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시진 (문단 편집) == 피칭 스타일 == 80년대 140초반대의 직구와 공의 가감속 조절 능력, 흔히들 완급조절이라 부르는 것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슬라이더나 커브 등 다양한 구종을 구사했으며, 이중 체인지업은 프로야구 역사를 통틀어도 수준급이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더불어 원하는 곳에 공을 던질 수 있는 컨트롤을 바탕으로 본인은 신중한 승부를 즐겼는데, 코너웍과 유인구로 삼진을 잡아내거나 세밀한 컨트롤로 뜬공을 유도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80년대에 활약했던 올드 선수들, 해설자들이 김시진을 두고 '''구속은 빨랐지만 구위는 압도적이진 못해서 정면 승부보단 유인구를 많이 던지는 투수'''로 평하곤 한다. 이로 인해 소위 두뇌파 투수로 통하며 볼넷이 많은 편이었다. 다만, 김시진의 성적과 실력은 이견이 없는 80년대 NO.3 이기에 볼넷이 많았다는 걸 문제시 하진 않는다. 정면 승부를 즐겨하지 않았기에 볼넷 관련해서도 많은 기록이 있는데, 피볼넷이 통산 4위고 [[1985년]] 세운 121볼넷은 무려 단일시즌 2위 기록이다. 다만 정상급 투수들과 비교해서 볼넷이 많은 편인건 맞지만 1985시즌의 단일시즌 기록은 270이닝 가까이 되는 많은 이닝에 수반된 기록이고 9이닝당 볼넷은 4.04개로 아주 나쁜 수준은 아니었다.[* 한편 볼넷에 관련해서 김시진은 (지금 시점에서도 그렇지만) 매우 관대한 시각을 갖고 있었다. 볼넷은 내주는 것이고, 안타는 당하는 것이라고.. 맞으면 2루타, 3루타, 홈런이 될 수도 있는데 볼넷을 내주면 1루만 내주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이쪽이 더 유리할 수도 있다. 이러한 지론은 고의사구가 있는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적당히 피할 타자는 볼넷으로 피해가는 유연한 플레이를 선보이곤 했으며, 이 점이 두뇌파 투수로서 김시진의 장점이라면 장점이기도 했다.] 내구성이 매우 대단했던 투수로, 1985년 기록한 269.2이닝은 정규시즌 이닝기록 역대 3위이며, 포스트시즌 기록 포함 시 5시즌 연속 200이닝(1983년~1987년)을 기록했다.[* 83년 229.1이닝(PS 기록 없음) - 84년 233.2이닝 - 85년 269.2이닝(PS 기록 없음) - 86년 217.1이닝 - 87년 205이닝] 이외에도 1985년 총 투구수인 4,231구는 KBO 리그 단일시즌 3위이며, 1989년에는 한 경기 최다 투구수 승리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219구) 요약하자면 정상급 컨트롤 능력과 빠른 구속, 좋은 변화구에 강력한 내구성 등 에이스의 덕목은 다 갖춘 투수로 타자와의 신중한 승부를 즐겼던 두뇌파. 볼넷이 많아 제구력이 좋지 않다는 이미지가 있으나 이와는 별개로 탈삼진 능력은 매우 우수했던 투수였다. 정작 본인은 탈삼진에 크게 연연하진 않았고[* 지금도 그렇지만 탈삼진을 잘 잡는 투수가 에이스라는 인식이 당시로서는 매우 만연했다. 가뜩이나 에이스 대접 받는 투수들은 삼진 잡기에 특화된 투수들밖에 없었다는 게... 다만 상술하듯 김시진의 탈삼진 능력이 이들에게 뒤쳐진 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피해가는 등 유연한 플레이를 지향했다는 것이 독특한 점이다. 몸이 늦게 풀리는 기질이 있어서 등판 직후 꽤 고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때문에 김시진이 털린다면 1~3회 내로 집중공략당하거나 몸이 안 풀려서 자멸하는 등 빠른 시간에 털리는 경우가 많았으며, 아마 수많은 피볼넷의 몇몇은 몸이 안 풀렸을 때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계투로는 적절하지 않은 스타일.[* 실제 김시진은 당대 에이스 치고는 불펜 등판 빈도가 적은 편이나, 불펜 등판 빈도가 줄어드는 건 커리어하이 바로 다음 해인 1986년 시즌부터 심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커리어 후반기에는 아예 현대 야구의 선발투수 수준으로 불펜 등판 빈도가 적다.] 큰 경기에서 [[새가슴]] 기질이 있어서 포스트시즌에서 단 1승도 기록하지 못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알려진 것과는 달리 호투를 펼쳤는데도 타선이 안 도와줘서 패배한 포스트시즌 경기도 몇 있다.[* 대표적인 경기가 1984년 한국시리즈 3차전의 부상 투혼 등판. 1986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의 초반 난타 허용, 1987년 한국시리즈 1차전[* 특히, [[장효조]]의 만세 사건이 이 시리즈에서 터진거다.]에서의 야수실책 퍼레이드 등 억울하거나 운이 없었던 적도 존재한다.] 이와는 가장 대조적인 케이스가 바로 김시진의 수제자 장원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