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식(조선) (문단 편집) == 생애 == [[한양|한성부]]에서 자랐다. 1501년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관심이 없었고, [[성리학]] 연구에 힘썼다. [[중종(조선)|중종]]이 즉위하자 [[조광조]] 등과 신진 사림파에 속하여서 개혁 정치를 펼치려 하였다. 성균관과 이조 판서 안당의 천거로 종6품직인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에 서용되었다. 이어 형조 좌랑, 호조 좌랑, 지평, 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4월 현량과에서 장원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성균관 사성, 홍문관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절도안치의 처벌이 내려졌으나 영의정 정광필의 비호로 [[구미시|선산]]에 유배되었다. 1521년 신사무옥이 일어나자 절도안치 처벌이 내려졌고 [[거창군|거창]]에 숨었다가 자결하였다. 기묘 사화 후에 현량과가 폐지되면서 그의 직첩과 홍패도 환수되었으나 [[명종(조선)|명종]] 때 관직이 복구되었다. 그리고 [[선조(조선)|선조]] 때에 이조 참판을 거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후손으로 [[김육]], [[김좌명]], [[김우명]], [[김석주]], 김석문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