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연준(1914) (문단 편집) === 학창시절 === 1929년 명천군 우북보통학교를 18등으로 졸업한 김연준은 명천군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함경도 경성(鏡城)고보에 합격했다. 경성고보 4학년으로 올라가기 직전인 1932년 3월, 인촌 [[김성수(1891)|김성수]]가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했는데, 이 보도를 접한 김연준은 언젠가는 ‘김성수처럼 학교를 만들어 이 땅의 인재들을 길러내는데 이바지 하겠다’는 뜻을 품었다고 한다. 한편 김연준은 경성고보 시절부터 음악을 워낙 좋아하여 당시 유명한 [[현제명]][* 당시 현제명은 연희전문 영어과 교수였지만 음악부도 이끌었다.]이 있는 [[연세대학교|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1935년 경성고보에서는 7명이 [[연희전문학교|연희전문]]에 도전했으나 김연준만 합격했다고 한다. 대한 진학 후에는 음악적 재능을 살려 연전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 파트에서 활동했다. 1936년 제15회 연전추기음악회에서 제2 바이올린으로 출연하였다. 이 시절 그의 목표는 오로지 음악이었는데, 친구들에게 “예술에 전념하기 위해 결혼을 포기해야겠다”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연희전문학교]] 시절 뜻이 맞는 친구 가운데 하나인 [[주영하(1912)|주영하(朱永夏)]]가 대학교를 세운다고 하자,[* 실제로 주영하는 1940년 경성인문학원을 세웠는데, 이 학원이 수도여사대를 거쳐 지금의 [[세종대학교]]가 되었다.] 자기도 대학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1939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로부터 거금을 받아 1939년 7월1일 그는 경운동 천도교 기념관에서 4개 과, 630여 명의 학생으로 2년제 중등과정인 [[한양대학교|동아공과학원]]을 개원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