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순남 (문단 편집) == 생애 == 1917년 5월 28일 [[경기도]] [[경성부]] 낙원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은 비교적 괜찮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릴 적부터 수재로 유명했다고 한다. [[서울교동초등학교|교동보통학교]]를 마치고 15살 때인 1932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경성사범학교]]에 입학했는데, [[루트비히 판 베토벤|베토벤]] 등 서양 명곡들을 [[피아노]]로 연주하고 학교 [[취주악단]]을 지휘하는 등 음악가로서도 재능을 보였다. 졸업 후 몇 년간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37년에 [[일본]]으로 유학했고, 도쿄 고등음악학원에 입학해 작곡을 전공했다. 이 시절의 대표적인 스승들로 시모후사 칸이치와 하라 타로가 있었는데, 특히 하라의 경우 창작에서는 [[민족주의]] 노선을 취하면서 동시에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어 있던 인물이었다. 김순남의 작곡 성향도 하라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재학 중 일본 현대작곡가 연맹의 창작 발표회에서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참가해 '피아노 소나타 제1번'을 발표했는데, 조선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상당히 진보적인 음악 어법을 보여주어 화제가 되었다. 1942년 귀국한 뒤에는 [[조선총독부]]의 관제 음악단체 '조선음악협회'에 가입했는데, 그러면서도 좌익계 비밀 음악 동아리인 '성연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해방 직전까지는 주로 [[벨라 바르톡|바르토크]]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스트라빈스키]] 등 동시대 유럽 대가들의 음악 어법을 도입한 전위적인 곡들을 썼는데, 피아노 소나타 제2번과 피아노 3중주 제1번, 자신의 결혼식 때 반주음악으로 쓴 피아노 3중주 '결혼', 가곡 '철공소' 등이 대표곡으로 손꼽힌다.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망 후에는 '건국행진곡'이나 '해방의 노래', '농민가' 등 해방가요를 많이 작곡했고, 여러 계파의 음악인들이 결성한 '조선음악건설본부'에도 가입했다. 하지만 이 단체는 이내 좌익/우익과 친일계/민족계 인사들 간의 격심한 갈등으로 해산되었고, 김순남도 결국 탈퇴한 뒤 좌익계/민족계가 규합된 '조선음악가동맹'으로 옮겼다. 각종 해방가요 외에도 2권의 가곡집과 교향곡 제1번, 피아노 협주곡 제1번, 합창 붙은 교향곡 '태양없는 땅' 같은 본격적인 관현악 작품들도 작곡했다. 특히 교향곡과 협주곡의 경우 해당 장르에서 한반도 최초의 작품들로 기록되고 있다. 심지어 좌익 세력들과 대척점에 있던 미군정 당국에서도 예의 주시하는 인물이었고, 줄리어드 음악원 출신의 피아니스트인 문화 담당 장교 엘리 하이모비츠는 미국 유학까지 주선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 유학 계획은 김순남 자신의 거절과 미군정 당국의 강한 반공 성향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면서 좌익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는데, 이를 피해 여러 인사들이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피신했다. 김순남도 [[대구 10.1 사건]]을 노래한 [[인민항쟁가]] 작곡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아내와 외동딸을 남겨둔 채 [[월북]]했다. 그 뒤 [[평양시|평양]]에서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과 평양음악대학 작곡과 교수를 역임하면서 한반도 최초의 본격 [[오페라]]인 '인민유격대'와 오라토리오 '승리', 서곡 '영웅 김창걸[* 6.25전쟁 당시의 인민군 [[군관]]으로, 본명은 장창궐이다. 1950년 12월 25일 602.6고지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며, 사후 북한 정권에 의해 [[공화국영웅]]칭호를 추서받았다.]' 등의 작품을 남겼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에는 북한 정부의 후원으로 [[소련]]에 유학했고,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에서 [[아람 하차투리안]]에게 배웠다. 하차투리안은 김순남을 매우 마음에 들어했는지, '조선 빨치산의 노래'를 편곡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유학 생활은 종전과 동시에 끝났는데, 북한에서 소환 명령이 내려지자 급히 귀국해야 했다. 당시 소련에서는 김순남 외에도 김원균, 문경옥, 조길석 등 북한 작곡가들이 유학 중이었는데, 소환 명령을 받은 이는 김순남 뿐이었다. 어째 낌새가 좋지 않다고 생각한 주변인들이 남아있어 보라고 권유했지만, 김순남은 별일 없을거라고 생각했는지 귀국해버렸다. 주변인들의 예측대로, 귀국 후 김순남은 전쟁의 책임이 억지로 떠넘겨진 [[남조선로동당|남로당]] 일파로 간주되어 심한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김순남은 남로당의 최고 지도자였던 [[박헌영]]과 친분이 두터웠고, '박헌영에게 드리는 노래'라는 곡까지 써줬다. 월북 후에도 어느 공연에서 박헌영을 위해 피아노로 즉흥 연주를 해준 기록이 있을 정도. 결국 1958년에 모든 창작 권리를 빼앗기고 함경남도 [[신포]]의 조선소 주물공으로 [[숙청]]당했다. 1960년대 중반에 '''복권되어''' 다시 창작 권리를 되찾았다. 복권 후 몇 년 동안 작품활동을 계속하여 칸타타 '남녘의 원한을 잊지 말아라'와 바이올린 독주곡 '이른 봄'과 함경남도 일대의 민요를 채보한 기록물 등을 발표했다. 하지만 몇 년뒤 [[결핵]]에 걸리면서 다시 창작 활동을 중단하고, 평양과 [[함경남도]] 일대의 요양소를 전전하며 오랜 투병 생활에 들어갔다. 1970년대 이후에는 '''복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출판물에서 이름이 거의 언급되지 않게 되었다. 1983년경 신포에서 세상을 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