, 이게 마지막 만남이었다고. 대통령 재직 당시에도 칼국수가 [[청와대]] 주력 메뉴로 완전히 자리잡은 바 있었다. 이 시절 [[청와대]]에 초청받은 손님들은 꼭 [[칼국수]]를 대접받았으며, 때문에 면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니--은 초청받기를 꺼렸고, 또 국수의 특성상 먹어도 밥보단 배가 빨리 꺼지는 편이라 YS와 함께 칼국수를 먹었던 사람들 중에는 식사가 끝나면 몰래 다른 식당에 가서 또 식사를 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는 후문이 전해지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야당 총재 시절 영수회담을 하면서 칼국수를 대접받았는데, 한그릇으로 성이 차지 않아 회담을 마치고 나서 돌아와 당사 지하 식당으로 내려가 혼자서 해물탕 3인분을 해치우고서야 포만감을 느꼈다고 한다. 물론 이건 일반인 수준을 넘은 대식가긴 하다만. 사실 대식가 이명박에 가려져서 그렇지 DJ도 미식가+대식가 기질이 상당했다고 한다. 다만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식사량을 많이 줄였다고.] 나중에 [[문재인]]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곰탕]]을 메뉴로 내놓은 부분을 이와 관련해서 개그로 연결시키기도 했다. ''' "[[청와대]]에서 [[칼국수]] 먹고 나온 사람들은 다 배고파서 곰탕집에 모여서 2차를 했는데, 그런 일이 없도록 [[곰탕]]을 차렸습니다!" '''라고 페북에 적은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당시를 겪은 사람들에게는 감회가 남다르다고 한다. [br]김영삼 관련 유머에도 [[칼국수]]가 단골로 등장한다. 당시 유행하던 '''김영삼 시리즈'''에는 [[칼국수]] 관련 유머가 하나씩은 들어 있었다. 임기 말에 터진 [[1997년 외환 위기|IMF 사태]]로 인해 인기가 바닥을 찍었을 땐 '먹으면 먹을수록 머리가 나빠지는 음식'이라는 조롱도 돈 적이 있었다. <고바우 영감> 만평에서 자꾸 먹으면 머리가 나빠진다면서 ''''4년 동안의 임상 실험 결과''''라고 확인사살을 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 원래 김영삼은 [[서울대]] 출신이지만 머리 나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보니 더더욱 그랬다. [[칼국수]] 애호에 대해서도 '일부러 청렴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조작한 거 아니냐'라는 비난도 없지 않았다. 물론 이런 이미지 구축의 의도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김영삼이 [[칼국수]]를 좋아한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김영삼의 단골 칼국수 식당들마다 김영삼이 남긴 휘호나 기념사진들이 걸려 있을 정도. 다만 김영삼이 생전에 가장 즐겼던 [[칼국수]]는 [[멸치]] 육수나 [[바지락]]으로 국물을 낸 해물 [[칼국수]]가 아니라 [[쇠고기]]와 [[사골]] [[설렁탕|육수로 끓인 형태의]] 안동식 [[칼국수]], 일명 안동국시로, 시중에서 먹으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해물 [[칼국수]]에 비해 좀 더 비싼 물건이다. 그렇다고 아주 사치스러운 음식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고, 보통 서울 시내의 매장에서 한 그릇에 1만 원 안팎 수준으로 판매하는 편이니 일반인들도 쉽게 먹을 만한 가격대이다. 즉 일반인들이 먹는 음식 중에서 좀 비싼 물건 정도다. [[https://brunch.co.kr/@guxist/20|#]] 따라서 결론을 내리자면 '이미지 메이킹을 할 필요가 있었는데 마침 좋은 소재가 김영삼 본인에게 있었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스케일은 다르지만, [[이명박은 배고픕니다]]를 비롯한 각종 [[이명박#s-6.1|이명박의 먹방]]처럼 이해하면 될 듯 하다. [br]당시 [[청와대]]의 [[칼국수]] 대접에 대해 정치적인 전략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는데, [[3당 합당]] 이전까지는 김영삼을 열렬히 지지했다고 밝힌 시사평론가 [[이동형]]은 팟캐스트 [[이이제이]] 김영삼 편에서 "김영삼은 [[거제시]]의 아버지 선단에서 잡은 멸치를 자주 선물로 보냈다. 멸치라는 게 금방 먹는 것도 아니고 두고두고 먹는 식재료이기 때문에 선물받은 사람은 먹을 때마다 YS를 생각하게 된다. [[칼국수]] 육수 또한 [[멸치]]로 우려내는 것이기 때문에 같은 이유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는 의견을 낸 바 있다. 다만 YS 임기 당시 청와대에서 나왔던 칼국수는 당연히 평소 대통령이 선호하는 안동식 칼국수, 즉 '육수를 멸치로 우려내지 않은 칼국수'였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진짜 저런 의도가 있었을지는 미지수. [br]김영삼 전 대통령이 단골로 찾아 안동국시를 즐겼던 곳 중 한 곳인 [[성북구]] [[성북동(서울)|성북동]]의 '국시집'이라는 음식점은 역사성을 인정받아 김영삼 사망 한 달 뒤인 2015년 12월에 [[서울특별시]] 미래유산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http://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157026|기사]]. 그 외에도 서민 음식을 많이 좋아했다고 하며 [[설렁탕]]을 먹는 사진이 사후 포털에 올라온 적도 있었다. [[신사동(은평구)|신사동]]에 위치한 '봉희설렁탕'([[새절역]] 인근)이라는 음식점 역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골 식당 중 한 곳이었다고 한다. [br]김영삼이 [[칼국수]]를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을 때 당시의 대학가에서는 YS를 폄하할 때 [[칼국수]]가 아니라 차라리 [[김영삼 보름달 사건|보름달빵]]을 먹으라는 대자보가 돌기도 했다고 한다. 그 외 김영삼의 정치적 정적이던 [[박철언]]의 처제이자 올림픽 탁구 금메달리스트기도 했던 [[현정화]]는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2/02/2011120201508.html|인터뷰]]에서 "땀 흘려 뛰고 온 운동 선수들한테 [[칼국수]]가 뭡니까?"라고 툴툴거린 적도 있었다. [br]5월 5일 어린이날에 초등학생을 청와대에 초청하여 간담회를 가지던 중 한 초등학생이 YS에게 "청와대에서 매일 칼국수를 드시냐?" 고 물으니 "매일 먹는 건 아니고 자주 먹는다" 고 답하자 그 초등학생이 "그러면 우리도 청와대 칼국수를 먹어볼 수 있느냐?"고 다시 물어보니 "먹게 해주겠다"고 흔쾌히 답하였다. 그러자 다시 초등학생이 "정말이냐?" 고 물어보니 YS가 껄껄 웃으면서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거짓말을 해서야 되겠느냐?" 고 답하자 초등학생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후 그 초등학생들이 진짜 청와대 칼국수를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는 보도자료가 나오지 않아 확인이 불가하다. * 그의 딸 김혜영(김현철의 누나)이 [[배우]] [[이덕화]]와 국민학교 6학년때 같은 반이었다. 이덕화에게 김영삼은 친구의 아버지인 셈. 그 인연으로 이덕화는 1992년 [[14대 대선|대선]] 때 김영삼을 공개 지지하기도 했고 유세에도 참여했으며, 1996년 총선에 출마하기도 했지만 [[남궁진]]과 맞붙어 단 1,400여 표 차이라는 아주 근소한 차이로 낙선하였다. 이때 선거자금으로 돈 엄청 까먹었다고. 이 때의 경험이 상당히 뼈아팠는지 이후 이덕화는 단순한 지지 선언 정도를 제외하면 정계에는 관여하지 않고 있다. 헌데 공교롭게도 이덕화는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 김영삼의 평생의 숙적 중 한 사람인 전두환 역할을 맡은 바 있다. 물론 해당 드라마가 전두환 까는 내용도 많은걸 고려하면.. * 손자가 [[대일외고]]를 나왔다. [[http://m.econovill.com/news/articleView.html?idxno=1638|기사]]. * 김영삼이 평소 가장 아꼈던 차남 [[김현철(1959)|김현철]]은 아이러니하게도 YS 정권 당시 한보 스캔들 여파로 구속당한 이후 사실상 정계에서 퇴출되었지만 꾸준히 재기를 노렸는데, 원랜 무소속으로라도 부친의 고향이기도 한 [[거제시]] 지역구에 여러차례 출마하려 했으나 당시 한나라당 내부 사정 등으로 이를 무르고 공천 결과를 기다렸으나, 과거 구속 전례 등 공천받기엔 워낙 여건이 좋지 않아 결국 공천을 못 받았고 2012년에도 [[새누리당]] 소속으로 공천받지 못하자 결국 당시 당권을 잡고 있던 [[박근혜]]에 대한 악감정도 있고 해서인지 당을 탈당했다. 이후 연장선상인지 2012년 대선에선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고, 2014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는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를 시사한 적도 있었으나 여론의 반발 등으로 성사되진 못했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총선]]에서도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출마할 가능성이 점쳐졌고, 이에 대해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51127154404353|구체적인 기사]]도 나왔으나, 2015년 말 부친의 사망 후 충격 때문에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부친의 기념사업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다만 [[제19대 대통령 선거]] 때도 김현철은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고, 이후 [[더불어민주당]]에도 입당해 당원이 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에서도 찬밥 신세가 이어지자[* 애초에 냉정하게 보면 과거 스캔들을 일으켜 대중의 공분을 산 당사자를 다시 정치판에 공천한다는 것 자체가 법 논리를 떠나 이미지도 중요한 정치판에선 쉽게 할 수 있는게 아니다. 차라리 본인 대신 자식을 정치판에 밀고 본인은 킹메이커나 하는게 더 나았을듯.] "이 당에선 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며 탈당했고, 이후 보수당이 수구화되면 부친의 간판은 떼라는둥 정치적 훈수 행보를 이어가다 2022년에는 [[윤석열]]을 지지하는 행보도 보인다.[* 2021년 국민의힘 입당 직전 윤석열이 김영삼도서관을 찾아 김현철과 대담한 바 있다.] 대선 이후엔 YS가 철거한 조선총독관저를 윤석열 정부가 복원하려 한다는 기사가 뜨자 이에 절대 반대하기도 했다. * 전국 각지의 관공서에 사진이 걸린 마지막 대통령이기도 하다. 1993년 [[:파일:김영삼.png|취임 당시부터]] [[http://www.ehistory.go.kr/page/view/photo.jsp?photo_PhotoSrcGBN=PT&photo_PhotoID=17564&detl_PhotoDTL=137463|걸렸던 사진은]] 이전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근엄하게 입을 굳게 닫은 사진이었으나,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111900209129013&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4-11-19&officeId=00020&pageNo=29&printNo=22689&publishType=00010|1994년부터 국민들에게 친근히 다가가기 위해서]] [[http://ehistory.go.kr/page/view/photo.jsp?photo_PhotoID=22967&photo_PhotoSrcGBN=PT|맨 위의 사진처럼 웃는 사진으로 바뀌었다.]][* [[파일:김영삼 관공서사진.jpg]] 참고로 이 사진이 기존의 근엄하게 입을 굳게 닫은 사진에서 웃는 사진으로 바뀐 1995년 ~ 1996년경에 실제로 관공서에 걸렸던 사진이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112900209101003&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4-11-29&officeId=00020&pageNo=1&printNo=22698&publishType=00010|#]]] 그러고 나서 후임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권위주의 타파라는 이유로 재외공관 등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통령 사진을 걸지 않기로 하면서 이 관행은 사라지게 된다. * 관공서 대통령 사진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에 대한 경칭인 '[[각하(호칭)|각하]]'가 쓰인 마지막 대통령이기도 하다. 역시 김대중 전 대통령부터 '대통령님'이란 호칭으로 바뀌었다.[* 원래 [[노태우]] [[전 대통령]] 때부터 "'각하' 대신 '대통령님'이라 호칭하자"는 말이 나왔고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각하란 말이 사용되지 않았지만, 관습이란게 은근 무서워서 여전히 비공식적으로 대통령을 대면할 땐 각하란 호칭이 김영삼 전 대통령 때까지 사용되었다.] * [[상도동(서울)|상도동]]에 장기간 거주했다. 김영삼계를 지칭하는 [[상도동계]]라는 명칭도 여기서 비롯됐다. 1960년대에는 상도동이 [[영등포구]]에 속해 있어서 영등포구로 주민 등록이 되어 있다가 1973년, [[관악구]]가 영등포구에서 분구되고 상도동도 관악구에 편입되면서 관악구로 주민등록이 이전되었다가 1980년, [[동작구]]가 관악구에서 또 분구되고 상도동도 동작구로 편입된 이후 서거할 때까지 동작구로 주민등록이 되어있었다. * [[김두한]] 전 의원과 같은 시기에 정치 생활을 했고 그와 같은 당이었던 적도(자유당, 신민당) 있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54%EB%85%84_%EC%97%AC%EC%95%BC_%EA%B5%AD%ED%9A%8C%EC%9D%98%EC%9B%90_%EA%B8%B0%EB%85%90%EC%82%AC%EC%A7%84.jpg]]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김두한]], 두 번째가 김영삼. 야인시대에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등장했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김두한이 3김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궁금해하기도 했다.[* 야인시대에서는 자유당 정부 시절 젊은 YS가 [[유진산]], [[조병옥]], [[김두한]] 및 야당 의원들과 함께 원탁에 앉아 시국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위의 사진은 국회의원 야구대회 사진이고, 김영삼이 나중에 퇴임 후 2010년대에 김두한 이야기를 인터뷰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야인시대에서 나왔던 것처럼 김두한은 부하들 끼니를 챙겨주고자 김영삼을 포함한 동료 의원들에게 돈을 빌리곤 했고, 김영삼은 김두한을 '머리랑 언변은 좋은데 글은 못 읽는 사람' 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김두한 의원은 자신에게 온 편지들을 읽을 줄을 몰라 김영삼을 찾아와서 좀 읽어달라고 한 적도 많았다고 하는데, 이는 평소 김두한에게 "이렇게 작고 예쁜 손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느냐?"며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는 김영삼에게 호감을 느낀 김두한이 YS를 만나고자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 인재를 판단하는 통찰력 및 안목이라는 혜안 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고, 동지이자 맞수인 김대중보다 다른건 몰라도 이 방면에서는 한 수 위였다. 3김이 한국 정치 무대에서 퇴장한 뒤 한국 정치를 좌우해온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김영삼의 손을 잡고 정계로 들어온 사람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노무현]]'''과 '''[[이명박]]'''. 또한 [[이회창]], [[손학규]], [[이재오]], [[정의화]], [[김영춘(정치인)|김영춘]], [[박형준]], [[안희정]], [[이광재]], [[심재철]], [[최기선]], [[박재호]][* 김영춘, 박재호, 최기선은 상도동계 직계 인물이다.] 등의 인재를 발굴해 내었는데, 알다시피 노무현과 이명박은 대통령까지 되어 치적을 남겼고, 이회창 또한 [[15대 대선|3]][[16대 대선|번]][[17대 대선|의]] 대선에서 존재감을 보였으며, [[손학규]] 또한 경기도지사와 민주당 당대표를 역임했다. 이재오는 이명박 정부 시절 이명박의 왼팔 역할을 했고, 정의화는 18대 국회에서 부의장을, 19대 국회에서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안희정 또한 노무현의 측근에서 노무현을 보좌하다가 이후 충남지사가 됐으며, 민주당의 유력 대선 주자로 떠오르기도 했다. 김영춘 역시 [[문재인 정부]]에서 [[해양수산부|해수부]] 장관직을 수행하였다. 최기선도 인천시장을 두번이나 역임했다. [[박재호]]는 3전 4기 끝에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현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당시 변호사였던 [[문재인]]과 [[박원순]]의 발탁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당시엔 이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어 김영삼의 영입 제안을 거절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도 나중에 대통령과 서울시장이 되면서 정치적 거물이 되었다. * [[이명박 정부]] 시절 이명박이 [[정운찬]]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면서 중용했는데, 이 시기에 정운찬과도 상당히 친해졌다. * 5공 때 가택연금을 당하던 시절 [[상도동(서울)|상도동]] 옆집에 살던 당시 국민학생인 이규희와 친해졌다. 당시 10살이던 이규희씨는 운동 중인 김영삼에게 인사하고, 김영삼이 나올 수 없으니 이규희가 놀러 가며 김영삼이 이규희를 '꼬마동지'라 부르고 자신은 '대장동지'라 하며 친해졌다. 이규희가 부모님이 해준 음식을 들고 가기도 하고, 김영삼도 아버지 김홍조 옹이 보낸 멸치를 나눠주기도 했다. 서슬퍼른 5공 경찰들도 10살 꼬마는 수색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일하게 김영삼의 집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던 사람이었기에, 이를 이용해 김영삼의 [[편지]]를 숨겨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에는 이 시절 이야기들을 『꼬마동지 대장동지』라는 책으로 내고, 이 때 인세로 심장병에 걸린 [[https://m.chosun.com/svc/article.html?sname=news&contid=1993050473102|어린이의 수술을 도왔다.]] 결혼 후 한 때 [[미국]]으로 떠났다 상도동의 그 집으로 돌아오고, 어머니가 되어 아들을 데리고 김영삼을 만나기도 하고, 김영삼의 사망 후 빈소도 방문하였다.[* 다만 정재계의 쟁쟁한 인사들이 모인 자리다 보니 불편해서 오래 있진 못했다고 한다.] [[https://news.joins.com/article/19115512|관련기사]] * 상기했던 2003년 일본 언론과의 [[https://youtu.be/cejoFCVzCs0|인터뷰]]에서는, [[반일|일본에 대한 감정]]과는 별개로, '''통역 없이 [[일본어]]로 인터뷰를 진행했을 정도로 일본어 실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영삼이 어린 시절을 보낸 [[일제강점기|당시의 시대]]를 생각해 보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다.[* 당장 김영삼 뿐만 아니라 김대중, 김종필 등도 그 당시에 태어나서 일본어에 상당히 능숙했다.] 처음에는 약간 머뭇거리는 듯한 말투였으나, 인터뷰가 진행될 수록 예전의 감을 찾아가는지 현지인과 별 다를 것 없는 억양을 보였다.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김영삼'을 검색하면 12만 8천건의 기사가 나온다. 이 중 김영삼이 가장 처음 등장한 기사는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5205310023910101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2-05-31&officeId=00023&pageNo=1&printNo=8976&publishType=00010|1952년 5월 31일 조선일보 1면의 '정부인사']]로, 김영삼이 [[장택상]] 전 총리 비서관에 임명되었다는 기사이다. * 알고보면 전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과 유사한 점이 많다. 우선 [[자연인]]으로서의 프로필만 보더라도, 두 사람 다 유복한 집안 출신이며, 키가 168cm에, 체중 또한 63kg이랑 62kg으로 거의 비슷하다. 둘 다 각각 [[6.25 전쟁]]과 [[보어 전쟁]]에 참전한 [[참전용사]]들이며, 결혼했을 당시 아내의 나이도 22살, 23살로 거의 비슷하며, 아내와 총 5명의 자식을 낳았다는 점에도 동일하다. 성격적으로 보더라도 둘 다 배포와 통이 크고, 한량아적 성격과 유머 감각, 다혈질이라는 점도 매우 유사하다. 정치인으로서 볼 경우, 두 사람 모두 보수주의 정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자유당(영국)|자유주의 정당]]으로 옮겨가서 활동했다가, 다시 보수 정당으로 돌아와서 정부 수반의 자리에 오른다. 정부 수반의 자리에 오른 나이도 만 66세로 동일하다. 자유주의 정당에서 활동한 이력 때문인지, 두 사람 모두 보수정당 내 온건파라고 할 수 있는 [[자유보수주의]], [[보수자유주의]] 성향이라는 것도 유사하다. 또 소속 정당 내 소수파로서, 각각 당 내 다수파인 [[민정계]], 화독파와 대립했다. 심지어 김영삼과 처칠이 대립했던 당 내 다수파인 민정계와 화독파 또한 각각 [[국가주의]], [[군국주의]]적 성향을 띠는 정치세력과,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그런 정치세력]]이 [[나치 독일|집권한 나라]]에 유화적인 정치세력이라는 점에서 연계되는 부분이 있다. 또 [[극우]]의 입김이 강한 [[일본|이웃]] [[나치 독일|나라]]에 대해 매우 강경했다는 것도 유사하다. 정부수반으로서의 첫[* 김영삼은 단임제 국가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인만큼 당연히 첫 임기밖에 없지만, 처칠은 두번째 임기도 재임했다.] 임기가 5년 정도였다는 것도 동일하고, 심지어 정부수반으로 취임하고 5년 후에 치러진 [[제15대 대통령 선거|정부수반]] [[1945년 영국 총선|선출 선거]]에서 승리한 제1야당이 사실상 거의 처음으로 안정적인 집권에 성공했다는 점도 동일하다.[* 물론 영국은 노동당이 그렇다는거고, 노동당에 지지층 내주고 몰락하기 이전 20세기 초까지 보수당과 경쟁한 자유당은 이미 여러번 집권 경험이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