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약연 (문단 편집) === 일제의 탄압 === 일제는 이렇듯 간도에서 배일 투쟁을 벌이는 김약연을 체포하려 들었다. 평소 김약연의 친중국 노선과 인품에 매료되었던 중국 연길현장 도빈은 일제의 마수가 뻗치기 전에 먼저 김약연을 체포, 감금했다. 김약연은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연길 감옥에 구금되었지만, 실제로는 손님 대접을 받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일제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패배를 앙갚음하기 위해 경신 대토벌을 단행해 북간도의 한인 마을과 교회를 불태우고 한인 수천명을 학살했으며, 1920년 10월 20일에 명동학교를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었다. 1922년 석방된 김약연은 폐허가 된 터 위에 임시교사를 지어 민족교육을 지속했다. 그러나 1924년 극심한 흉년으로 명동학교가 운영난에 시달렸고, 1925년에는 명동중학교 인가가 취소되어 학생들이 캐나다 선교부가 운영하던 용정의 은진 중학교와 명신여학교로 전학했다. 하지만 김약연은 포기하지 않고 1923년 2월 26~27일 용정에서 개최된 전간도 주민대회에서 '간도 자치권' 획득을 위한 실행위원으로 선임된 뒤 중국 당국과 지속적으로 교섭 활동을 벌였다. 중국인들은 그런 그를 가리켜 '한국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붙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