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약연 (문단 편집) === [[3.1 운동]] === 1918년 [[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 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가 발표되었다. 이에 북간도에서는 독립운동의 불길이 타올랐다. 명동학교 학생들은 충렬대(忠烈隊)를 조직했고, 1918년 음력 12월 만조와 노령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 독립선언은 당시 만주와 노령은 물론 미주 등 여러 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동휘]], [[김좌진]], 조용은, [[이승만]], [[안창호]] 등 저명한 독립운동 지도자 39인의 명의로 발표되어 이후 재일한국 유학생들의 동경 2․8 독립 선언과 국내 3․1 독립 선언의 기폭제가 되었다. 김약언 또한 이 선언서 발표 명의자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이후 김약연은 1919년 2월 노령 니콜리스크에서 열린 한족대표자회의에 정재면과 함께 북간도 대표로서 참석했다. 이 회의는 노령 각지는 물론 서간도와 북간도, 그리고 국내의 단체 및 지역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작성 선포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선정 파견하기 위해 소집된 것이었다. 이때 그는 일제가 온갖 협박과 공갈적인 수법을 동원해 '한국인은 일본에 합방을 원한다는 거짓말을 파리 강화회의에 제공할 계략을 꾸미고 있다"면서 이에 대한 강력한 항의와 대비책을 촉구했다. 1919년 3월, [[3.1 운동]]이 한반도에서 발발했다는 소식이 북간도에 전해졌다. 이에 김약연은 독립선언대회를 추진했다. 우선 그는 정재면, [[강봉우]] 등 동지들과 함께 극비리에 거사 계획을 세운뒤 회령으로부터 3.1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이를 명동학교에서 대량 등사했다. 그리고 충렬대 대원들로 하여금 독립 선언서를 북간도 전역에 배부하도록 했다. 이후 1만여 명의 북간도 한인 동포들은 3월 13일 북간도 연길현 용정 북쪽에 위치한 서전대야(西甸大野)에 모여 독립선언 축하회를 개최하였고, 이어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김약연은 용정 만세 시위에서 명동학교 졸업생들과 재학생들을 이끈 채 시위대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이라고 대서특필한 깃발을 앞세우고 손에는 태극기를 들었다. 이에 일제는 중국 관헌과 교섭하여 중국 군대로 하여금 시위를 진압하도록 했다. 그 결과 중국 군대의 발포로 충렬대원을 포함한 시위대 18명이 피살되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후 김약연은 국내에 귀국해 간도 독립운동 기성총회를 발족하고 군자금을 모집했다. 이때 구춘선이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김약연 본인은 의사(議事)부원으로 선임되었다. 1919년 4월 13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김약연은 국호와 단체의 이름이 서로 상충되지 않고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단체명을 대한국민회로 개칭했다. 대한국민회는 간민회의 조직과 인맥을 계승해 한인 동포들에 대한 민사 행정을 실시했고, 군사활동은 [[홍범도]] 부대와 안무 부대를 산하에 두고 지원, 육성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을 수행했다. 또한 1920년 5월, 그는 간도에서 대한국민회 본부를 명동학교에 두고 신문 <자유의 종소리>를 발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