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약연 (문단 편집) === 간민회 === 이즈음 중국에서는 [[신해혁명]]이 일어났고 1912년에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새로 성립한 중화민국 정부가 연성자치(聯省自治)를 표방했고, 중국 각지는 자치의 분위기가 성숙되었다. 이같은 지방자치의 물결은 북간도에도 전해졌고, 김약연은 이동준, 김림 등과 함께 한인 자치기구를 창설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특히 1912년 이동휘과 명동촌으로 망명해오자, 그는 이동춘, 정재면, 김영학, 박찬익 등과 함께 1913년 4월 간민회를 창설하고 한인동포들의 공식적인 자치기관으로서 중국 지방정부의 허가를 받았다. 김약연은 간민회의 회장을 맡았고 본부를 국자가(局子街)에 두고 연길․화룡․왕청현 등지에 분회를 설치하여 북간도의 한인동포들을 관장했다. 간민회는 한인동포들에 대한 호구조사와 교육 계몽사업은 물론 세금을 매겨 징수하는 등 북간도의 한인정부와 같은 존재였다. 중국 관청 또한 일체의 한인 관련 업무를 간민회를 통해 집행했으니, 간민회는 명실공히 중국 정부의 보호와 지원 아래 성립한 북간도 한인 동포들의 자치정부였다. 그러나 간민회는 [[위안스카이]] 집권 후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려는 중국 정부의 지방자치 철폐령과 일제의 압력 행사로 인해 1914년 3월 해산되고 말았다. 그 후 김약연은 명동학교의 운영에 전념하면서 후세들에 대한 민족교육과 독립사상 고취에 정성을 다하여 민족의 미래를 준비했다. 명동학교 학교 학생과 졸업생들은 이후 재만 한국 독립운동의 주력군으로 등장하였고, 김약연은 이들의 정신적이며 실천적 지도자로 추앙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