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순자 (문단 편집) == 개요 == [[학력]]은 선거공보상에는 미기재했으나 이후 [[울산]] [[반곡초등학교]]를 졸업한 [[초졸]] 출신인 것으로 알려졌다. 청소노동자가 되기 전에는 '''[[한나라당]]''' 당원이었다고 하며, 한나라당 지역 여성회장을 역임하고, 관변단체인 '''바르게살기협회'''와 '''반공멸공회'''에서 활동하는 등 [[보수주의|보수]] 성향에 가까웠다고 한다. 대통령 후보 등록과정에서 일부 경력을 미기재하여 상세한 경력은 불분명하나, [[2003년]]부터 [[울산과학대학]]에서 [[청소]][[노동자]]로서 활동하였고 [[민주노총]] 울산지역연대노조 울산과학대지부장을 지냈다. [[2007년]] [[2월 23일]] 학교측의 부당한 계약해지 해고에 맞서 63일간의 천막농성 끝에 복직했다. 이것이 노동운동가의 길을 걷게 된 시초였다고 할 수 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진보신당]]의 [[비례대표]] 후보 1번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2012년]], [[11월 26일]] [[제18대 대선]] 후보로 등록해 대선에 참가하였다. [[진보신당]]이 대선 후보를 내지 않기로 결의한 이후, 대선에 출마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잡음이 있었다. [[http://www2.laborparty.kr/bd_member/809790|이 복잡한 계파의 나열을 보라...]] [[김소연(1970)|김소연]] 후보와 함께 두 명의 [[무소속]] 후보가 '노동자 후보'로 별도 독자 출마하는 웃지 못할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굳이 따진다면 김소연 후보가 [[민주노총]] 현장파의 지지를 받았음에도 16,687표로 김순자 후보 대비 부진했으나, 0.05%이냐 0.15%이냐의 차이였을 뿐이다.] 다만 후일 [[최저임금]] 1만원과 노동자 [[안식년]], [[기본소득]]을 최초로 공약한 대선후보로 역사에 남았는데, 구 [[사회당(1998년)|사회당계]]가 [[노동당(대한민국)|노동당]]을 거쳐 [[기본소득당]]으로 이어진 것을 보면 그 공약의 출처가 어디인지는 분명하다고 하겠다. 전면 버스와 cm송([[https://youtu.be/WCA20WA7xto|#'좌파의 시대']])을 포함해 상대적으로 김소연 캠프에 비해 자금 여유있는 선거를 했다. 대선 이후 [[2013년]]에는 구 사회당계가 주축이 된 청년단체인 [[알바연대]]에서 대표로 활동했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의 [[서울시장]] [[정몽준]] 후보 항의 방문이 두드러진 활동.[* 울산과기대 이사장이 바로 정 후보였다.] [[2015년]] 연말까지 활동했으나, 이후로 다음해 알바연대가 [[알바노조]]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대표로서 거론되지 않게 되었다. [[2017년]] [[19대 대선]]에서 정권이 [[문재인 정권]]으로 바뀐 뒤에도 계속 파업 중이며, [[2017년]] [[8월 12일]]부터 [[청와대]] 등으로 일인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당해 연초 미끄러져 다리가 부러져 철심을 박은 채로 시위에 나섰다.] 날짜는 [[2014년]] [[6월 11일]]부로 계속 기산 중이다. 생계는 울산 지역 연대기금으로 유지 중.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울산광역시장]]이 [[더불어민주당]]의 [[송철호]] 후보로 바뀌었으나 여전히 문제는 진행형이다. 이 시기부터 대외활동보다는 울산 내 노동운동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2021년]] 9월에는 [[20대 대선]]에서 [[이재명]] 후보 지지 선언에 울산 노동자 가족의 대표로 참여하였다. 여전히 [[울산과학대학]] 노조 지부장으로 활동 중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